호남 천년 고도에 정원의 풍류가 흐른다[김선미의 시크릿가든]

글 사진 전주·김제=김선미 기자 2026. 10. 31.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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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그려진 전주지도. 가을의 문턱에서 전주와 인근 김제의 정원들을 둘러보았다.

1998년부터 전주 시내에서 요리학원을 운영해 온 그는 정원을 만들 땅을 물색하다가 2017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임한솔 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전주는 수려한 문화와 자연을 갖춰 관아의 누정과 오목대, 한벽당 등 이름난 명승지가 많았다"며 "도시의 일상에 정원문화가 스며들어 내려오는 것 같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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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김제 정원 여행

조선 후기 그려진 전주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조선 후기에 그려진 전주지도(全州地圖)에는 전주읍성과 주변 산세, 관아 건물들이 산수화처럼 펼쳐져 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 뒤편에는 숲이 우거지고 백로 떼가 모여 있다. 곳곳에 만개한 복사꽃은 화사한 정취를 전한다.

조선 왕조의 본향이자 전라감영이 자리했던 전북 전주는 오랫동안 호남의 정치·문화 중심지였다. 옛사람들이 누정과 산수를 찾아 풍류를 즐겼다면, 오늘날 전주 시민들은 일상의 공간에 정원을 가꾸고 이웃과 나눈다. 가을의 문턱에서 전주와 인근 김제의 정원들을 둘러보았다.

● 담장 없는 정원에서 배우는 비빔밥

전주 덕진구 국제요리학원의 정정희 원장 부부.
전주 덕진구 진북동 국제요리학원에는 담장이 없었다. 빨간 우체통 옆에 ‘세렌디피티(Serendipity·뜻밖의 발견)’라는 푯말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잔디마당에는 꽃과 나무, 아기자기한 장식물이 어우러져 있었다. 정정희 원장이 직접 구운 과자와 차를 내오며 말했다. “정원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담장을 만들지 않았어요.”

1998년부터 전주 시내에서 요리학원을 운영해 온 그는 정원을 만들 땅을 물색하다가 2017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처음에는 풀과 나무가 거의 없는 빈 땅이었다. 정 원장 부부는 묘목들을 사다 심고 키우며 지금의 정원을 만들었다.

오랫동안 회계 업무를 하다 은퇴한 남편은 이제 빵을 굽고 정원 소품을 만든다. 버려진 의자를 주워 오고 나무를 잘라 평상과 선반도 만든다. 정 원장이 말했다. “삐뚤삐뚤해도 좋아요. 딱 남편 느낌이거든요.” 이웃들의 마음도 정원에 쌓였다. 정 원장이 항아리를 갖다 놓은 걸 보고 동네 어르신들이 항아리를 하나둘 가져다주어 이젠 더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다.

이곳에서 요리를 배우는 사람의 약 80%는 외국인 관광객이다. 전주비빔밥과 떡갈비, 잡채 등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어 원데이 클래스를 신청한다. 정원에서 키운 쑥갓잎으로 수수부꾸미를 만들기도 하고 꽃으로 요리를 장식하기도 한다. 정원에서 자라는 빨간 고추와 노란 조선오이가 유독 정다워 보였다. 한국 음식을 배우러 온 외국인들이 전주의 정원생활까지 경험하는 셈이다.

전주시 아름다운 정원 공모전 은상(2020년)을 받은 이곳은 굿네이버스와 함께하는 ‘좋은 이웃 학원’이기도 하다. “자립을 준비하는 청년들, 손주를 돌보느라 지친 할머니들이 찾아와 정원에서 쉼과 위로를 얻을 때 보람을 느껴요.”

● ‘땅에 그림 그리는’ 꿈결 같은 세상

전주 완산구 ‘꿈결같은 세상’ 정원 주인 정현경 씨의 집 내부.
전주 완산구 단독주택단지에 있는 ‘꿈결같은 세상’은 2018년 산림청이 주최한 제1회 아름다운 정원 콘테스트에서 은상을 받은 개인 정원이다. 크지 않은 마당에 정원과 온실을 알뜰하게 꾸민 것도 놀라웠는데, 집 안에 들어서니 지상부터 2층까지 이어지는 선룸에 화분이 가득했다. 마치 초록색 커튼이 드리워진 것 같았다. 그야말로 ‘식물의 집’이었다.

약대를 나온 정현경 씨는 의사 남편과 가족을 챙기며 오랫동안 아파트 베란다에서 식물을 키웠다. “애들만 키우고 살기엔 답답했거든요.” 화분이 늘어나 ‘아파트가 터져 나갈 것 같던’ 무렵, 미국의 유명 정원사 타샤 튜더를 알게 됐다고 한다. 꽃이 가득한 정원에서 살아가는 타샤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꿈꾸기 시작했다. ‘나도 마당이 있는 집에 살고 싶다.’

‘꿈결같은 세상’ 정원을 가꾸는 정현경 씨.
그렇게 집을 지었으나 처음부터 정원 가꾸기가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베란다에서 화분을 돌보는 일과 땅에 식물을 심는 일은 많이 달랐다. 경기 이천에 사는 영국 풍경식 정원 전문가를 스승 삼아 전주와 이천을 오가며 정원 일을 배우고 연구했다.

“남들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지만 저는 땅에 그림을 그려요.” 정 씨는 네 개의 원형 공간에 테마정원을 만들었다. 특히 눈길을 끈 건 대형 화분을 땅에 묻고 그 안에 작은 식물 화분을 넣어 교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봄에는 수선화, 가을에는 야생화 등 계절에 따라 화분을 바꿔 넣으며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정 씨는 집 밖으로 이어지는 마을 산책로도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가꾸고 있다. ‘꿈결 같은 세상’은 나이가 들어도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정 씨 부부가 좋아하는 가요 제목이다. 그 정원에서 본 단아한 수박풀꽃이 정 씨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 정원이 일상이 되다

정원 가꾸기의 즐거움은 어떻게 도시의 문화로 확장될까. 2023년 10월 중산공원에 문을 연 전주정원문화센터는 시민들이 정원생활을 배우는 공간이다. 아열대 식물원과 정원문화도서관, 교육실 등을 갖춘 이곳은 나무 가지치기, 계절별 정원관리, 정원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시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최현규 센터장은 “정원 교육은 시민 스스로 정원을 가꾸고 이웃과 나누는 방향이 돼야 한다”며 “이를 통해 전주가 하나의 정원으로 성장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시민 참여도 활발하다. 초록정원사는 전주시가 사단법인 더숲과 민관협력으로 2019년부터 양성하는 시민 정원사로 지금까지 580명이 배출됐다. 이들 중 일부는 전주의 공원과 한옥마을 등에서 정원디자인과 해설, 유지관리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원 교육은 시니어 일자리로도 이어지고 있다. 더숲 이선희 총괄사무국장은 “초록정원사 교육을 받거나 조경기능사 자격을 갖춘 60대 이상이 보수를 받는 ‘초록정원관리사’로 활동하고 있다”며 “온라인 소통방인 밴드에 그날그날 활동 내용을 올려 공유하기 때문에 정원이 꼼꼼하게 관리된다”고 설명했다.

전주 한옥마을 고택 학인당의 5대 종부인 안소연 씨 부부.
정원문화는 유서 깊은 고택에서도 빛을 발한다. 한옥마을에서 1908년에 지어진 고택 ‘학인당’을 찾았다. 한때 판소리 명창들이 공연했고 해방 이후 백범 김구가 머물기도 했던 이곳에는 돌계단이 있는 깊은 우물이 남아 있다. 후손들은 고택을 정성껏 돌보며 생기를 더한다. 임한솔 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전주는 수려한 문화와 자연을 갖춰 관아의 누정과 오목대, 한벽당 등 이름난 명승지가 많았다”며 “도시의 일상에 정원문화가 스며들어 내려오는 것 같다”고 평했다.
● 계단식 논에 20여 년간 만든 숲

김제 금산면 ‘늘숲’의 이구옥 대표.
전주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차로 약 30분 이동하자 김제시 금산면의 정원 카페 ‘늘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구옥 대표는 2004년 계단식 논이던 땅에 집을 짓고 잔디를 깔았다. 당시에는 버드나무 몇 그루 외에 이렇다 할 나무가 없었지만 주변 땅을 조금씩 사들이고 나무를 심어 지금은 1만 평 규모의 정원이 됐다.

정원 곳곳의 높낮이가 다른 건 원래 계단식 논이었던 땅의 흔적이다. 유통업에 종사했던 이 대표는 사업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달래려고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모악산을 바라보는 이곳은 처음에는 손님들을 불러 음식을 즐기고 쉬던 개인적인 공간이었다. 지금은 카페와 유리온실 등을 갖춰 누구나 찾아올 수 있다.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도 자주 소개한다.

이 대표는 말했다. “삭막하고 외진 곳이라 이웃들이 하나둘 떠나며 제게 오래된 시골집을 사 달랬죠. 그렇게 사들이면서 가능한 한 원래 모습을 살렸어요.” 그는 흙집을 허물지 않고 손질해 사람들이 옛 정취를 느끼며 공간을 대여하거나 숙박할 수 있게 바꿨다. 소 여물통, 오래된 우물, 장독대…. 무엇보다 카페 창문 너머 보이는 돌담과 감나무 풍경이 일품이었다.

그 옛집에는 오래된 농이 놓여 있었다. 세상을 뜬 이 대표의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것이다. 이 대표는 시간과 정성을 들여 정원을 만들고 그 안에 오래된 집과 가족의 추억을 포개어두었다. 전주에서 김제까지 이어진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이 가을날 그리워진다.


글 사진 전주·김제=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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