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된 ‘톤즈의 아이’... “이태석 신부의 길 걷습니다”
[조유미 기자의 깨발랄]
남수단 최초 신경과 전문의 된
‘톤즈의 아이’ 조셉 볼

2001년, 내전 중이던 아프리카 수단 남부의 한 마을에 폭격이 가해졌다. 당시 열한 살 무렵이던 조셉 볼(36)은 아름드리나무 아래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교사(校舍)가 없어 대신 교실 역할을 하던 나무였다. 그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한다”고 했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 일곱 명이 눈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총탄에 쓰러지는 사람들, 전쟁터로 향하는 또래 소년병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전쟁이 전부였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군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살아남기 위해 총을 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4년 뒤, 그는 고향 인근 마을 톤즈에서 한 한국인 신부를 만났다. 고(故) 이태석(1962~2010) 신부였다. 말라리아에 걸려 심한 고열에 시달리던 그를 이 신부가 치료했다.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던 먼 나라 한국에서 온 신부는 밤낮으로 환자를 돌봤다. 아픈 이가 찾아오면 누구든 외면하지 않았다. 한센인 마을에 찾아가 환자 손을 붙들고 약을 건넸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소년의 마음속에 다른 꿈이 움텄다.
이태석 신부의 제자로 ‘톤즈의 아이’였던 그는 20여 년이 흘러, 남수단 최초의 신경과 전문의가 됐다. 이태석재단 장학금 지원을 받아 지난 6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대 블랙라이언병원에서 신경과 레지던트 수련을 마쳤다. 볼은 “신부님을 만나고 사람을 치료하는 일이 싸우는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펠로십 과정을 알아보기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2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이태석재단에서 만났다. 그가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몇 시간 전이었다.

◇그에게 의사란…
-펠로십 수련을 하고 싶다고요.
“네. 제 목표는 현재 남수단에는 없는 전문 의료 기술을 배우는 것입니다. 미래의 남수단 신경과 전문의들을 직접 양성하는 데 기여하고 싶어요. 신경중재술이나 뇌졸중 의학, 임상신경생리학 등의 분야에서 더 수련하고 싶습니다.”
-왜 하필 신경과인가요?
“남수단에는 뇌졸중이나 뇌전증, 파킨슨병 등 신경계 질환으로 고통받는 환자가 많습니다. 하지만 신경과 전문의는 한 명도 없어요. 남수단 의료 시스템에서 가장 소외된 분야 중 하나로 꼽히죠. 치료를 받으려면 주변 국가로 가야 하는데 해외에서 치료받을 형편이 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결국 장애가 남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아요. 남수단 환자들이 자국에서 양질의 신경과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의사가 됐다니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겠어요.
“네. 제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응원해 주십니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보답하지 못해 마음이 무겁습니다.”
-남수단에서 의사는 어떤 대우를 받나요.
“의사가 꼭 필요한 직업인 만큼 사회적으로 큰 존경을 받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선택하는 직업은 아닙니다. 남수단 의료 체계는 아직 발전 단계에 있고 많은 의사가 자원이 부족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조차 가족을 먹여 살릴 형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으로 의사를 꿈꿉니까.
“대개 공동체에 봉사하고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의사의 길을 택합니다.”
-당신에게 의사란 어떤 의미인가요.
“제게 의사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가장 힘든 순간에 환자의 곁을 지키며 고통을 덜어주고, 존엄과 희망을 되찾도록 돕는 일입니다.”



◇‘신부님처럼 되고 싶다’
이태석 신부와의 만남은 그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한때 그는 분쟁을 겪은 많은 아이처럼, 고통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이 무장 투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신부님을 만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산다는 것, 다른 사람을 돕는 삶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볼은 제2차 수단 내전(1983~2005)이 한창이던 시기 지금의 남수단 티에트 지역에서 태어났다. 수도 주바에서 직선거리로 약 450㎞ 떨어져 있다. 그의 여권상 생년월일은 1990년 1월 1일이지만, 피란 중 태어나 정확한 생일을 모른다고 한다. 2001년 고향 마을이 폭격을 당한 뒤 조셉의 부모는 그를 케냐 난민 캠프로 보냈다. 4년 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삶은 녹록지 않았다.
-그 무렵 말라리아에 걸렸다고요.
“형이 저를 자전거에 태워 신부님이 계신 톤즈의 돈보스코 선교 진료소까지 데려갔습니다. 차를 타면 1시간 만에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차를 빌릴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2005년 이 신부를 처음 만났다. 이 신부는 2001년 사제품을 받은 뒤 2008년까지 톤즈에서 선교 활동을 하며 의료·교육 봉사를 했다. 톤즈는 오랜 내전으로 의료·교육 기반이 무너져 내린 남수단 중부의 오지였다. 이 신부는 내전으로 황폐화된 이곳에 12병실 규모의 진료소를 지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과정을 갖춘 학교와 기숙사를 세웠다. 이 신부는 볼이 공부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그가 치료를 마친 후에도 기숙사에 머물며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도왔다.
-다시 공부를 할 수 있게 됐어요.
“부모님은 기초 교육조차 받지 못하셨지만, 어릴 때부터 제게 배움의 소중함을 강조했어요.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돼 무척 기뻤습니다. 신부님이 한국에 다녀오실 때마다 학용품을 나눠주셨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우리에겐 너무나 고마운 선물이었죠.”
진료소에는 하루 100여 명의 환자가 찾아왔다. ‘그곳에 가면 살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며 톤즈 일대 80여 마을에서 환자가 밀려들었다. 톤즈 지역민은 만성 영양실조로 결핵·폐렴·말라리아에 취약했다. 그중에는 100㎞를 걸어와 한밤중 문을 두드리는 환자도 있었다. 이 신부는 늦은 밤 찾아온 환자도 돌려보내는 일이 없었다. 찾아오기 어려운 환자를 만나기 위해 직접 차를 몰고 톤즈 일대를 돌며 이동 진료를 했다.
주말이면 한센병 환자 마을을 찾아가 상처의 고름을 짜내고 붕대를 감아주며 약을 건넸다. 발이 변형된 환자들을 위해 발 모양을 종이에 하나하나 그려 맞춤 신발을 만들었다. “저는 신부님이 많은 사람이 외면하던 한센병 환자들을 깊은 연민과 존중, 사랑으로 돌보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신부님은 모든 환자를 가족처럼 대했습니다.”

아이들은 이 신부를 ‘쫄리(이태석 신부의 애칭)’라 부르며 따랐다. 그의 세례명 ‘요한(John)’과 성(Lee)을 붙여 애정과 존경을 담아 부른 이름이었다.어느 순간부터는 ‘신부님처럼 되고 싶다’ ‘신부님처럼 살고 싶다’는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볼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 신부는 사제이자 의사였고, 선생님이었다. 교실에서는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고, 수업이 끝난 뒤에는 “음악이 상처받은 아이들의 마음을 치유해 주길 바란다”며 35명 규모의 브라스밴드를 만들어 악기 연주법을 가르쳤다. 브라스밴드는 훗날 남수단 정부 행사 연주에 초청되기도 했다. 2012년에는 한국을 찾아 한·아프리카 장관급 회의(KOAFEC) 무대에서 ‘아리랑’과 ‘고향의 봄’을 연주했다.
-브라스밴드 멤버였나요?
“신부님께 플루트 부는 법을 배웠지만, 저는 통 연주에 소질이 없었어요(웃음). 대신 농구를 배웠죠. 신부님은 농구를 할 때 아이처럼 즐거워했어요.” 그의 키는 188㎝다. 이 신부는 볼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격려했다. 이때 경험을 발판 삼아 2019년 볼은 남수단 대표로 우간다에서 열린 국제 농구 대회에 참가했다.
-기억 속 신부님은 늘 따뜻한 모습이었나 봐요.
“우리는 전쟁으로 트라우마를 겪은 아이들이라 규칙이나 질서에 익숙하지 않았어요. 신부님은 그런 부분에 엄격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의 것을 훔치면 안 된다고 하셨고, 원칙을 어기면 화를 내셨습니다.”
‘어떤 상황도 영원하지 않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이 신부는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올 테니 우리가 남수단의 미래에 기여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잘하는 일을 찾아 공동체에 돌려주고,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신부는 세상을 떠났지만
2010년 1월, 이태석 신부가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볼은 “학교에서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아이들은 이 신부의 사진을 들고 마을을 행진했다. 주민들도 거리로 나와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다. 평소 집단행동을 통제하던 무장 군인들조차 이날은 행진을 막지 않았다. 이 신부의 헌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2010)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 무렵 볼은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신부님과 생활하며 공부를 계속하면 언젠가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조국에 도움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문제는 생계였다. 기본적인 생활조차 이어가기 어려워지면서 낮에는 수업을 듣고 밤에는 민간 회사의 야간 경비원으로 일했다. 그 밖의 시간에는 닥치는 대로 막노동을 했다. 공부를 그만두고 돈을 벌어야 하나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마다 방 안에 있는 이 신부 사진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2011년, 이태석재단의 ‘권성현 장학생’으로 선발되면서 안정적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이 장학금은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지만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고 권성현씨의 부모가 아들의 못 이룬 꿈을 잇고 싶다며 기탁했다. 볼은 남수단 서북부 바르 엘 가잘 의대에서 6년간 공부해 의사 자격을 취득, 17개월간의 인턴을 마치고 주바에 있는 병원에서 일반의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 시절 공부는 어떻게 했나요.
“숙소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손전등을 천장에 매달고 밤마다 그 빛에 의지해 책을 읽었어요. 물은 20여 분 거리에 있는 우물에서 길어와 마셨고요. 남수단에서는 아직도 많은 학생이 이런 환경에서 공부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시간을 내 남수단 적십자에서 의료 자원 봉사를 했다. 이 신부의 정신을 이어가고 싶어서였다고 했다.
볼은 신경계 질환을 앓고도 전문의가 없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를 잇달아 마주하면서 신경과 레지던트 수련을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남수단에는 전문의 수련 과정이 없었다. 남수단을 떠나 에티오피아로 향했다. 그가 수련한 블랙라이언병원은 에티오피아 최대 국립 병원으로 아프리카 주변국 젊은 의사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볼은 이곳에서 4년간 전문의 수련을 하며 실력을 인정받아 직접 환자를 진료할 자격을 얻었다. 고된 수련 중에도 신경계 질환에 관한 연구를 이어가 논문도 여러 편 썼다.

-타국 생활도 쉽지 않았다고요.
“언어 장벽 때문에 고전을 했어요. 저는 아랍어와 영어, 우리 지역의 고유 언어를 쓸 줄 알아요. 하지만 에티오피아에서는 주로 현지 공용어를 쓰고, 영어를 못하는 환자가 있어 어려움을 겪었죠. 오전 7시에 출근해 밤새 환자를 보고, 다음 날 오후 5시에야 병원을 나서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수없이 포기하고 싶었다. 고된 생활은 견딜 수 있었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볼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며 “이 길을 가는 게 맞는지 고민이 굉장히 깊었다”고 했다.
볼은 9남 3녀 중 넷째다. 그의 가족은 여전히 고향에서 수수와 옥수수를 재배하며 농사를 짓는다. 막내 여동생은 학비가 없어 공부를 포기하고 부모님을 돕고 있다. “남수단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생존을 위해 농사를 지어요. 팔기 위해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먹기 위해서요.” 고민 끝에 생활비를 아껴 장학금 일부를 고향에 보냈다. 역시 이 신부 사진을 보며 버텼다. 공부할 수 있는 환경임에 감사했다.
◇봉사하는 삶의 의미
인터뷰 도중 볼이 한참 휴대전화를 들여다봤다. 고향에 있는 여동생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어머니가 열이 심하게 난다고 하네요. 아무래도 말라리아에 걸린 것 같아 걱정입니다.”
-고향 집 근처에 병원은 있나요?
“병원이라기보다 작은 보건소가 있습니다. 수술은 할 수 없지만 기본적인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에요. 걸어서는 한 시간, 오토바이를 타면 30분쯤 걸려요.”
-간단한 병인데도 치료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겠네요.
“가장 큰 문제가 교통수단입니다. 오토바이도 돈이 있어야 탈 수 있으니까요. 응급 환자를 병원으로 실어 나르는 구급차 체계가 사실상 없습니다.”
-치료할 수 있는 병인데도 죽어가는 환자가 얼마나 많은가요.
“셀 수 없습니다. 대단히 많습니다.”
2018년 평화 협정으로 남수단 내전은 일단락됐지만, 정부군과 야권 세력의 무력 충돌은 최근 다시 격화하고 있다. 볼은 “지금도 계속되는 갈등으로 많은 아이가 부모를 잃고 있다”고 했다. “부모가 없으면 교육을 지원해줄 사람도 없고, 아이가 스스로 삶의 길을 찾아가기도 어렵죠. 먹을 것, 입을 것, 거처 같은 기본적인 생계 수단을 해결하지 못한 아이들은 결국 범죄에 내몰립니다.”
-아직도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가 많다고요.
“분쟁 속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공부에 집중하거나 어린 시절을 즐기는 대신 어떻게 살아남을지, 어떻게 안전을 지킬지를 생각해야 하니까요. 전쟁은 건물을 파괴하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뿐 아니라 아이들의 꿈과 기회까지 빼앗습니다. 저는 범죄가 늘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교육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슬픈 일입니다.”
볼은 “앞으로도 이태석 신부님처럼 의술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했다. 그의 꿈은 남수단 최초의 종합 신경과 진료 센터를 설립하고 남수단에서 신경과 전문의 수련 과정을 만드는 것이다. 볼은 지난 16일 보건 의료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방한한 남수단 대통령 특사를 만나 이런 포부를 밝혔다.
그에게 지금 이태석 신부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볼은 “신부님은 안락함보다 봉사를 택했고, 고향을 떠나 당시 폭력적인 상황에 놓여 있던 남수단으로 왔다”며 “남수단인으로서, 개인으로서 신부님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그리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신부님이 눈앞에 있다면요.
“오래전 신부님이 우리 안에 심어 놓은 씨앗이 우리 삶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신부님의 아이들은 이제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사가 된 사람도 있고, 엔지니어와 교사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계속 우리의 선생님으로 남아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이끌어주고 계십니다.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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