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 술에 깃든 그리운 기억들

정동현 음식 칼럼니스트 2026. 10. 31.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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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두부김치

서울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정릉 큰이모네를 들렀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큰이모는 외할머니를 도와 다른 이모들을 자식처럼 키웠다고 했다. 쭈뼛거리며 자리를 잡으면 상냥한 사촌 형수는 나를 반기며 밥상을 차렸고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촌 형은 중년이 가진 조금은 피곤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아버지는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큰이모부와 마주 앉았다. 곧 큰이모가 가지고 온 술상에는 막걸리와 반찬 몇 개가 놓여 있었다. 큰이모부와 아버지는 배추김치, 두부, 달걀 프라이 같은 집 반찬만 먹으며 몇 시간이고 양반다리 자세로 앉아 웃고 떠들었다. 나는 밥을 먹고 소파에 앉아 있다가, 그마저도 지치면 빈방 어느 구석에서 굴러다니는 책을 집어 들고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큰이모부가 취해 자겠다고 안방으로 들어가면 그제야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안에 저런 어른이 없어.” 아버지는 정릉을 다녀오면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버스에서도 기차에서도 곤히 잠을 잤다. 나는 옆에 앉아 그런 아버지를 오래 쳐다봤다.

서울 중구 ‘백곰막걸리’의 백곰 사합.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광화문에 백곰막걸리가 새로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본래 압구정로데오 한복판에서 장사를 하던 이 집은 재개발 때문에 문을 닫았다. 그사이 이 집의 주인장은 통영에 집을 구해 살며 한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광화문 사거리 한복판이라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나무로 마감한 실내는 들어서자마자 어디선가 누룩 향이 나는 것 같았다. 전국의 전통주를 거의 다 갖춘 술 목록도, 전국 식재료로 만든 음식도 그대로였다. 눈이 크고 피부가 매끈한 주인장은 좁은 실내를 바쁜 걸음으로 돌아다녔다. 그리고 살짝 높은 톤으로 술과 음식 설명을 하고는 날쌔게 주문을 받았다. 맨 구석에 앉아도 주방 앞에 놓인 커다란 냉장고 속 빽빽이 들어찬 술들이 보였다. 사람이 궁리하여 써놓은 메뉴판은 한 줄 한 줄 읽는 재미가 있었다.

시킨 술이 먼저 나왔다. 안동에서 나는 ‘일엽편주’였다. 마개를 열자 곰삭은 오래된 냄새가 아닌, 갓 딴 청포도처럼 세련된 과실 향이 새어 나왔다. 작은 잔에 따라 한 번에 들이켰다. 혀에도 목에도 걸리는 데 없이 술이 넘어갔다. 귤 껍질 같은 잔향이 잠시 입안에 머물다 사그라들었다. 이어 한우 육회가 접시 가득 나왔다. 한우를 얇게 저며서 마늘 기름, 참기름, 소금으로 살짝 버무렸다. 위에는 채 썬 참외와 영양부추를 곁들였다. 함께 먹으니 단맛과 짠맛이 찰진 고기를 씹는 사이 엇갈리며 혀에 감돌았다.

주인장은 오고 가며 짧게 안부를 물었다. 여전히 가게가 쉬는 주말에 전국으로 출장을 다닌다고 했다. 이 집에서 내는 술과 음식 모두 그가 혀와 위장으로 겪어 냈을 거란 짐작이 들었다. 닭다리에서 살을 발라 전분과 실파를 넣어 구워낸 ‘닭다리살전’은 안주가 아니라 식사를 하는 것처럼 묵직했다. 곁들이기에 맑은 술보다는 그만큼 힘이 받쳐주는 탁주가 나아 보였다. 추천을 받아 ‘해남찹쌀생막걸리’로 골랐다. 잔에 따르니 정릉 술상에 놓이던 그 뿌연 빛깔이었다. 하얀 두부가 블록처럼 쌓인 ‘백곰 사합’이 나왔다. 여섯 가지 김치와 포항에서 올라온 피문어숙회, 오겹살 수육, 그리고 마포 황금콩밭이란 집에서 받아온 두부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하얀 두부를 젓가락으로 잘라 입에 넣었다. 매끈한 질감과 녹아드는 식감 사이로 고소한 콩 향기가 밝게 퍼졌다. 피문어숙회는 질기지 않고 말캉하며 촉촉했다. 쫀득한 껍질을 살려 익힌 오겹살 수육은 잡내 없이 돼지고기의 고소한 맛만 남겼다. 이렇게 순한 음식을 이끌고 가는 것은 김치였다. 과하게 익혀 신맛이 강하거나 식감이 무르지 않았다. 총각무, 열무, 배추, 양파가 모두 아삭하고 상큼했다. 무엇보다 양념이 간결하여 짧은 문장처럼 김치 맛이 정확하고 힘이 있었다. 옛 어른들처럼 김치 한 조각, 두부 한 모에 막걸리를 곁들였다. 예전부터 보고 겪었던 것들이 대물림되어 내 몸과 말에도 깃드는 것 같았다.

돌아보면 아버지가 큰이모부와 한참 떠들던 것들은 별것이 아니었다. 그전에 같이 먹은 술, 요즘 먹는 음식, 자주 듣는 노래, 옆에 딸린 가족들, 그런 것들을 보물처럼 쌓아두고 또 말하고 말했다.

#백곰막걸리: 백곰 사합(4만4000원), 돼지갈비 양념구이(3만9000원), 닭다리살전(3만3000원), 0507-1348-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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