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문제 설명하는 틀…『로빈슨 크루소』 사랑받는 이유

2026. 10. 3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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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환의 세상만사 경제학] 무인도서 찾는 현대 ‘경제모형’
10월 하순이면 전국의 대학에서 중간고사가 치러진다. 경제학 교수들은 시험문제를 낼 때 경제 주체의 이름을 재미있게 짓고(‘카리나’) 요즘 핫한 재화를 예시로 드느라(‘먼작귀 키링’) 신경을 쓰곤 한다. 물론 유행을 타지 않는 고전적인 이름이나 사례가 필요할 때도 있기 마련인데, 그럴 때마다 믿고 쓰는 이름 중 하나는 ‘로빈슨 크루소’다.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한 장면. [중앙포토]
18세기 초에 발표된 대니얼 디포(Daniel Defoe)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널리 읽힌 책 중 하나일 것이다. 소설의 세세한 부분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린이용 축약판 정도의 줄거리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을까. 2000년에는 이 소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가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난파선에서 혼자 살아남은 선원이 섬에서 28년 동안 버티면서 여러 고난을 겪다가 마침내 구출된다는 이야기 구조가 워낙 강렬하고 독창적이어서, 이 소설은 특정 장르나 서사 구조를 정의하는 대표작의 반열에 올라 있다.

경제 모형에 딱맞는 『로빈슨 크루소』
‘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에 의적이 되어 권력과 싸우는 이야기’라고 하면 홍길동이나 로빈 후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가 새로운 신분으로 돌아와 통쾌하게 복수하는 이야기’라고 하면 몬테크리스토가 바로 떠오르는 것처럼 ‘유일한 생존자가 무인도에서 살아남기’라고 하면 곧 로빈슨 크루소인 것이다.

경제학자들도 로빈슨 크루소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수업 시간에 사례로, 교과서에 예시로, 시험문제에 경제 주체의 이름으로 자주 등장한다. 2023년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서 소개한 바에 따르면 마르크스와 케인스의 저작, 밀턴 프리드먼의 강의에서도 로빈슨 크루소가 등장했다고 한다. 왜 그럴까. 크루소가 처한 상황이 ‘경제 모형’의 기본 구조에 아주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경제학에서는 모형(model)을 만들어 사용한다. 설명하려는 현실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풀려고 하는 경제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한 다음 현실 속에서 이것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해 버린 것이 모형이다. 경제학 수업 시간에 뭔가 설명을 시작할 때는 늘 다음과 같이 모형을 설정하는 데 필요한 가정(assumption)들을 이야기하게 된다. “어떤 경제 안에 모든 소비자를 대표하는 개인이 한 명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의 소득이 특정 값으로 주어질 때 이 돈을 쌀(X)과 옷(Y) 사이에서 어떻게 나눠서 소비하면 좋을까?”

당연히 현실은 이것보다 아주아주 많이 복잡하다. 5000만 인구를 한 명이 대표하기도 어렵고, 우리의 소비 대상이 되는 재화와 서비스는 그야말로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화한 모형을 이용해 두 개 재화 간 개인의 선택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경제문제들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경제학의 힘이고 경제모형의 장점이다. 훌륭한 경제학자는 모형을 만들 때 아주 단순해질 때까지 현실의 가지치기를 잘 해내면서 동시에 핵심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것은 모두 남겨놓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경제, 가장 작은 경제모형은 어떤 형태일까. 경제주체가 일단 존재하긴 해야 하니까 ‘1인 경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사람이 혼자서 생산도 하고 소비도 하며 살아가는 거다. 농산물을 생산하든, 집을 짓든, 도구나 무기를 만들든 간에 죄다 혼자서 하는 경제. 교환도 없고 화폐도 필요 없는 자급자족 경제. 노동자로서 스스로의 노동을 기업가로서 자기 자신이 고용하는 경제. 이런 단순한 모형만으로도 경제활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로빈슨 크루소의 삶이다.

1인 경제의 특성과 거기에 필요한 가정들을 수업 시간에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대신 “로빈슨 크루소가…”라고 말을 꺼내면 학생들이 ‘아, 1인 경제를 이야기하는 것이구나’라고 금방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가 경제학자에게 사랑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장 작은 경제모형의 구조를 대니얼 디포가 소설 형식으로 대중들에게 이미 예습을 시켜놓은 셈이니까.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에는 아주 매력적인 포인트가 또 있는데, 바로 두 번째 주요 인물 프라이데이의 등장이다. 경제학이나 수학·물리학·공학 등에서는 보통 어떤 현상을 이해하려 할 때 가장 단순한 상황을 가정하고 거기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한 다음, 그걸 조금씩 더 현실적으로 확장한 모형을 만들어 나간다. 특히 어떤 변수가 ‘1’일 때 작동하던 모형을 ‘2’일 때도 쓸 수 있다고 보여주는 것은 의미가 크다. 모형이 양적으로 커질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달라지기 때문인데, 로빈슨 크루소가 혼자 살던 섬에 프라이데이가 나타나는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다.

1인 경제가 2인 경제로 바뀌면 이제는 이 경제에 교환과 시장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수 있다. 둘 다 생산자라고 간주하고 각자 생산한 것을 서로 바꿔서 소비하도록 할 수도 있고, 한 사람의 노동을 다른 사람이 고용하고 임금을 지불하는 상황도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모형을 공부할 때도 ‘프라이데이’와 ‘로빈슨 크루소’라는 이름은 큰 도움이 된다. 고립된 무인도에 두 사람만 있는 경제, 염소젖이라는 단일 자원, 치즈를 생산하는 기술 등을 건조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프라이데이가 로빈슨 크루소를 고용해서 염소젖으로 치즈를 만든다고 하자”라는 말로 시작하는 강의에서 전달해주는 정보가 훨씬 풍부하고 직관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중심 서사가 ‘희소성(scarcity)의 해결’이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크루소가 혼자 살아남은 곳이 성서에 나오는 에덴동산 같은 곳이면 어땠을까. 일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넘쳐나고, 위험한 맹수도 없고, 하루하루 즐기면서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곳이었다면? 그랬으면 크루소가 그곳에 도착하면서 소설이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야기의 전개는 매우 달랐다. 크루소가 도착한 곳은 문명인을 전혀 만날 수 없는 섬이었고, 식량을 구한다든가 맹수나 식인종으로부터 스스로의 안전을 지키려면 불을 피우고 집을 짓고 농기구와 무기를 만드는 등 많은 일을 해야만 했다.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원은 한정적이다.

땀방울의 가치 알려주는 18세기 소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중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를 묘사한 부분. 인류는 태초부터 땀흘려 노력해야만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모든 경제문제는 바로 이 희소성에서 출발한다. 경제학이 무엇이냐고 할 때 ‘희소성의 문제를 분석하고 그 대응 방안을 찾는 학문’이라고 정의하는 경우도 많다. 이 문제가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했기에, 성서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훔쳐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에게 신이 하신 말씀이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였겠는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 이것이 경제학의 철칙이고 로빈슨 크루소가 섬에 도착한 첫날부터 맞닥뜨린 문제다.

농업생산성이 크게 높아져서 농업 종사자가 전체 인구의 3%도 안 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잊고 살기 쉽지만, 누구든 먹고살기 위해서는 직접 먹을 것을 만들어내는 정도의 수고를 해야만 한다. 자급자족 방식으로 직접 농사를 짓든, 아니면 남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만들어서 식량과 교환하든 간에. 크루소가 빵을 한번 만들어 보려고 애를 쓰다가, 자기가 평소 빵을 먹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음을 깨닫는 장면도 소설에 나온다. 수억,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힌 시장을 통해 기적처럼 의식주를 해결하며 살아가는 현대 경제. 그 가장 밑바닥에는 눈앞의 희소성을 해결하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땀방울이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크루소의 1인 경제모형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이다.

이태환 세종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와 스탠퍼드대에서 공부하고 삼성경제연구소에서 한국경제의 다양한 측면을 연구했다. 주변의 사회문화 현상을 경제학으로 해석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SERICEO에서 5년간 ‘세상만사 경제학’ 강의를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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