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 감독도, 국대 감독도…이젠 적장일 뿐입니다

삼성화재 틸리카이넨 감독
“대한항공과 챔프전 대결 희망”
KB손보 라미레스 감독은
허수봉·임동혁 등 막을 궁리
女 GS칼텍스로 이적한 타나차
개막전서 전 소속팀 도공 상대
자신이 왕조로 이끈 팀을 꺾어야 한다. 자신이 지도했던 국가대표 공격수의 강타도 막아야 한다. 같은 목표를 향해 뛰었던 감독과 선수들이 이제는 서로의 약점을 파고들어야 하는 상대가 됐다.
대한항공과 현대캐피탈의 남자부 개막전, GS칼텍스와 한국도로공사의 여자부 개막전을 시작으로 31일 HK흥국금융 2026~2027시즌 프로배구 V리그가 막을 올린다. 어제의 동료에서 오늘의 적으로 마주하게 된 이들의 관계가 주요 관전 포인트로 떠올랐다.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은 토미 틸리카이넨 삼성화재 감독이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대한항공에서 세 시즌 연속 통합우승을 이끌며 팀을 왕조의 반열에 올렸다. 그는 2024~2025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났다가 2년 만에 삼성화재 감독으로 V리그에 돌아왔다.
조건과 환경이 전혀 다르다. 리그 최강팀 대한항공을 이끌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수년째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한 삼성화재를 바닥에서 끌어 올려야 한다.
삼성화재는 남자부 최다인 8차례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한 전통의 명가다. 그러나 2017~2018시즌 이후 8시즌 연속 봄 배구 진출에 실패했다. 지난 시즌에도 전반기 10연패, 후반기 13연패의 굴욕을 당하며 7개 팀 중 최하위에 머물렀다.

최강 전력의 대한항공을 이끌고 왕조를 일궜던 틸리카이넨 감독의 지도력이 ‘꼴찌’ 삼성화재에서도 통할지가 관심이다. 패배에 익숙해진 젊은 선수들에게 승리 DNA를 이식해야 한다. 그는 부임 일성으로 끈끈하고 역동적인 배구, 그동안 삼성화재가 보여주지 못한 배구를 선보이겠다고 했다.
삼성화재는 틸리카이넨 감독뿐 아니라 베테랑 세터 유광우까지 수혈했다. 틸리카이넨 감독이 직접 영입을 요청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함께 승리의 기쁨을 누렸던 대한항공을 상대로 삼성화재의 부활을 이끌어야 한다.
최근 5시즌 삼성화재는 대한항공과 30차례 맞붙어 8승 22패로 압도적으로 밀렸다. 그만큼 대한항공은 반드시 넘어야 할 상대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지난 8일 미디어데이에서 챔피언결정전에서 만나고 싶은 상대를 묻는 말에 “우리의 대답은 명확하다. 챔프전에서 대한항공을 만나길 희망한다”고 했다.
이사나예 라미레스 KB손해보험 신임 감독에게도 새로운 시험대가 기다리고 있다. 라미레스 감독은 남자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올해 동아시아선수권 우승, 아시아선수권 3위 등의 성과를 냈다. 그러나 V리그의 장기 레이스는 단기 국제대회와는 또 다른 운영 능력을 요구한다.
라미레스 감독은 대표팀에서 함께했던 V리그의 간판 공격수들도 이제 상대해야 한다. 허수봉(현대캐피탈)과 임동혁(대한항공)은 미디어데이에서 라미레스 감독의 배구 스타일을 잘 알고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라미레스 감독도 “두 선수가 절대 편하게 공격할 수 없도록 단단히 준비하겠다”고 응수했다.
여자부에서도 과거의 인연이 새로운 대결로 이어진다.
3년 9개월 만에 V리그 사령탑으로 돌아온 권순찬 정관장 감독은 과거 자신이 이끌었던 흥국생명을 상대한다. 권 감독은 2023년 1월 흥국생명이 정규리그 2위를 달리던 중 경질됐다. 선수 기용을 둘러싼 구단과의 갈등이 알려지며 논란이 일었다.
사연 많은 대결이지만 권 감독은 오히려 담담했다. 지난 컵대회에서 흥국생명과의 맞대결을 앞두고 그는 “솔직히 아무 감정 없다”고 했다. 흥국생명 역시 다른 팀들과 마찬가지로 이겨야 할 상대라는 뜻이었다.
감독뿐 아니라 유니폼을 갈아입은 선수들의 재회도 흥미롭다.
현대건설로 복귀한 메가왓티 퍼티위(등록명 메가)는 과거 두 시즌 동안 뛰었던 정관장을 상대한다. GS칼텍스로 옮긴 타나차 쑥솟(등록명 타나차)은 31일 개막전부터 전 소속팀 한국도로공사와 맞붙는다. 흥국생명으로 이적한 정호영도 정관장 선수들과 상대편 코트에서 재회한다.
과거의 인연은 승부 앞에서 특별한 변수가 된다. 상대의 장단점을 잘 아는 것은 분명 강점이지만, 자신의 전략과 습관 역시 상대에게 익숙하다는 뜻이다. 한때 승리를 함께 만들었던 감독과 선수들이 이제는 네트를 사이에 두고 맞서야 한다.
심진용 기자 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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