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이창호의 2000승을 돌아보며

남정미 기자 2026. 10. 29. 23:4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25년 12월 11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이창호 9단이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전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경식 기자

얼마 전 이창호 9단의 2000승 소식을 듣고 AI에 그의 주요 이력을 알려 달라고 했다. 1975년생인 그의 ‘주요 경력 연표’는 1983년 ‘할아버지에게 바둑을 배우기 시작’으로 출발해 1984년 ‘조훈현 9단의 내제자로 들어감’으로 이어진다. 1986년 프로에 입단해 2005년 ‘농심신라면배에서 홀로 5연승(상하이 대첩)하며 한국 우승 견인’에 이르기까지, 이창호의 20년은 잘 바느질한 옷처럼 깔끔하고 촘촘하게 채워져 있다.

특히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가 압권인데, 이 시기 그는 해마다 인생의 주요 이력을 새로 써 나간다. 1989년 KBS바둑왕전 우승으로 최연소 한국 타이틀을 거머쥐고, 1990년 스승 조훈현을 꺾고 최고위 타이틀을 가져갔으며, 1992년 동양증권배 우승으로 만 16세 6개월에 최연소 세계 챔피언이 된다. AI는 그의 주요 이력으로 총 13개를 나열했는데, 그중 11개가 그 20년에서 나왔다.

그러다 돌연 주요 이력이 20년간 뚝 끊긴다. 이력의 사전적 정의는 ‘지금까지 거쳐 온 학업, 직업, 경험 등의 내력’이다. 이창호가 이 시기 아무 직업이나 경험을 갖지 않은 것은 아닐 테다. 다만 AI가 보기에 기록할 만한 ‘주요’가 없었던 것이다. 대개 ‘에이징 커브’가 뚜렷한 분야에서 정상에 올랐던 사람들의 이력이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전성기가 지나 신체적·인지적 능력이 감퇴하고, 기량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고도의 집중력과 판단력, 기억력을 요하는 두뇌 스포츠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런데 이창호는 여기서 돌 하나를 더 놓는다. 20년 만에 주요 이력이 다시 추가된 것이다. 2025년 ‘조훈현 9단의 통산 최다승 기록 경신’. 스승의 기록을 넘어 한국 프로 바둑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기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지난 26일, ‘세계 최초 통산 2000승 달성’이란 새로운 이력이 더해졌다. 프로 입단 첫 달, 당시 조영숙 초단에게 첫 승을 거둔 뒤 40년 2개월 만이다. 통산 전적은 2000승 1무 830패(승률 70.67%).

이창호의 2000승에는 스승을 꺾은 승, 세계 정상에 최연소로 오른 승, 평생의 라이벌을 꺾은 승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만으로는 2000승의 시간을 채울 수 없다. 그 속에는 최정상에서 멀어지며 패가 늘어나는 시간, 예전처럼 계산이 정확하지 못하다는 걸 인정하는 시간, 새카만 후배에게 수읽기 실수로 지고 후회하는 시간이 담겨 있다. 이창호의 첫 1000승까진 약 14년이 걸렸지만, 다음 1000승까진 약 26년이 걸렸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에게도 인생의 ‘에이징 커브’가 있다. 기자는 그동안 이 커브가 산 모양인 줄로만 알았다. 기세 좋게 정점을 향해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곡선 말이다. 이창호의 2000승을 보며 산이 길이 되는 법을 배웠다. 산은 정점을 지나면 내리막이지만, 길은 그렇지 않다. 굽이굽이 돌아 새 길로 이어진다. 이창호가 2000승 이후에도 걸어가야 하는 길처럼 말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