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식의 이세계 ESG]K-GX 전략, 또 하나의 선언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김경식 ESG네트워크 대표 2026. 10. 2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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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7일 정부는 한국형 녹색대전환(K-GX) 전략을 발표했다. 이번 전략은 탄소중립을 환경정책의 영역에서 국가 산업·경제 정책으로 격상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탄소중립을 새로운 성장전략으로 제시하고, 철강·석유화학·시멘트 등 다배출 산업의 전환을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지원하며, 저탄소 제품의 시장 창출 필요성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정부의 투자위험 분담과 전환금융을 공식화하고 지역경제 및 사회적 수용성까지 고려한 점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지난 20여년간 정부가 발표한 거창한 산업·에너지 정책이 용두사미로 끝난 사례가 셀 수 없이 많다. 2004년을 신재생에너지 원년으로 선포하기도 했고, 2010년에는 5년 안에 세계 5대 신재생에너지 강국으로 도약하겠다고 약속했다. 2010년에는 2030년 내로 국가단위 스마트그리드 구축도 약속했다. 하지만 2026년이 다 지나가는 현재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이고 스마트그리드는 시범사업 이후 뚜렷한 진전이 없다. 수소정책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정부의 마스터플랜부터 문재인 정부의 수소경제 로드맵, 윤석열 정부의 청정수소 육성정책까지 정권을 넘어 정책이 이어졌지만, 수소차·충전소 보급을 비롯한 상당수 지표는 목표에 크게 못 미쳤다. 정부의 재정 투입과 기술개발, 생산 목표만으로는 시장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이번 K-GX가 내건 목표도 화려하다. 2035년 전기차 세계 3위, 소형모듈원전(SMR) 세계시장 점유율 40% 등을 내걸었다. 재생에너지 설비용량도 2030년까지 100GW를 조기 달성하고, 2035년에는 발전 비중을 30% 이상으로 높이겠다고 한다. 목표를 높게 잡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송전망 확충과 계통혼잡 해소, 전력 수급의 유연성 확보 없이 설비용량만 늘리는 것은 실현 가능성을 장담하기 어렵다.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목표에 앞서 이를 실현할 제도부터 제시해야 한다.

‘탈탄소 제품 신시장 창출’ 긍정적

그런 점에서 이번 전략에는 과거와 다른 진전이 있다. 바로 ‘탈탄소 제품 신시장 창출’이다. 녹색·저탄소 제품의 인증과 표준화를 확대하고 공공구매로 초기 수요를 만들어 기업의 생산과 투자를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저탄소 철강을 사용한 자동차 구매자에게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방안은 주목할 만하다. 철강기업에 저탄소 설비를 설치하라고 압박하는 대신, 그 설비에서 생산한 철강이 팔리도록 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다.

철강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 탄소를 줄여도 제품의 품질과 성능에서 기존 제품과 차이가 없다. 그러니 소비자가 비싼 값을 지불할 이유가 없다. 저탄소 철강을 사용한 자동차 구매를 지원하면 자동차회사의 구매가 늘고, 철강회사는 안정적인 수요를 바탕으로 설비투자를 결정할 수 있다. 수요가 기술과 투자를 끌어내는 ‘시장 견인’(Market Pull)이 ‘기술 추진’(Technology Push)을 유도하는 구조다. 이것이 탄소중립 산업정책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공공조달 영역에서 저탄소 제품 구매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조달청이 직접 구매하는 품목만 확대해서는 시장 규모가 턱없이 부족하다. 철강 같은 장치산업은 설비를 가동할 최소한의 생산 물량이 필요하므로 공공기관이 발주하거나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건설공사까지 저탄소 제품 사용 기준을 넓혀야 한다. 그래야 기업이 장기 구매계약을 믿고 투자할 수 있다. 정부가 생산비를 끝없이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초기 구매를 뒷받침해 시장이 자립하도록 만드는 정책이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신시장이 전력시장과 배출권거래제로 연결돼야 한다는 점이다. 저탄소 철강을 생산하려면 경쟁력 있는 무탄소 전력이 안정적으로 공급돼야 한다. 수소환원제철에도 막대한 청정전력과 수소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번 전략은 재생에너지 보급 목표만 강조할 뿐 전력의 가격과 거래를 어떻게 혁신할 것인지는 답하지 않는다. 분산에너지 특구의 전력 직거래도 제약이 많고, 지역별 전기요금 역시 원가 신호와 정책적 우대가 뒤섞일 우려가 있다. 전기를 하나의 행정요금으로 다루는 체제에서 기업이 어떻게 장기 투자비를 계산할 수 있겠는가. 발전비용과 시간대별 수급, 송배전망의 혼잡비용이 가격에 반영돼야 한다. 그래야 재생에너지와 저장장치, 수요반응 투자도 경제성을 확보한다. 정부는 가격을 대신 결정하는 주체에서 공정한 거래 규칙을 정하고 감독하는 주체로 역할을 바꿔야 한다.

전력시장·배출권거래제와 보조를

배출권거래제도 걱정이다. 정부는 시장안정화 예비분을 활용해 배출권 공급을 조절하고 가격을 안정시키겠다고 한다. 급격한 가격 변동을 막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정부가 공급량을 조절해 배출권 가격을 올린다고 저탄소 제품이 팔리는 것은 아니다. 배출권 가격과 저탄소 제품 시장 창출이 보조를 맞추면서 전진해야 한다.

저탄소 제품 구매에 인센티브를 주면 수요가 생기고 생산량이 늘면서 기업의 감축설비 투자가 촉진된다. 실제 배출량이 줄면 기업이 필요로 하는 배출권도 줄어든다. 할당량과 배출 실적에 따라 잉여배출권이 시장에 나올 수도 있다. 이렇게 감축비용과 수요, 배출권 가격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야 시장이 제 역할을 한다. 정부의 역할은 특정 가격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감축이 기업의 수익과 연결되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데 있다.

K-GX 전략이 과거와 다른 것은 제품을 사줄 시장의 중요성을 일부나마 인식했다는 점이다. 우선 방향은 제시했으니 실행계획을 수립해 전력가격과 배출권가격, 저탄소 제품가격이 서로 연결되는 시장이 만들어지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발표에서 언급된 1000조원 규모의 투자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뿐이다. 또 하나의 화려한 선언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정부는 스스로 너무 많은 걸 짊어지려는 관성에서 벗어나 핵심 참여자들의 수요와 공급이 모이는 판을 만들어야 한다. K-GX의 성패는 전력시장과 배출권시장, 저탄소 제품시장을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김경식 ESG네트워크 대표

김경식 ESG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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