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 취약 가건물 다닥다닥…“소화기 있어도 무용지물”

99가구 소실·이재민 127명 발생
소방 “30일 화재 원인 정밀 감식”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직후인 28일 오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밤샘 진화 작업으로 마을 진입로에는 흥건하게 물이 고여 있었다.
매캐한 탄내에 흰 방진마스크를 나눠 쓴 이재민들은 둥글게 모여 앉아 “속수무책으로 다 타버렸다” “짐도 못 뺐다”며 탄식했다. 이곳에서 밤을 지샜다는 70대 이모씨는 메고 있던 가방을 가리키며 “이거 하나만 챙겨 나왔다”고 말했다. 이어 “소방차도 들어오기 힘든 길인데 (마을에 비치된) 소화기가 무슨 소용이겠냐”고 토로했다.
이번 화재는 지난 27일 오후 3시49분쯤 구룡마을 2지구에서 시작돼 1·3·7지구와 구룡산 일부까지 번졌다. 정부는 대응 2단계를 발령해 진화에 나섰지만 강풍과 용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화재는 발생 약 13시간 만인 이날 오전 4시39분쯤 완진됐다. 소방당국은 이번 화재로 이재민 91가구 127명이 발생하고 가건물 약 99가구와 약 2만8000㎡에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강남구청은 이재민들이 7일간 머물 수 있도록 개포중학교와 구룡중학교, 인근 호텔에 임시숙소를 마련했다. 개포중학교에 모인 이재민 40여명은 향후 거처와 지원에 대한 걱정을 털어놨다.
A씨는 “지난 1월 화재 때도 호텔에 머문 지 일주일쯤 됐을 때 쫓겨났다”며 “이번에도 쫓겨날까 봐 불안해서 호텔로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B씨는 “앞으로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수 있는지 안내받은 것이 없고, 일터가 인근이라 멀리 가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소방은 경찰, 전기안전공사와 함께 이날 오전 1차 합동감식을 시작했다. 소방 관계자는 “1차 합동감식에서 발화 지점을 7가구 안팎으로 좁혔다”며 “정확한 화재 원인 규명을 위한 2차 합동감식은 30일에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으로 불리는 구룡마을에서는 2011년부터 총 36차례 화재가 발생했다. 2014년 11월 화재로 주민 1명이 숨졌고, 2023년 1월 화재 때는 약 60가구가 소실됐다.
구룡마을의 가건물은 ‘떡솜’으로 불리는 단열재와 비닐·합판·스티로폼 등 불이 붙기 쉬운 자재로 지어져 있다. 여기에 노후 전기 설비와 LPG통, 전선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환경도 화재 위험 요인이다.
소방당국이 이번 화재 진압에 난항을 겪은 이유로 용수 부족을 거론하며 구룡마을 안팎의 소화 시설이 부족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됐다. 소방 측은 사용 가능한 상수도 소화전이 구룡마을 내부와 대로변에 각각 4개와 9개가 있으며, 구룡마을 내부에 상수도 배관도 설치돼있다고 밝혔다. 화재가 급격히 대규모로 확산하는 상황에서 각 소화전들의 동시 대응 역량에 한계가 있었고, 소방차 진입로도 협소해 외부 용수 공급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송규 한국안전전문가협회 회장은 “무허가촌, 재개발 지역, 달동네 같은 화재 취약 지역 대책을 획일적으로 세우지 말고 개별 위험 요인에 맞춰 안전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하주언·박민규 기자 e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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