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침스틸러] AI 시대에도 변함없이 ‘핏물’ 뺀다…쫓기고 쫓는 자 달랜 ‘설렁탕 한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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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도 단서도 없는 살인 사건.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모두의 속을 든든히 채워주는 설렁탕.
이 사장은 "김치 국물을 부어서 먹는 걸 가장 좋아한다"며 자신만의 설렁탕 먹는 법을 소개했다.
오늘도 제자리에서 묵묵히 사명을 감당한 당신! 설렁탕 한그릇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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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반 두 형사 추위에 떨며 잠복
빵·우유 허기 속 떠올린 뜨끈한 맛
1941년 문 연 3대째 노포 ‘옥천옥’
흐르는 물에 소뼈 담가 핏물 빼고
육수에 과일 껍질 넣어 잡내 제거
자극 없고 소화 잘돼 보양식 인기
직접 담근 배추김치·깍두기 별미

“판단은 판사가 하고, 변명은 변호사가 하고, 형사는 무조건 잡는 거야!”
용의자도 단서도 없는 살인 사건. 온몸이 덜덜 떨리는 추운 겨울 아스팔트 위에서 강력반 형사들은 범인을 쫓아 뛰고 또 뛰었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년, 이명세 감독)는 범인을 잡겠다는 광기 어린 집념 하나로 거리를 질주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추격의 길은 험난하다. 주인공 우영구(박중훈 분)와 김동석(장동건 분) 두 형사는 범인의 정체를 파헤치고자 가해자 주변 인물을 집요하게 탐문한다. 용의자의 집 앞을 무작정 지키며 압박 수위를 높여가지만 수사는 번번이 벽에 부딪힌다.
좁은 승용차 안에서 며칠을 쪽잠으로 버티고 마른 빵과 우유로 겨우 허기를 때우던 나날들. 수개월간 위장 수사도 마다하지 않으며 포위망을 좁혀간다. 밤낮 없는 잠복근무 속에서 이들이 간절하게 원하는 음식이 있다. 바로 설렁탕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설렁탕에 고춧가루 확 풀고, 파도 듬뿍 넣어야지. 밥 한공기 말아서 한숟갈 푹∼ 그 위에 김장김치 쭉쭉 찢어 얹으면. 이야, 죽인다!”
영화 속 두 형사는 설렁탕 한그릇을 앞에 두고 먹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푹 곤 국물에 밥과 소면, 고기를 떠서 잘 익은 김치 한점을 얹어 한입 가득 먹는다. 생각만으로도 만면에 미소가 번진다. 고된 잠복 끝에 마주할 뜨끈한 설렁탕 한그릇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는 것이다.
설렁탕은 한국 형사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음식이다. 치열한 현장에서 끼니를 해결해줄 뿐 아니라 취조실에서는 범인의 닫힌 마음과 경계심을 무너뜨린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모두의 속을 든든히 채워주는 설렁탕. 설렁탕의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조선시대 임금이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낸 뒤 소를 푹 고아 백성들과 나눠 먹은 ‘선농탕(先農湯)’에서 비롯됐다는 게 유력하다.

이처럼 오랜 세월 한국인의 삶과 함께해온 설렁탕의 옛 맛을 찾아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옥천옥’을 찾았다. 1941년 영업을 시작해 3대째 명맥을 잇는 노포다. 사장 이규호씨(56)는 “할머니가 한국전쟁 전 왕십리에서 처음 장사를 시작하셨다. 당시 1904년 문을 열어 이미 유명했던 이문설렁탕의 인기를 보고 우리도 문을 열지 않았을까 싶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경성(서울의 옛 지명)에는 설렁탕집이 100여곳에 이를 정도로 성행했다. 당대 유행하던 식당 상호인 ‘옥(屋)’ 자에 충북 옥천이 고향이라 ‘옥천댁’이라 불리던 창업주 할머니의 별칭이 더해져 ‘옥천옥’이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인근 마장동 축산물시장에서 신선한 한우 부산물을 구하기 쉬웠던 환경도 유리했다.

80여년의 세월을 버텨낸 옥천옥의 역사에는 한국 현대사의 파고가 짙게 배어 있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을 떠나야 했고, 휴전 후 돌아온 뒤에도 살림살이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다른 주인장과 보름씩 번갈아가며 가게를 맡는 식으로 근근이 운영을 이어나갔다.
‘이젠 자리를 잡았구나’ 싶지만 ‘악재’는 부지불식간 터진다. 광우병 파동과 코로나19로 손님의 발길이 뚝 끊길 때에는 인고의 시간을 건너야 했다.

모든 것이 급변하는 인공지능(AI) 시대! 그래도 1941년부터 이어온 조리 방식은 변함이 없다. 하루 정도 흐르는 물에 소뼈를 담가 핏물을 빼낸다. 이튿날부터 푹 고아 깊은 육수를 낸다. 국물이 팔팔 끓어오르면 머릿고기를 넣어 함께 삶는다. 여기에 오렌지 껍질을 반조각 넣어 특유의 잡내를 없앤다.
깊은 역사만큼 단골의 애정도 남다르다. 매일 오다시피 하는 손님도 있다. 인근 풍물시장에서 일하는 단골손님은 “어제도 오고 그저께도 왔다”며 웃었다. 자극적이지 않고 소화가 잘되는 순한 국물 덕에 몸이 아플 때면 포장해가는 손님도 많단다.
이제 그 맛을 직접 확인해볼 차례. 영화 속 형사들이 꿈꾸던 것처럼 설렁탕에 고춧가루를 확 풀고 팍팍 저어본다. 소면을 건져 후루룩 맛보고 밥 한공기를 말아 뜨끈한 국물부터 들이켠다. 담백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에 속이 따뜻해진다. 마장동 한우를 익힌 고기도 맛본다. 양지와 우설, 머릿고기는 물론 껍질까지 다양한 부위가 저마다 쫄깃하고 부드러운 식감을 자랑한다. 껍질은 세심하게 손질해 특유의 질긴 느낌을 줄이고 쫀득함만 남겼다.

탕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단연 김치. 직접 담근 배추김치와 깍두기가 만들어낸 김치 국물은 꼭 필요한 존재다. 이 사장은 “김치 국물을 부어서 먹는 걸 가장 좋아한다”며 자신만의 설렁탕 먹는 법을 소개했다.
범인을 쫓는 형사의 질주와 가마솥에서 푹 곤 진국에는 모두 ‘집념’이란 것이 녹아 있다. 오늘도 제자리에서 묵묵히 사명을 감당한 당신! 설렁탕 한그릇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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