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덕이’ 울타리 너머로 [조형근의 낮은 목소리]

한겨레 2026. 10. 27.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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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산의 부캉이가 무사히 먼바다로 돌아갔을까? 한마리 흑상어의 근황이 수천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말라뮤트에 대해 찾아보니 '한 사람만 따르는 개가 아니다'라는 설명이 있다.

덕이가 주인 부부의 개인 것처럼, 우리 각자도 한가족에 속한다.

덕이는 한가족의 개이면서 이웃의 아침을 바꿔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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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조형근 | 동네 사회학자

오늘은 부산의 부캉이가 무사히 먼바다로 돌아갔을까? 한마리 흑상어의 근황이 수천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용인의 판다 푸바오가 중국으로 떠날 때는 우는 사람도 많았다. 사람도 힘든 세상인데 배부른 이들의 사치는 아닐까? 인간은 동물을 잡아먹고 돌보며 서로 공진화해왔다. 동물을 향한 연민과 사람을 향한 마음이 같지는 않겠지만 별개도 아닐 것이다.

3년 전 집냥이 코루가 자기 별로 돌아가고서 동물과의 인연은 다시 없으리라 믿었다. 지난여름 새 인연이 생겼다. 이웃집 개와 가까워진 것이다. 평일 아침에는 30분, 주말에는 한시간 남짓 매일 함께 놀고 산책한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개와 동네 한 바퀴를 돌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덕분에 하루의 시작이 즐겁다.

담 없는 우리 집이 발단이 됐다. 지나는 이들의 시선에 늘 열려 있으니, 텃밭을 가꾸다 행인과 말을 섞을 때도 있다. 사람만큼 개도 오가는데 유난히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 아침마다 연세 지긋한 남자분과 함께 다니는 알래스칸 맬러뮤트(말라뮤트)였다. 몸집이 우람한 대형견인데 표정은 더없이 순둥순둥했다.

지난여름 어느 날, 처가 견주와 말을 나누게 됐다. 아이 이름은 덕이, 여덟살 암컷이라고. 알고 보니 지척인 이웃집이었다. 마침 옆집 푸들 주려고 찐고구마 말려놓은 것이 있어 잘라주니 펄쩍펄쩍 뛰며 좋아라 먹었다. 그렇게 우리 마당에 들어온 덕이는 간식 찾기 놀이, 공놀이를 즐기게 됐고, 이윽고 매일 함께 산책하는 사이가 됐다. 만화 ‘달려라 하니’의 주제가를 따라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덕이’ 하고 우리가 노래하면, 덕이는 알래스카의 설원을 달리던 조상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힘차게 발을 내디디며 달리는 것이다.

몇달 사이 덕이의 특징도 조금씩 알게 됐다. 주인 부부에게만큼이나 우리 가족에게도 한없이 다정하지만, 길에서 스치는 행인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무심하다. 대형견이라 낯선 이가 위협감을 느끼지 않도록 진화한 것일까? 대신 먼저 다가와 반기고 쓰다듬어 주는 이에게는 머리를 부비고 꼬리를 흔들며 엉겨 붙는다. 말라뮤트에 대해 찾아보니 ‘한 사람만 따르는 개가 아니다’라는 설명이 있다. 덕이가 딱 그렇다. 순하고 다정하지만, 가고 싶은 길이 있으면 버티고 서서 고집을 부리는 독립적인 면도 설명대로다. 끝없는 눈밭 위, 스스로 길을 찾고 얼음 상태를 판단해야 했던 환경에서 길러진 기질이라고 한다.

말라뮤트라는 이름은 이누이트족의 한 갈래인 알래스카 북서부 원주민 말레뮤트족에서 왔다. 매우 오래전에 형성된 기저 견종 중 하나란다. 북극의 맹추위 아래서 썰매를 끌며 사람과 짐, 사냥한 동물을 날랐다. 대개 한가족에 속했지만, 개가 찾아낸 바다표범 숨구멍은 나눔의 관습에 따라 이웃과 공유됐고, 개가 끌고 온 고기는 이웃의 식탁으로 흘러갔다. 한가족에 속했으되 마을 전체의 겨울을 떠받쳤다. 말라뮤트는 재산이나 소유물이 아니라 이름을 가진 동반자였고, 공동체와 묶인 일원이었다.

덕이와 우리 가족의 관계를 생각하다 보면 가족과 가족 너머 세상 사이의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미국에서는 1964년 연방 민권법 제정으로 인종, 피부색, 종교, 성별 등에 따른 차별이 금지됐다. 물론 금지는 첫걸음일 뿐 갈 길이 멀었다. 연방 교육국이 저명한 사회학자 제임스 콜먼에게 의뢰해 62만명이 넘는 학생을 조사한 결과가 보고서 ‘교육 기회의 평등’(1966)으로 나왔다. 조사 당시 미국 학교는 대부분 인종별로 나뉘어 있었다. 학교 시설과 예산의 차이는 흑백 학생의 성적 격차를 거의 설명하지 못했다. 격차는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1학년 때 이미 뚜렷했고, 학년이 올라가도 좁혀지지 않았다. 성적을 결정한 가장 큰 변수는 가족 배경과 계층이었다.

하버드대의 사회학자 크리스토퍼 젱크스와 동료들은 연구서 ‘불평등’(1972)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학교 교육의 질을 평등하게 만들어도 성인이 된 뒤의 소득 불평등은 거의 줄지 않았다. 소득 격차의 상당 부분은 가족 배경과 운이 결정했다. 교육을 통한 기회 평등의 달성은 난망했다. 연구팀은 가족 배경과 운의 장난질을 덜어줄 보험 장치를 만들고, 직업적 성공과 생활 수준 사이의 고리를 끊는 소득 공유 제도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대를 잇는 ‘세습’의 게임 규칙 자체를 바꾸자는 말이다. 알다시피 미국은 이 길로 가지 않았고, 결국 트럼프식 증오의 시대가 열렸다.

말라뮤트가 살던 북극의 마을은 그 길을 걸었다. 사냥에는 운이 크게 작용하는 법, 오늘 바다표범을 잡은 집이 내일은 허탕을 칠 수 있다. 운수 좋은 날의 몫을 이웃과 나누면 불운한 날에도 굶지 않는다. 개는 한집에 속해도, 개가 만든 수확은 마을이라는 안전망 속으로 들어간다. 나눔의 관습은 함께 살기 위한 보험이었다. 나눌 것이 수천, 수만 배 많아진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한국은행의 보고서 ‘입시경쟁 과열로 인한 사회문제와 대응방안’(2024)에 따르면 소득 상위 20% 가구와 나머지 가구 자녀의 상위권대 진학률 격차 중 75%가 학생의 잠재력이 아니라 부모 경제력의 효과로 추정된다. 서울과 비서울 학생의 서울대 진학률 격차는 부모의 경제력과 사교육 환경 등을 포괄하는 거주 지역 효과가 92%를 차지한다. 격차는 교문 안이 아니라 교문 밖, 가족이라는 단위에서 먼저 만들어지고 대물림된다. 불평등이 문제 될 때마다 수시냐, 정시냐 입시제도를 놓고 온 나라가 몸살을 앓는다. 가족 사이 격차를 줄이지 않으면 헛수고일 뿐이다.

교육의 가치를 깎아내리려 함이 아니다. 학교를 탓하기 전에 근본 원인을 보자는 말이다.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욕망도 부정하지 않는다. 덕이가 주인 부부의 개인 것처럼, 우리 각자도 한가족에 속한다. 다만 가족의 울타리가 높아질수록 한가족의 합리적 선택이 희망 없는 신분사회로 귀결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덕이는 한가족의 개이면서 이웃의 아침을 바꿔 놓았다. 한집에 속하는 북극의 썰매견도 마을의 겨울을 버티게 했다. ‘내 가족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회’라고 부르는 것에는 과연 무엇이 남을까. 다정하고 강건한 덕이와 함께 달리며 오늘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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