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성이론 산실 ‘아인슈타인 하우스’…벽에 걸린 논문의 역설

한겨레 2026. 10. 26.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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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의 상대성이론을 뒤집어 이해했다.

나는 오히려 민코프스키 이론에서 존재론적 혁명을 읽었고, 이를 통해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뒤집으면서 상대성이론을 비로소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내 지도교수도 아인슈타인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 일찍이 일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썼지만, 자기 지도교수의 직접적 지시나 간섭을 받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독일의 울름이나 어려서 공부한 뮌헨, 그가 다녔던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 상대성이론의 산실인 베른의 아인슈타인 하우스는 상상만 했지 내 나이 80에 이르도록 가볼 기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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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장회익 경계를 넘어] 16화 아인슈타인을 찾아서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나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의 상대성이론을 뒤집어 이해했다. 역대 물리학자들이 범한 한 가지 과오가 있다면, 지나치게 유클리드 기하학에 경도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존재론적 성찰을 빠트렸다는 점이다. 이들은 수학적 구조 위에 ‘공리’를 입히고, 여기서 다양한 결과들을 이끌어 내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도 오랫동안 그랬고, 이것을 바른길로 여겼다. 그러다가 서서히 여기서 벗어나 뉴턴의 고전역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그리고 오늘의 양자역학을 존재론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비로소 참 이해의 길로 들어섰다는 확신을 굳히고 있다.

특히 양자역학의 이해를 위해 이 점이 매우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상대성이론에 대해서만 조금 이야기하려 한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도 상세히 썼지만, 1905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논문은 존재론적으로 볼 때, 억지에 가까운 형태로 돼 있다. 결국 그의 스승이었던 민코프스키에 의해 4차원 시공간이라는 선명한 해석이 주어졌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4차원 존재론을 그저 수학적 편의로만 보고 진정한 존재론적 혁명으로 여기지 않는 듯하다. 나는 오히려 민코프스키 이론에서 존재론적 혁명을 읽었고, 이를 통해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뒤집으면서 상대성이론을 비로소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뒤집어 이해했다는 것은 그의 논문을 폐기했다거나 오류를 발견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 논문은 물리적으로 맞고 논리적으로도 흠이 없다. 오히려 내가 감탄한 것은 아인슈타인이 올바른 존재론적 관점을 취하지도 않고 어떻게 이 엄청난 결과에 도달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천재로 보고 또 존경한다. 단순히 물리학적 업적 때문만은 아니다. 일찍이 상대성이론에 끌리면서 그리고 그의 전기를 번역하면서 학문적으로나 사상 전반에 걸쳐 깊이 공감했고, 지금도 그 점은 변함없다. 또 역추적을 통해 알게 된 일이지만, 그는 학문 계보상 내 직계 스승 계열에 놓인다. 아인슈타인의 수제자라 할만한 사람이 196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유진 위그너(1902-1995)인데, 그의 지도로 배출된 출중한 물리학자 가운데 한 분이 내 박사학위 지도교수였던 조지프 캘러웨이(1931-1994)이다. 그러니까 내 지도교수는 학문 계보로 볼 때 아인슈타인의 손자뻘 되는 사람이고, 이렇게 보면 나는 아인슈타인의 학문적 증손자에 해당한다. 요즘 이런 형식상의 계보를 거론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학문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놓아기르는’ 학풍이다.

내 지도교수는 학위 과정에서 거의 간섭한 일이 없었고, 그도 그렇게 교육받았다. 위그너는 오히려 아인슈타인을 졸라 특정 과목 강의를 개설토록 설득하며 배운 사람이다. 내 지도교수도 아인슈타인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 일찍이 일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썼지만, 자기 지도교수의 직접적 지시나 간섭을 받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위그너 교수까지는 만났지만, 아인슈타인은 직접 접할 수가 없었다. 대안으로 생각해 낸 것이 아인슈타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순례 여행이었다.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 고등학술연구소에 있는 아인슈타인 연구실과 그가 살던 집은 살펴본 일이 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독일의 울름이나 어려서 공부한 뮌헨, 그가 다녔던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 상대성이론의 산실인 베른의 아인슈타인 하우스는 상상만 했지 내 나이 80에 이르도록 가볼 기회가 없었다.

2017년 늦은 봄, 함께 공부하는 녹색아카데미 동료들과 유럽으로 아인슈타인 순례 여행을 떠났다. 녹색아카데미 실무를 맡고 있는 최우석·황승미 부부를 비롯해 김재영, 이중원 등 주로 녹색아카데미 공부 모임에 참여하는 10여명이 함께했다.

우리 일행은 먼저 아인슈타인이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다닌 독일 뮌헨으로 향했다. 그가 3년간 다닌 가톨릭 초등학교는 현존하지 않았지만, 우연히 우리 일행이 머무는 숙소 근처에서 그가 다녔다고 알려진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이란 이름의 학교를 찾아냈다. 교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봤으나 좀 의아했다. 아인슈타인을 상징하는 조형물은커녕, 그가 다닌 학교라는 표지판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자퇴하고 나가 감정이 좋지 않았을 수 있지만, 그래도 6년이나 다녔던 학교가 아닌가. 뒤늦게 안 일이지만, 이것은 큰 착오였다. 우리 일행이 본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은 이름은 같지만 전혀 다른 학교였다. 아인슈타인이 다녔던 학교는 2차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파괴됐다가 재건됐고, 1965년 아예 알베르트-아인슈타인 김나지움으로 이름을 바꿔 현재도 운영되고 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우리는 ‘속 좁은 독일인들’이라고 성토만 한 것이다.

우리는 며칠 지나 기차를 타고 아인슈타인 출생지인 소도시 울름을 방문했다. 아인슈타인이 태어난 집은 없었지만, 그 자리에 우람한 조형물과 함께 아인슈타인 출생지라는 설명문이 붙어있었다. 그곳 명물인 생선 요리를 먹고 도시를 돌던 중 아인슈타인 조형물이 있는 분수대와 아인슈타인 회관이라는 대형 건물도 봤다. 하지만 기차 안에서 만난 한 여교사는 여기를 찾아준 ‘동방 박사들’(우리 일행)의 말을 듣고서야 거기가 아인슈타인의 탄생지인 줄 알았다고 했다.

다음 날에는 뮌헨에서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스위스 취리히로 갔다. 아인슈타인이 다녔던 스위스 연방공과대학이 높은 언덕에 취리히대학교와 맞붙어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에는 츠바이슈타인(두 개의 돌)이라는 카페가 있었는데, 아인슈타인(한 개의 돌)이란 이름을 패러디한 것이다. 학교 안을 둘러보다가 193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에르빈 슈뢰딩거(1887~1961)가 ‘슈뢰딩거 방정식’을 처음 제안했던 유서 깊은 세미나실과 마주쳐, 여기가 진정 학문의 고장임을 실감했다.

우리 일행이 꼭 가고자 했던 최종 목적지는 베른에 있는 ‘아인슈타인 하우스’였다. 상대성이론의 산실이기도 한 그곳은 2층에 있는 작은 아파트다. 당시 아인슈타인 부부가 살던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우리는 외곽에 있는 아인슈타인 기념박물관도 방문했다. 이 두 곳에는 젊었을 때 아인슈타인이 활동하던 사진과 논문 사본들이 전시돼 있었다.

20대 청년 아인슈타인이 주변 강가를 걸으면서 사색하고, 저녁이면 친구들과 자기 아파트에 모여 맥주를 마시며 열띠게 토론했을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시절 여기 모여 웃고 떠들던 아인슈타인과 그 친구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올림피아 아카데미’라고 했다. 그로부터 백 년이 훨씬 지나 이곳을 찾은 우리 일행도 자칭 ‘녹색 아카데미’라 부르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20대의 발랄한 젊은이였지만, 그의 증손자뻘 되는 나는 80살에 이른 노인이고 함께 온 ‘젊은이들’도 대부분 40을 넘긴 나이였다. 새까만 후예들이 찾아와 스승의 ‘젊음’을 배우고 가는 기묘한 역설의 자리이기도 했다.

우리는 아인슈타인 하우스 벽에 걸린 세 쪽이 다 채워지지 않는 짧은 논문 하나를 보면서 또 하나의 짙은 역설을 실감했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9월에 발표된 ‘질량-에너지 등가성’( E= mc 2)에 관한 이 논문에 대해,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생각은 즐겁고 매력적이야. 그러나 신이 이것을 비웃지 않았는지, 그리고 나를 속이지는 않았는지 내가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리고 40년이 지난 1945년, 신이 그를 속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즐겁고 매력적인 생각’을 담은 바로 그 논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가장 ‘비통한’(원자폭탄 투하) 형태로 입증되었다고 하는 역설과 함께.

장회익 | 1938년 경북 예천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30여년 교수로 일하다 퇴임하고, 지금은 충남 아산에서 살고 있다. 자유로운 사색을 통해 통합적 학문의 모습을 그려보는 ‘소요거사’로 지낸다. 물리학 말고도 과학이론의 구조와 성격, 생명의 이해, 동서 학문의 비교 연구, 온전한 앎의 성격 등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는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공부도둑’(‘공부 이야기’),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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