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의 가을’ 방송금지 등 잇단 시련에도 재기 도전… 아픔 어루만진 ‘가객’ 심수봉[장재선의 한국문화 ‘논란의 초상들’]

장재선 전임기자 2026. 10. 26.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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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의 가을'이란 노래가 있다.

이 노래에 대해 심수봉은 현충원의 무명용사비를 본 후 만들었다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의 넋을 기리고 후대에 전하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해왔다.

심수봉의 역정을 들여다보면, 그의 노래처럼 비애 속에 희망을 찾아가는 의지가 뚜렷하다.

대표곡 중 하나인 '백만송이 장미'는 러시아 노래를 번안한 것으로, 심수봉이 가사를 원곡과 다르게 새로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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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재선의 한국문화 ‘논란의 초상들’ - (25) 심수봉 ‘그때 그사람’ <하>
10·26 목격 뒤 정신적 충격·불운… 심령학자에 빠지기도
재기하려 낸 음반은 영부인 이름 나온다는 이유로 금지돼
1984년 활동 재개, ‘남자는 배’ 히트… 1년뒤 또 검열 ‘시련’
총격 트라우마로 한동안 기타 못잡았지만 최근 다시 연주
곡·목소리에 ‘슬픔의 어혈’… 트로트 발라드 개척 선구자
심수봉이 2021년 KBS 2TV ‘피어나라, 대한민국 - 심수봉’ 콘서트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지친 국민을 위로하기 위해 그가 26년 만에 선보인 TV 콘서트로, 한국인의 슬픔과 아픔을 어루만져온 심수봉 노래의 힘이 빛을 발했다는 평을 들었다. 방송화면 캡처

‘순자의 가을’이란 노래가 있다. 심수봉이 1980년 6월 발매한 3집 음반의 대표곡이다. 그해 11월 개봉한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의 주제가였는데, 영화보다 먼저 노래가 나왔다. 심수봉은 비련의 주인공을 위한 직접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어 불렀다. ‘묻지 말아요/ 내 나이는 묻지 말아요/ 올가을엔 사랑할 거야….”

심수봉 3집은 10·26 사건으로 방송 출연이 금지됐던 그가 재기하기 위해 냈던 음반이었다. 노래를 발표하고 영화가 개봉할 무렵까지만 해도 그의 컴백은 성공적인 것으로 보였다. 대중이 큰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1년 3월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순자의 가을’은 방송이 금지됐다. 대통령 부인의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수봉은 다시 방송에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이 노래는 1983년에야 후배 가수 방미가 ‘올가을엔 사랑할거야’ 라는 제목으로 바꿔 불러 전파를 탈 수 있었다.

알려진 것처럼, 심수봉의 불운은 10·26 사건 때부터 끊이지 않았다. 10·26을 예지했다는 심령학자 한기석에게 빠진 것도 그중 하나이다. 사건 현장을 지켜본 충격으로 힘들어하는 그를 한기석에게 데려간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다. 딸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막상 딸이 유부남 심령학자에게 빠져 그의 가정에 생활비까지 대주려 하자 떼어놓으려 했고, 심수봉이 막무가내로 말을 듣지 않자 급기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기까지 했다. 남편 없이 홀로 키워 온 딸에 대한 지극한 모정이 시킨 과잉방어였다. 심수봉은 훗날 “망상성 정신장애라는 이유로 26일간 갇혀 있었는데, 퇴원하기 위해 갖은 수를 썼다”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가 입원했을 때, 가수 김수희가 면회를 와서 함께 외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미 8군 무대에 섰을 때 친구가 된 사이였다. 김수희는 “그때 심수봉을 보니 마치 절벽에서 떨어진 모습이었다”라고 나중에 되돌아봤다. 두 사람은 병원 근처 식당에 가서 해파리냉채를 먹었다. 심수봉은 그걸 늘 고마워했다. 김수희는 1996년 둘이 함께한 방송 쇼에서 “당시 무명 가수였기에 그걸 사 주고 여러 날 굶었다”라고 짐짓 생색을 내며 웃었다.

1981년 방송 금지됐던 노래 ‘순자의 가을’이 수록된 심수봉 3집.

이토록 피폐한 시절을 겪었으나, 심수봉은 1984년 방송 활동 금지가 풀리면서 재기했다. 이때 히트한 노래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한 여성 지인과 외항선원 남편의 애절한 이별 장면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곡이었다.

그런데 또 시련이 닥친다. 1985년에 발표한 노래 ‘무궁화’가 방송에 나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포기하면 안 된다’ ‘눈물 없인 피지 않는다’라는 가사가 반정부 시위를 조장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방송·공연 윤리 심의를 통과한 노래였음에도 당국의 검열 압박으로 방송국에서 금지곡처럼 다루며 내보내지 않았다.

그런 아픔이 있어서인지 심수봉은 이 곡을 지금도 무척 아낀다. 이달 9일 방영된 EBS ‘스페이스 공감’ 무대에서도 열창하며 이렇게 말했다.

“10·26 그날의 기억은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생과 사가 왔다 갔다 하던 그 시간…. 시간이 지나고 저는 그날을 떠올리면서 노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 노래가, 그리고 변치 않는 여러분의 사랑이 저를 구해줬습니다.”

그의 말처럼 이 노래의 가사는 의미심장하다. ‘이 몸이 죽어 한 줌의 흙이 되어도/하늘이여 보살펴 주소서 내 아이를 지켜 주소서/…/무궁화 꽃이 피는 건 이 말을 전하려 핀단다/참으면 이긴다 목숨을 버리면 얻는다/…//날지도 못하는 새야 무엇을 보았니/인간의 영화가 덧없다 머물지 말고 날아라/…/무궁화 꽃으로 피었네 이말을 전하려 피었네/ 포기하면 안 된다 눈물 없이 피지 않는다/의지다 하면 된다 나의 뒤를 부탁한다.’

이 노래에 대해 심수봉은 현충원의 무명용사비를 본 후 만들었다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의 넋을 기리고 후대에 전하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해왔다. 근년에는 10·26 사건의 기억과 연관 지어서 설명하기도 한다. 그 스스로 이 작품의 밑바탕에 흐른 정서를 다층적으로 생각하는 듯싶다. 가사를 보면, 무명용사가 유언처럼 남기는 말이기도 하고, 또한 불의의 총격에 숨진 고 박정희 대통령의 당부로도 읽힌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박 전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을 묘사하며, 총격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죽음 앞에서 의연했다고 전한 바 있다. 2024년 한 방송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제 노래도 좋아해 주시고 따뜻하게 잘 해주셨습니다. 이것저것 떠나서 귀하게 생각이 되는 분이셨습니다.”

노래 ‘무궁화’ 악보 일부.

심수봉 역시 잘 알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독재 정치를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에 대해 귀한 분이었다고 호감을 표현한 것은, 개인적 느낌을 전하며 그 시대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박정희는 이 나라 역사에서 800여 년 만에 등장한 무인정권의 지도자였다. 그랬기에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현대 사회에서 리더십의 한계가 뚜렷했다. 그런 모순을 안고 그는 단군 이래 최초로 서민으로 하여금 가난을 몰아낼 수 있다는 꿈을 갖게 했고, 실제로 그것을 이뤄냈다. 열심히 일하면 미래엔 더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었고, ‘하면 된다’라는 정신을 유산으로 남겼다. 심수봉의 ‘무궁화’는 그걸 은유의 언어로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가수 자신의 삶에 대한 불굴의 의지가 배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기어이 일어나 가객의 길을 걸어온 이의 다짐이 거기에 있다. 그것은 또한 동시대를 살아낸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품은 가사이기도 하다.

심수봉의 역정을 들여다보면, 그의 노래처럼 비애 속에 희망을 찾아가는 의지가 뚜렷하다. 두 번의 이혼을 겪고 세 번째 결혼한 남자와 새로 얻은 가정을 지켜 가기 위해 얼마나 애썼을 것인가. 그 과정 속에서 라디오 PD 출신 남편 김호경의 넉넉한 품이 큰 힘이 됐다고,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해왔다.

그는 세 남자에게서 각기 얻은 세 아이와의 관계가 평탄하지 않았음을 고백한 바 있다. 첫째 아들의 방황과 가출, 딸과의 8년 이별 등을 겪어야 했던 것. 그런 피저린 시간들을 지나서 화해를 하고 여느 가정처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고 있다고 한다. (그가 최근 후배 가수 김다현에게 실언을 했다가 바로 사과한 것은 이런 경험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어른이라고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실수를 했을 때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 진짜 어른이다.)

서울 강남에 있는 심수봉 자택은 ‘뮤직하우스’로 꾸며져 있다. 지하 연주실과 스튜디오, 카페를 갖추고 있다. 그의 집은 세속적 성공의 징표이기도 하지만, 그가 평생의 정체성을 뮤지션으로 삼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1996년 쇼를 함께한 심수봉(왼쪽)과 김수희. 두 사람은 10대 후반 미 8군 무대서 만난 후 희로애락을 나누는 친구로 지내왔다. 방송화면 캡처

그는 공연에서 드럼과 피아노를 능숙하게 다뤄 왔으나, 기타는 피해 왔다. 10·26 사건 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가 총격 장면을 본 기억이 괴롭혔던 탓이다. 최근 다시 기타를 잡았다고 하니, 그의 연주가 훨씬 풍성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작사, 작곡을 직접 해 온 그는 트로트 발라드라는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이다. 전통 가요의 범주에 머무르지 않고 재즈, 발라드, 팝 등 다양한 장르를 흡수해 자신의 색깔로 재해석해왔다.

대표곡 중 하나인 ‘백만송이 장미’는 러시아 노래를 번안한 것으로, 심수봉이 가사를 원곡과 다르게 새로 붙였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특유의 담백한 창법으로 되레 애절한 느낌을 극대화하며 가사의 시적 울림을 깊게 전한다.

그 목소리의 쓸쓸한 정서는 대중의 아픔과 슬픔을 위로하는 강력한 호소력으로 작용했다. 어린 시절에 겪은 가난과 고통이 그 쓸쓸함의 배경이라고, 그는 말한 바 있다.

현대사의 한복판에서 정치권력에 의해 갖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다시 일어서며, 그는 기어이 음악을 지켰다. 슬픔의 어혈이 배어 있는 그의 음악은 역설적으로 감미로움의 매혹과 함께 삶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해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단한 인생길을 품어 주고 안아 줄 음악으로 앞으로도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어요.”

역사적 사건의 작품화… 8·15 저격과 10·26 사태 현대사 왜곡 논란 되풀이

가수 심수봉의 삶을 흔든 1979년 10·26 사태의 저류엔 1974년 8·15 저격 사건이 있다. 경호 실패 책임으로 경호실장 박종규가 물러나고, 그 자리를 차지한 차지철의 권력 전횡으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울분이 쌓여 폭발했기 때문이다.

8·15 저격 사건을 다룬 영화 ‘암살자(들)’ 논란을 보며 안타까웠다. 사건 배경과 수사를 둘러싼 의혹을 파헤치고 싶었으면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어야 옳았다. 당시 폭압적이었던 중정과 거기 빌붙었던 검찰 세력을 비판하는 극영화를 만들고 싶었으면 그것에 충실했어야 했다. 다큐와 픽션을 섞어 최고 권력자가 암살의 배후일지 모른다는 걸 수차례 암시해 놓고도 제작진이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라고 한 것은 비겁했다.

‘암살자(들)’을 연출한 허진호는 인간의 감정 결을 섬세하게 어루만져 온 영화감독이다. 수년 전 몇 차례 허 감독과 대화를 나눴을 때 그의 따뜻한 휴머니티를 느꼈다. 20대에 군사정권 시대를 살았던 그에겐 당시 권력기관의 횡포에 고통을 당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그걸 표현하다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단계까지 갔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도 관람이 불편했던 이유이다.

물론 영화의 역사 인식에 이견이 있더라도 배우의 집 앞에 몰려가거나 제작진에게 사법처리를 을러대는 건 지나치다. 그런 점에서 박지만 EG 회장의 대응이 온당했다. 8·15 저격 사건에서 어머니를 잃었던 그는 영화를 비판하면서도 상영 중단 가처분이나 손해배상 같은 법적 대응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이번 논란을 계기로 젊은 세대가 자신의 아버지 박정희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다면 오히려 의미가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10·26 사건도 소설, 영화, 드라마로 꽤 다뤄졌다. 그것들은 김재규가 우발적으로 사건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계획적으로 거사를 행했는지에 대해 각기 다른 시각을 보인다.

김진명 같은 작가는 김재규 총격의 배경에 미국 CIA가 있다며 그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말 그대로 정황 증거일 뿐 사실로 인정받지 않은 것들이다.

그것들을 작품화시키며 허구의 상상력을 동원하는 것은 작가의 자유이다. 그런데 그 자유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실제 인물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러려면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명확하게 구분 지어져야 한다. 그것이 창작의 자유를 지키는 모듬살이의 도리이자 지혜다.

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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