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00년 전 바퀴 발명한 인류가 5,000년 후에 자전거 탄 이유는? [세상의 모든 이동]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여행작가 2026. 10. 26.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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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의 어느 고개를 자전거로 넘던 날을 기억한다.

그런데 인간이 몸을 바퀴에 싣고 제 힘으로 굴리기 시작한 것, 그러니까 자전거가 나타난 것은 겨우 200년 전이었다.

몸에 새겨진 그 기억은 어느 순간 나를 대신해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를 탄 사람은 길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길의 일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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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전거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의 고갯길을 자전거로 내려가는 길. 오르막에서 짐이던 자전거는 고개를 넘는 순간 가장 가벼운 이동수단이 된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의 어느 고개를 자전거로 넘던 날을 기억한다. 걷는 사람에게도 힘든 길이었지만 자전거를 끌고 오르는 사람에게는 더한 고행이었다. 안장에 앉은 채로는 도저히 페달이 돌아가지 않아, 결국 내려서 자전거를 끌며 한참을 걸었다. 바퀴 두 개 달린 그 가벼운 물건이 오르막에서는 왜 그렇게 무거운지. 끌고 가는 내내 생각했다. 차라리 메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그런데 기어이 고개의 정상에 올라 다시 안장에 앉자,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뒤집혔다. 당연한 일이지만 페달을 밟지 않아도 자전거가 저 혼자 굴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나를 짓누르던 무게가 이제는 나를 태우고 날다시피 나아가고 있었다.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풍경이 빠르게 흘렀다. 오를 때 흘린 땀이 내려갈 때의 환희로 정확히 돌아오는 그 거래가, 어이없을 만큼 정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페달에서 발을 뗀 채 한참을 굴러 내려가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가고 있다. 두 다리로도 아니고 네 다리로도 아니고, 바퀴로. 인간은 도대체 언제부터 바퀴 위에 올라앉게 된 걸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잠시 멈춘 자전거와 순례자들.

인간이 타기까지 5,000년 걸린 바퀴

여행에서 돌아와 셈을 해보니 묘한 시차가 있었다. 인류가 바퀴를 발명한 것은 5,500년 전이다. 그런데 인간이 몸을 바퀴에 싣고 제 힘으로 굴리기 시작한 것, 그러니까 자전거가 나타난 것은 겨우 200년 전이었다. 수레에서 자전거까지 5,00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바퀴를 굴릴 줄 알았던 인류가 왜 그토록 오래 그 위에 올라타지 않았을까. 실마리는 바퀴라는 물건의 태생에 있었다. 바퀴는 자연에 없다. 다리는 진화가 수억 년에 걸쳐 다듬어 낸 발명이지만, 바퀴를 달고 태어난 짐승은 지구에 한 마리도 없다. 살아 있는 몸은 빙글빙글 도는 축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핏줄과 신경이 이어진 채로는 무한히 회전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 바퀴는 인간이 자연 바깥에서 처음으로 가져온 이동의 형태였다. 낯선 물건이었으므로 인간은 오랫동안 바퀴를 저만치 두고 부렸다. 수레는 소가 끌었고 마차와 전차는 말이 끌었다. 인간은 바퀴 위에 짐을 얹고 제 몸도 얹었지만, 바퀴를 굴리는 힘만은 늘 짐승의 것이었다.

밀밭 사이를 지나는 자전거 순례자. 자전거의 속도에서는 풍경을 바라보는 대신 그 한가운데를 통과하게 된다. 

게다가 바퀴 넷 달린 수레는 가만히 서 있을 줄 알지만, 바퀴 두 개만으로는 가만히서 있지 못한다. 두 바퀴에 몸을 싣는다는 것은 넘어짐을 전제로 올라탄다는 뜻이다. 5,000년의 지각은 기술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굴러가는 것 위에서 제 몸의 균형을 스스로 잡아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늦은 것이다. 그리고 그 발상은 이상한 역설 위에 서 있다. 두 바퀴가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멈추는 순간 균형은 무너진다. 그러니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며 가는 게 아니라, 무너짐과 회복을 매 순간 되풀이하며 가는 일이다. 안정은 정지에서 오지 않는다. 움직임 속에서만 겨우 얻어진다. 자전거를 처음 배우던 날들이 꼭 그랬다. 수없이 기우뚱대고 넘어지다가 어느 순간 문득 달리게 된다.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는 일과 똑같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다가 어느 날 두 발로 선다. 종으로서의 인간이 360만 년 전에 두 발로 서는 법을 익혔다면, 개인으로서의 우리는 저마다 두 바퀴로 서는 법을 익힌다. 자전거를 배우는 일은, 한 사람의 생애에서 치르는 두 번째 직립이다.

순례길의 알베르게 앞에 세워둔 자전거.

지워지지 않는 두 바퀴의 기억

그렇게 몸으로 익힌 것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자전거는 한 번 배우면 평생 잊지 않는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수십 년 만에 안장에 올라도 다리는 페달을 기억하고 몸은 기울기를 기억한다. 머리로 배운 것은 머리에서 새어 나가지만, 몸으로 배운 것은 몸에 새겨져 남는다. 걷기가 그렇듯이. 균형은 지식이 아니라 기억이고, 그 기억이 보관되는 서고는 뇌가 아니라 온몸이다. 몸에 새겨진 그 기억은 어느 순간 나를 대신해 자전거를 탄다.

순례길의 긴 평지에 들어서면 그 일이 온다. 페달이 한 바퀴, 또 한 바퀴 같은 원을 그리는 동안, 어느 결에 다리가 알아서 도는 듯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더는 의식해서 밟지 않는데 바퀴는 굴러가고, 머릿속은 점점 비어 간다. 자동차 운전자는 계기판과 신호와 다른 차를 끊임없이 살펴야 하지만, 자전거를 탄 사람은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며 자기 안으로 가라앉는다. 몸은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마음은 도리어 고요해지는 그 상태를 나는 순례길에서 여러 번 만났다.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것은 선연하다. 몸을 써서 마음을 비우는, 흔치 않은 이동이다.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의 거리를 달리는 자전거. 자동차와 전차가 오가는 도심에서 두 바퀴는 여전히 가장 단순한 이동수단이다.

몸에 새겨진 그 기억 위에서 인간은 딱 알맞은 속도를 얻었다. 같은 거리를 가는 데 드는 힘이 걷기의 몇 분의 일이라, 공학자들은 인간이 만든 가장 효율적인 이동 기계로 자전거를 꼽는다. 그런데 효율보다 귀한 것은 속도의 질이다. 걷기는 더러 답답하고 자동차는 너무 빨라 풍경이 흘러가 버리는데, 자전거의 속도에서는 비로소 세상이 보인다. 길가에 핀 꽃이 보이고, 스쳐 가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고, 공기의 냄새가 바뀌는 것이 느껴진다. 자동차를 타면 풍경은 창밖의 그림이 되지만, 자전거를 타면 풍경 한가운데를 몸으로 통과하게 된다. 자전거를 탄 사람은 길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길의 일부가 된다.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 중 캠핑장에 설치한 텐트.

여성에게 자유를 선사한 자전거

단순해서 아름다운 이 기계는 세상도 바꾸었다. 자전거가 흔해지자 처음으로 보통 사람이 제 마을을 쉽게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전까지 평민은 평생 태어난 곳 둘레 몇 십 리 안에서 살다 죽었다. 특히 여성에게 그랬다. 코르셋과 긴 치마에 묶여 있던 여성들이 자전거를 타려고 옷을 바꿔 입었고, 보호자 없이 혼자 멀리 나가기 시작했다.

미국의 한 여성 참정권 운동가는 "자전거가 그 무엇보다 여성을 자유롭게 했다"고 말했다. 바퀴 두 개가 어떤 선언보다 먼저 여성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기계가 평등을 앞당긴 드문 사례다. 자동차에 밀려났던 자전거를 요즘 가장 부유한 도시들이 도로를 헐어 가며 다시 불러들이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자전거는 묘한 자리에 서 있다. 자전거보다 먼저 있었던 것은 인간의 두 다리와 짐승의 네 다리, 살아 있는 몸의 이동이고, 자전거 이후에 오는 것은 석탄과 기름으로 가는 기계의 이동이다. 자전거는 그 사이에 있다. 살아 있는 몸의 힘으로 가지만 엄연히 바퀴와 체인을 갖춘 기계인, 몸과 기계가 처음으로 한 몸이 된 물건. 어쩌면 인류가 제 몸 밖의 힘에 이동을 맡기기 직전, 마지막으로 자기 몸을 믿었던 발명인지도 모른다. 이다음부터 인간은 점점 더 큰 힘에 자신을 싣게 된다. 증기에, 내연기관에, 제트엔진에.

시리아의 오래된 도시 알레포에서 자전거를 함께 타고 가는 부자. 가장 단순한 두 바퀴는 여전히 일상의 이동수단이다. 

오르막의 고통, 내리막의 환희

산티아고 순례길의 숱한 고개를 넘은 뒤로 나는 오르막을 만날 때마다 조금 다른 마음이 된다. 무거운 페달을 밟는 동안 이미 내리막의 환희를 알고 있으니까. 오를 때의 고통과 내려갈 때의 기쁨이 한 몸이라는 것을, 자전거는 다리에 새겨주었다. 자전거에서 내리면 다시 두 발이다. 페달을 밟던 다리로 땅을 디디고 선다. 가장 단순한 기계 위에서 인간은 잠시 제 속도를 넘어섰다가, 이내 자기 두 발의 속도로 돌아온다. 그래도 한 번 바퀴의 속도를 맛본 다리는, 멈춰 선 자리에서도 어쩐지 자꾸 앞으로 구르고 싶어 한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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