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파도가 춤을 춘 건 아니어서…김애란, 폭풍을 오래 바라본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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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바다에는 오랫동안 폭풍이 불었습니다.
검은 현무암을 때리는 물결, 바람에 휘말려 형체를 잃는 파도.
이 바다에서 바람은 물감을 밀어내고 파도의 윤곽을 흩뜨리는 흔적으로 감지됩니다.
2011년 《middle of the life》로 첫 개인전을 연 뒤 《아~바다여!》, 《생의 한가운데》, 《Jeju Island》, 《바람의 흐름》, 《바람의 퍼즐》 등을 거치며 제주 자연과 삶의 감정을 화폭에 담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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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 〈Dancing Waves 2〉 등… 지우고 덧그리며 쌓아온 붓질의 시간

김애란의 바다에는 오랫동안 폭풍이 불었습니다.
검은 현무암을 때리는 물결, 바람에 휘말려 형체를 잃는 파도. 그 움직임을 붙잡으려 수없이 붓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다 익숙한 바다에서 낯선 리듬을 발견합니다. 무너진 물결이 다시 솟아오르고, 서로 뒤엉킨 파도가 춤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주 서양화가 김애란이 24일부터 29일까지 제주문예회관 제2전시실에서 열여섯 번째 개인전 《바람은 구름이 되어》를 엽니다.
거센 바다의 운동감을 담은 〈Dancing Waves〉와 푸른 하늘의 구름을 그린 〈샤랄랄라〉 연작 등이 관람객을 맞습니다.
오랫동안 좇아온 바람은 여전히 거셉니다. 그 바람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 파도를 지우고 다시 그리다… 5.2m 캔버스에 남은 힘
가로 5.2m에 이르는 〈Dancing Waves 2〉에서는 청록과 회백색의 물감이 거칠게 뒤엉킵니다.
솟구친 물결은 다음 붓질에 형체를 잃고, 흩어진 색은 다시 파도의 일부가 됩니다. 물과 바람의 경계마저 흐릿합니다.
김애란은 파도의 모양을 정교하게 재현하는 데서 벗어나 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힘에 다가갑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프랜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Francis Bacon: Logique de la sensation)에서 회화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바다에서 바람은 물감을 밀어내고 파도의 윤곽을 흩뜨리는 흔적으로 감지됩니다. 형태가 무너지는 자리에서 물결의 압력과 속도가 살아납니다.
“잘 봐라. 이 바람은 폭풍이 아니라 리듬이다. 다름 아닌 바로 춤추는 바다.”
수없이 마주했던 폭풍에서 춤을 발견한 순간입니다.
그 리듬에 이르기까지는 긴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유화 물감은 원하는 때에 마르지 않습니다. 공들여 얻은 색이 다음 붓질에 뭉개지기도 합니다. 김애란은 쉽게 다룰 수 없는 재료와 오랫동안 씨름해왔습니다.
“아무도 끼어들 수 없는 그 지루함을 고수하라.”
그림 앞에서 견뎌야 했던 시간을 스스로 일깨우는 말입니다.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붓에 힘을 더하기보다 오히려 내려놓으려 합니다.
“표현에 집착하지 마라. 붓털이 날아가듯 물감이 덩어리지듯 내버려둬라. 화면의 흐름을 타라.”
물감이 만들어내는 우연까지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흔적에서 새로운 형체를 발견하고, 그 순간 다시 붓을 움직일 힘을 얻습니다.
〈Dancing Waves 2〉는 멀리서 보면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색이 밀리고 겹친 흔적들이 드러납니다. 어느 한 부분도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파도를 응시해온 눈과 수없이 붓을 움직인 손이 그 안에서 만납니다.

■ 어머니의 말이 남긴 것
“허이고, 인생을 다 바쳐.”
생전 어머니가 텔레비전으로 올림픽 출전 선수의 이야기를 보다가 무심코 던진 말입니다. 김애란에게는 그림에 쏟아온 자신의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한마디로 남았습니다.
1991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미술학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2009년 같은 대학 교육대학원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2011년 《middle of the life》로 첫 개인전을 연 뒤 《아~바다여!》, 《생의 한가운데》, 《Jeju Island》, 《바람의 흐름》, 《바람의 퍼즐》 등을 거치며 제주 자연과 삶의 감정을 화폭에 담아왔습니다.
올해 《샤랄랄라》에 이어 이번 전시로 열여섯 번째 개인전을 맞았습니다. 작품은 제주도립미술관과 제주대학교병원 등에도 소장돼 있습니다.
“매 순간 그때가 최악인 줄 알았건만 지금이 최악임이 버거울 때 차라리, 함께 파도를 타고자 함이다.”
수없이 지우고 다시 그린 파도에는 견뎌온 삶의 시간이 겹쳐 있습니다. 어머니의 말처럼 그림에 바쳐온 세월이 〈Dancing Waves〉의 거친 물결 속에서 춤으로 이어집니다.

■ ‘샤랄랄라’… 구름을 그리면서 제주를 걱정하다
바람을 좇아 제주 바다로 향하던 어느 날, 청명한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만났습니다.
그 순간 떠오른 말이 ‘샤랄랄라’였습니다.
〈샤랄랄라〉 연작에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펼쳐집니다. 낮게 놓인 수평선 위로 구름이 떠 있고, 바다와 하늘 사이로 바람의 움직임이 이어집니다.
〈Dancing Waves〉에서 서로 밀치고 부딪히던 물결은 이곳에서 구름의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집니다. 거친 파도에 머물렀던 시선도 한결 넓어진 하늘로 향합니다.
김애란은 구름에서 앞으로 다가올 기쁨과 평안의 가능성을 읽었습니다. 바람이 구름을 만들고 흩뜨리는 풍경에 삶의 변화를 겹쳐 보았습니다.
밝은 색채에는 불안도 스며 있습니다.
급격한 기후변화와 불규칙해진 계절, 예측하기 어려운 날씨에 대한 걱정입니다. 낯설게 변하는 구름은 아름다움과 함께 두려움도 불러옵니다.
오랫동안 제주 자연을 그려온 김애란에게 환경 훼손은 자신이 사랑하고 기억해온 풍경의 미래와 맞닿아 있습니다.
‘샤랄랄라’라는 경쾌한 소리에는 지금의 하늘이 오래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습니다. 구름을 바라보는 기쁨과 풍경을 잃을지 모른다는 염려가 나란히 놓입니다.
“그리려고 하면 안 될 것이요, 빠져들다 보면 보이게 되나니.”
오랜 시간 그림 앞에서 기다리고, 지우고, 다시 붓을 들며 얻은 깨달음입니다.
김애란은 제주 바다에서 파도의 리듬을 발견했고, 하늘의 구름에서는 사라질지 모를 아름다움을 떠올렸습니다.
캔버스에는 여전히 거친 물결이 출렁입니다. 청록과 회백색이 맞부딪히는 자리마다 붓질의 방향과 속도가 다릅니다.
그 수많은 붓질 가운데, 파도가 처음 춤추기 시작한 순간은 어디쯤일까.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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