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디세이’ 그 너머, 트로이는 실제로 있었다!

조윤수 前 주튀르키예 대사·역사여행 작가 2026. 10. 2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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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디세이'가 큰 인기를 끌면서 그리스 신화는 물론 호메로스가 기원전 8세기경 지은 양대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배경인 트로이전쟁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그는 '일리아스'의 트로이전쟁이 순수한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 섞여 있다고 보았다. 히타이트 문헌의 윌루사가 호메로스의 일리오스, 곧 트로이일 가능성이 높고 기원전 13세기에 윌루사가 여러 차례 공격과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며, 미케네 같은 그리스 세력이 서부 소아시아에 개입했다는 점이 근거다.

그러나 브라이스는 트로이가 그리스의 10년에 걸친 단일 대공세가 아니라 여러 차례의 전쟁을 거치며 함락됐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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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오디세이와 트로이의 실체] 슐리만이 찾아낸 히사를리크 언덕, 불탄 흔적…

● 독일 사업가 슐리만이 밝혀낸 고대도시 트로이
● ‘일리아스’ 속 지형 묘사로 트로이 유적 찾아내
● 신화를 걷어내니 물류·무역 요충지가 보여
● 목마는 극적인 멸망 상징하는 문학적 장치?
● 알렉산더 대왕 등 후세 영웅들 잇따라 찾은 성지

튀르키예 차나칼레주 히사를리크 언덕 트로이 유적 발굴 현장 입구의 트로이 목마 조형물. 세월의 흔적 없이 반들반들한 현대식 목마여서 진짜가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조윤수
고대도시 트로이의 추정 위치.
영화 '오디세이'가 큰 인기를 끌면서 그리스 신화는 물론 호메로스가 기원전 8세기경 지은 양대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배경인 트로이전쟁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무려 1만5693행에 달하는 '일리아스'는 '일리온(트로이)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그리스 영웅 아킬레우스가 트로이 최고 장수 헥토르를 쓰러뜨린 뒤 그의 시신을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에게 돌려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1만2110행에 달하는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트로이가 멸망한 후 10년 동안 고생하며 고향 이타카섬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가 아내를 괴롭히던 구혼자들을 물리치고 왕좌를 되찾는 모험담이다.

두 강, 언덕 위 성채, 바다와 평야, 샘 갖춘 지형

트로이는 1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 속 도시로 여겨졌다. 전쟁이 일어난 기원전 1200년경에서 3000년이 넘게 흘렀고, 호메로스가 글을 쓴 지도 2600년이 지난 데다, 신화적 요소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의 사업가 하인리히 슐리만이 사재를 털어 발굴에 나서면서 트로이는 실제로 존재한 고대도시임이 밝혀졌다. 신화는 책과 방송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오랜 발굴로 드러난 '역사적 실체'는 아직 대중에게 낯설다. 문학적 상상을 걷어낸 트로이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슐리만은 '일리아스'에 묘사된 두 강, 언덕 위의 성채, 바다와 평야, 샘 같은 지형이 실제와 일치할 것이라 믿고 여러 곳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히사를리크 언덕 일부를 발굴하고 있던 영국인 프랭크 칼버트의 조언과 도움으로 1870년 시굴을 거쳐 1871년 본격 발굴에 들어갔다. 이윽고 3000년 이상 땅속에 묻혀 있던 유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슐리만은 전문 고고학자가 아니어서 발굴 과정에서 중요한 문화층을 크게 훼손했고, '프리아모스의 보물' 등 유물을 해외로 무단 반출하는 과오도 범했다.

트로이 성벽. 조윤수
필자가 찾은 유적지 현장 앞 광장에는 높이 12.5m의 거대한 '트로이의 목마' 조형물이 서 있었다. 세월의 흔적 없이 반들반들한 현대식 목마여서 진짜가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가짜 목마를 마주한 아쉬움, 최초의 동서양 전쟁터에 섰다는 호기심, 패배한 트로이를 향한 아련한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발굴단장인 뤼스템 아슬란 교수는 10개 층이 겹겹이 쌓인 히사를리크 언덕의 단면도를 보여주며 주변 지형을 설명해 주었다. 입구 초입의 석재 안내문에는 '윌루사(Wilusa)'와 '일리오스(Ilios)'가 같이 적혀 있다. 윌루사는 히타이트 문헌에 등장하는 지명으로, 많은 학자가 이를 호메로스의 일리오스와 같은 곳으로 보며, 일리오스는 트로이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이름이다. 이 표지석은 이곳이 곧 문헌 속 트로이라는 학계의 견해를 담고 있다.

표지석 오른쪽으로는 돌을 정교하게 쌓은 비스듬한 성벽이 길게 이어진다. 3000~4000년 전에 이런 성벽을 쌓았다니 당시 트로이의 힘을 짐작하게 했다. 성벽 아래 좁은 길을 따라 걷다 왼쪽으로 돌면 유적 한가운데에 깊은 골이 나온다. 슐리만이 언덕을 위에서 아래로 곧게 파 내려간 '슐리만 참호'다. 그는 이 부근에서 금 장신구와 청동 그릇 등을 발견하고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 왕의 보물이라 믿어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 이름 붙였다.

트로이 유적 발굴단장 뤼스템 아슬란 교수. 조윤수
그러나 이 유물은 트로이전쟁보다 1000년 이상 앞선 기원전 2500년경(트로이 2기)의 것임이 밝혀졌다. 인근 트로이 박물관과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의 유물을 보며 트로이가 얼마나 화려하고 발달한 문화를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트로이의 역사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로마·비잔틴 시대까지 이어졌다. 여러 민족이 집을 짓고 허물기를 되풀이한 탓에 흙과 벽돌의 색이 층층이 다르게 쌓였고, 학자들은 이를 1기부터 10기까지 나눈다. 1~7기는 청동기시대 주민, 8기는 그리스인, 9기는 로마인, 10기는 비잔틴인이 살았던 흔적이다.

그렇다면 호메로스가 노래한 전쟁은 어느 시대의 일이었을까. 슐리만은 2기 토층에서 불탄 흔적을 발견하고 이곳이 전쟁터라고 착각해 그 위에 있던 진짜 전쟁 시기의 유적층을 훼손했다. 이후 블레겐과 코프만 등의 연구를 거치면서 오늘날에는 기원전 1180년경 불타 무너진 트로이 7기 전반기를 전쟁의 흔적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슐리만 참호를 지나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북서쪽으로 다르다넬스해협이 멀리 보이고, 언덕과 바다 사이에는 수킬로미터의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전쟁 당시에는 해안선이 지금보다 훨씬 언덕 가까이에 있었으나, 오랜 세월 강물이 실어 온 흙이 쌓여 지금의 평야가 됐다. 왼쪽으로 돌아가니 불탄 흔적이 선명한 흑토층과 식량을 저장하던 항아리 무더기가 남아 있다. 6기의 지진이나 7기 전반기 트로이전쟁의 고고학적 흔적으로 보기도 한다.

트로이는 전략적·경제적 요충지였다

지도를 펼치면 트로이가 왜 탐나는 요충지였는지 쉽게 이해된다. 바다로는 에게해와 다르다넬스해협을 거쳐 지중해와 흑해로 나갈 수 있고, 육지로는 소아시아 전체와 이어지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한마디로 물류와 무역의 길목이었고, 발굴된 유물로 볼 때 부와 번영을 누린 도시였다.

당시 국제 정세도 복잡했다. 이집트, 히타이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같은 강대국이 각축하는 가운데 그리스의 미케네가 에게해에서 세력을 키우던 시대였다. 소아시아 서쪽 끝의 트로이(윌루사)는 기원전 1280년경 히타이트와 조약을 맺은 기록으로 보아 히타이트의 속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1274년경 시리아에서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맞붙은 '카데시 전투'에 지원군을 보냈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한편 히타이트 문헌에 '아히야와'로 나오는 세력은 미케네 그리스를 가리킨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미케네는 화려한 금 장신구와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 말해 주듯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번영했는데, 자체 금광이 없었던 만큼 이집트나 발칸반도와의 활발한 무역으로 부를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미케네가 기원전 13세기 서부 소아시아 해안으로 세력을 뻗으며 트로이를 압박했으니 해상과 육상의 두 세력 충돌은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기원전 1200년경은 지중해 전역에서 청동기 문명이 무너지던 격변기였고, 미케네의 궁전들과 히타이트 제국도 머지않아 같은 운명을 맞았다.

트로이전쟁, 호메로스 서사시와 달랐을 가능성↑

히타이트-트로이 간 상호 협력 조약 내용을 새긴 점토판. 조윤수
고대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트로이전쟁을 터무니없는 신화로 치부하지 않고, 그리스 연합 세력의 원정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보았다. 다만 '일리아스'가 전하는 병력 규모는 과장이며, 식량 보급의 한계 때문에 실제 병력은 그보다 적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래서 트로이가 오래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슬란 교수 역시 기록은 부족하지만 지난 150년간의 발굴 결과로 볼 때 트로이가 그리스군의 공격을 받아 불타 무너졌을 가능성을 신뢰하고 있다.

‘히타이트 왕국(The Kingdom of the Hittites)'을 쓴 트레버 브라이스는 이 책의 마지막 장 '트로이전쟁: 신화인가 현실인가'에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그는 '일리아스'의 트로이전쟁이 순수한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 섞여 있다고 보았다. 히타이트 문헌의 윌루사가 호메로스의 일리오스, 곧 트로이일 가능성이 높고 기원전 13세기에 윌루사가 여러 차례 공격과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며, 미케네 같은 그리스 세력이 서부 소아시아에 개입했다는 점이 근거다.

그러나 브라이스는 트로이가 그리스의 10년에 걸친 단일 대공세가 아니라 여러 차례의 전쟁을 거치며 함락됐다고 보았다. 미케네 세력이 소아시아 서부 해안으로 뻗어나오면서 기원전 13세기 이전부터 크고 작은 충돌이 거듭됐고, 그 충돌과 영웅담이 수백 년 동안 입으로 전해지다가 호메로스가 하나의 거대한 전쟁 이야기로 엮어 문학작품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일리아스'에는 트로이를 돕는 주변 나라가 많이 나오지만 히타이트가 도왔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 까닭은 당시 히타이트의 사정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집트와는 기원전 1259년경 평화조약을 맺었으나 아시리아의 압박이 커지고 있었고, 트로이전쟁 무렵인 기원전 1200년경에는 내분과 기근, 경제 파탄으로 제국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제후국인 트로이를 도울 여력이 없었을 뿐 아니라 본토 수도 하투샤조차 지키기 어려운 형편이었을 것이다.

전쟁에 거대한 목마? 군사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워

트로이 유적지와 차낙칼레 광장 두 곳에 거대한 목마 조형물이 서 있다. 10년 동안 함락되지 않던 성이 오디세우스의 꾀로 만든 목마 때문에 무너졌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하지만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장례에서 끝나 목마 부분을 다루지 않고, '오디세이아'에서도 목마는 여러 대목에서 단편적으로 회고될 뿐 함락 과정이 전체적으로 서술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는 상세한 목마 이야기는 대부분 기원전 1세기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나온다. 그리스군이 목마를 남기고 감쪽같이 사라지자, 스파이 시논이 "여신에게 바치는 신성한 선물"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트로이인들은 사제 라오콘과 공주 카산드라의 경고를 무시한 채 목마를 성안으로 들였으며, 밤에 목마 속에서 기어 나온 병사들이 성문을 열었다는 극적인 이야기다. '아이네이스'는 트로이 멸망에서 탈출한 영웅 아이네이아스가 이탈리아로 건너가 로마의 조상이 됐다는 건국신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실제 전쟁에 거대한 목마가 쓰였을까. 군사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수십 명의 병사를 숨긴 거대한 목마를 성문 코앞에 남기고 적이 철수했다고 해서, 10년을 싸운 트로이군이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엄청난 무게의 목마를 성안으로 끌고 들어왔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치열한 전쟁을 극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만들어낸 문학적·신화적 표현으로 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트로이 언덕에서 바라본 다르다넬스해협. 조윤수

오랜 성지, 우리의 언어 속에 살아 있는 트로이

트로이는 결국 함락돼 불탔지만 후대에 남긴 발자취는 컸다. 트로이를 정복하는 것이 곧 세계를 장악하는 길이라 믿은 영웅들이 이곳을 찾아 자신의 위상을 과시했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황제는 그리스 원정길에 들러 아테나 여신에게 제사를 올렸고,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정복길에 이곳을 참배했다. 로마의 카이사르는 트로이로 수도를 옮기려 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서기 324년경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일리온 일대를 새 수도 후보지로 삼았다가 비잔티온(콘스탄티노플)을 택했다. 21세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제국의 메흐메트 2세도 알렉산더 대왕처럼 동서양을 잇는 지도자로 남고자 트로이를 찾았다.

트로이 인근의 다르다넬스해협은 오늘날에도 동서양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다. 트로이전쟁으로부터 3000년이 지난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이곳에서 '갈리폴리 전투'가 벌어졌다. 영국·프랑스 등 연합군은 해협을 돌파해 이스탄불을 위협하고 오스만제국을 전쟁에서 이탈시켜 러시아와의 해상 보급로를 열려 했다. 그러나 그해 3월 해군 단독 공격에서 전함 여러 척을 잃었고, 4월에 시작한 상륙작전도 오스만군의 완강한 저항에 막혀 실패했다. 영국 군사사에서 손꼽히는 참패로 평가된다.

트로이의 폐허를 마주할 때마다 묘한 애틋함이 밀려온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우리는 서양인의 시각으로 쓰인 신화 속 트로이전쟁에만 익숙하다. 트로이인들이 직접 쓴 그들만의 역사는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리스 연합군이 온갖 고생을 하며 트로이를 공격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청동기 사회에서 무기의 재료인 구리와 주석을 확보하는 일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했을 것이다. 트로이는 에게해와 흑해를 잇는 다르다넬스해협을 끼고 곡물과 금속 등 흑해·아나톨리아의 물자가 오가는 길목에 있었다. 그리스인들에게 트로이는 탐나는 보물 창고였을 것이다. 호메로스가 노래한 '여인을 되찾는다'는 명분 뒤에는 트로이를 무너뜨려 무역의 주도권과 막대한 부를 차지하려는 속셈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트로이의 불탄 흔적과 낡은 유물은 지금도 수천 년 전의 처절한 전쟁을 말없이 전하고 있다. 그 참혹했던 실상을 온전히 가늠할 순 없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쓰는 말 속에는 그때의 기억이 살아 있다.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아킬레스건'이라 하고, 겉은 선물처럼 보이지만 속에 치명적인 함정을 숨긴 책략이나 악성 프로그램을 '트로이의 목마'라 하지 않는가. 트로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도 그 이름은 우리의 언어와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조윤수
● 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
● 미국 로체스터대 경제학 석사, 박사과정 수료
● 경기대 경제학과 박사
● 전 국립외교원 명예교수
● 저서: '소아시아 역사문화산책' '이스탄불 역사문화산책' 등

조윤수 前 주튀르키예 대사·역사여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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