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독, 고소한 밤즙 터지는 가을날

한겨레21 2026. 10. 24.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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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미운 사람이 있다면 밤 철을 기다렸다가 밤 주우러 가자고 약속하면 된다. 허리를 구부리고 밤 줍느라 정신없는 미운 놈 등 위로 밤나무 가지를 살짝만 흔들면 된다. "어이쿠, 따가워라!" 풀쩍 뛰며 소리 지르는 미운 놈에게 "밤송이가 저절로 막 떨어지네"라고 하는 맛이 아주 고소하다.

포도밭 저 끝에 밤나무 한 그루 심었더니 올해는 밤이 제법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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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들][농사꾼들―충북 충주 편] 포도밭 끝 밤나무 아래… 밤 주우며 피어난 웃음꽃, 유년의 추억
포도밭 끝에 심은 밤나무에 올해는 제법 밤이 열렸다.

몹시 미운 사람이 있다면 밤 철을 기다렸다가 밤 주우러 가자고 약속하면 된다. 허리를 구부리고 밤 줍느라 정신없는 미운 놈 등 위로 밤나무 가지를 살짝만 흔들면 된다. “어이쿠, 따가워라!” 풀쩍 뛰며 소리 지르는 미운 놈에게 “밤송이가 저절로 막 떨어지네”라고 하는 맛이 아주 고소하다.

포도밭 저 끝에 밤나무 한 그루 심었더니 올해는 밤이 제법 열렸다. 시골에 산다면 감나무와 밤나무 한 그루씩은 있어야 가을이 섭섭하지 않다. 친구들에게 밤을 줍자고 하니 다들 신이 나서 모인다. “밤이 너무 토실토실 예쁘다!” 누구는 꼬챙이를 들고 밤송이를 벌리고 누구는 가지에 붙은 밤송이를 후려친다. 밤 딸 욕심에 밑에 누가 있는지 보지도 않는다. “아이고 따가워라.” 등에 밤송이가 떨어지는데도 몸을 비틀며 그냥 웃는다. 가을빛을 받으며 친구의 밭에서 밤을 서리하는 이 순간이 그저 좋기만 한가보다.

요즘에는 사철 내내 밤을 구할 수 있지만 내 어린 시절에 밤은 제철 음식이었다. 가을이 끝나면 밤도 끝난다. 산에 떨어진 지 열흘만 지나도 밤 속에 벌레가 한 마리씩 들어가 있어 먹을 수가 없다. 보관하기 쉽지 않은 열매다. 그래도 제사상에 빠질 수 없는 품목이라 우리 집에서는 구덩이를 파고 보관했다. 묻을 때는 꼭 밤송이째 같이 묻었다. 쥐가 파먹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오빠와 그 친구들이 보관한 밤을 훔쳐먹지 못하게 하려는 것도 있었다. 벽이나 천장에 쥐구멍이 나면 거기도 밤송이로 막았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땅속에 밤을 보관하면 다음해 4월까지는 끄떡없었다.

“난 생밤이 제일 맛있더라.” 한 친구가 주워온 밤의 껍질을 칼로 깐다. 난 제사나 명절날 외에 생밤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제사상에 올라갔던 생밤은 왠지 맛이 없었다. 귀신이 먹었다 뱉어놓은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시들하고 생명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밥 위에 얹힌 것이 가장 좋았다. 따뜻한 밥 위에 얹힌 노란 밤을 숟가락으로 톡 쳐서 부스러뜨린 뒤 밥이랑 먹으면 밥이 그렇게 달고 고소했다.

“생밤을 정말 잘 까는구나.” 친구의 생밤 까는 솜씨가 놀랍다. 중년이 넘어 생밤 잘 까는 친구를 보니 20대 때, 신혼살림을 막 시작했던 친구가 생각난다. 그 친구 집에 갔더니 식탁 위에 밤이 수북하게 담긴 소쿠리가 놓여 있었다. 이걸로 뭐 하느냐 물었더니 남편이 생밤을 좋아해서 매일 저녁 밤을 까서 준다고 했다. 얼마나 사랑해야 손을 다치면서까지 생밤을 까줄 수 있을까, 놀랍고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금방 까놓은 생밤을 집어 먹어보니 오도독 소리와 함께 밤즙이 터진다. 생밤이 이런 맛이었나, 신선하고 고소하다. 다들 하나씩 쏙쏙 입에 넣으니 금방 없어진다. 밤은 까는 사람 따로 있고 먹는 사람 따로 있다더니, 잘도 까고 잘도 먹는다.

올해는 땅을 파서 밤을 송이째 보관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생밤 냄새를 맡고 땅을 파고 들어간 쥐들이 밤송이에 포위되어 우왕좌왕 당황하는 꼴을 상상하니 괜히 즐겁다. 폭설이 내린 다음날 그 밤을 파내, 불을 피워 밤을 던져넣고, 미처 칼집 내지 못한 밤이 불 속에서 펑펑 터지면 온몸에 잿가루를 뒤집어쓰겠지. 그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고 하겠지만, 그것이 답이다. 그냥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이고 싶다.

글·사진 신이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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