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구정아: 우스모스 — 무엇을 보았는가 대신 '무엇을 지나쳤는가'를 묻다
명사가 아닌 동사가 된 예술
잊힌 바닥에서 피어나는 관계
영원을 거부하고 소멸한 예술
[핵심 요약]
ㆍ핵심 질문: 미술관에서 우리는 흔히 '무엇을 몇 점 봤는가'를 세며 작품을 눈앞에서만 소비합니다. 정작 지나친 것이 나중에 감각으로 되돌아오는 순간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다.
ㆍ관람 포인트: 리움미술관 구정아 개인전 <우스모스(OUSSSMOS)>는 30여 년 작업 약 35점을 모은 전시로 12월 27일까지 열립니다. 이 전시는 작품을 변하지 않는 사물이 아니라 보는 위치와 시간에 따라 상태가 바뀌는 사건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보통 전시를 이렇게 생각한다. 좋은 작품을 모아 잘 보이게 걸어두는 곳. 우리는 미술관에서 '무엇을 봤는가'를 센다. 몇 점을 봤고 어떤 대표작 앞에 섰고 어떤 사진을 남겼는지.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구정아의 개인전 <우스모스(OUSSSMOS)>는 이 생각을 뒤집는다. 이 전시에서 중요한 것은 본 것이 아니라 지나친 것이다. 그 지나친 것이 몇 시간 뒤, 며칠 뒤 지하철 안에서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다. <우스모스>에서 작품은 보는 순간이 아니라 돌아오는 순간 완성된다.
전시의 감각은 한 박자 늦게 온다. 그 늦음이 어떻게 설계됐는지를 따라가는 과정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전시는 지난 9월 5일 시작해 오는 12월 27일 끝난다. 지금이 딱 중반이다. 30여 년의 작업을 모은 국내 최대 규모 개인전으로 1990년대 초기작부터 이번 전시를 위한 대형 신작까지 약 35점이 나왔다. 이 정도 규모라면 걸작을 한 점씩 세워두고 '이것이 구정아입니다'라고 말할 법한데 이 전시는 그러지 않는다. 미술관 전체를 하나의 장으로 만들어 놓고 관람객이 각자 다른 순서로 다른 것을 발견하도록 내버려 둔다.
왜 그럴까. 구정아에게 작품이란 고정이 아니라 변화이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보존하고 구정아는 소멸시킨다
미술관의 본질은 무엇일까. 보존이다. 조명·온도·습도를 통제해 작품이 최대한 변하지 않게 지키는 것. 오랫동안 예술작품은 변하지 않는 완결된 오브제였다.
구정아는 정반대 편에 선다.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1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한 그가 써 온 재료를 보자. 연필심·아스피린 가루·나프탈렌·각설탕. 모두 미술관이 기대하는 물성과는 거리가 멀다. 시간이 지나면 닳고 녹고 날아가는 것들이다.
나프탈렌은 냄새를 내며 줄어든다. 아스피린은 습기를 먹는다. 연필심은 부러진다.
이는 재료적 취향을 넘어선 확고한 선언이다. 구정아는 작품에 끝날 권리를 준다. 오늘 본 작품과 다음 주에 볼 작품은 같은 작품이지만 같은 상태가 아니다. 구정아에게 작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강철이나 자석과 같은 재료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영구적인 덩어리로 안주하는 대신 관람객의 시점 이동이나 일시적인 자력에 의해 언제든 해체되고 변화하는 비물질적 사건으로 존재한다.
우스는 뜻이 아니라 상태다
전시 제목 <우스모스>는 작가가 1990년대 중반부터 발전시켜 온 개념 우스(OUSSS)와 우주를 뜻하는 코스모스(COSMOS)를 합친 말이다. 소리 내 읽으면 우스모스, 눈으로 읽으면 우주가 두 번 겹쳐 있다.
우스는 사전에 없다. mysterious·curious 같은 영어 형용사 끝에 붙는 '-ous'에서 왔다는 설명이 따라붙지만 그렇다고 형용사도 아니다. 접두사가 되기도 하고 접미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냥 소리다.
보통 단어는 의미가 정해져야 쓸모가 생기는데 의미가 정해진 단어는 시대가 바뀌면 낡는다. 반면 우스의 방향은 정반대다. 특정한 뜻으로 자신을 가두지 않기에 어디에든 유연하게 스며들고 무엇과도 연결된다. 작가가 이 짧은 소리를 30년 넘게 붙잡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뜻이 없으니 낡지 않는다. 정의하지 않는 것이 구정아의 보존법이다.
전시도 똑같이 설계됐다. 고정된 중심도, 정해진 동선도 없다. 어떤 사람은 로비의 거대한 구조물에서 시작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공간의 어둠에서 시작한다. 같은 전시를 본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전시를 본 셈이다.
세 작품, 세 개의 증거
<모비우스(MOBIOUSSS)> 위치가 작품을 바꾼다

작품은 그 자리에 그대로다. 바뀐 건 내가 선 높이뿐이다. 작품이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이 기호(∞)는 1998년 스웨덴 스톡홀름 현대미술관(Moderna Museet) 프로젝트에서 <∞/24>라는 제목으로 처음 등장했고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는 바닥 패턴과 야외 벤치로 구현됐다. 30년 가까이 반복된 모티프다. 2024년 한국관을 향과 냄새로 채웠던 작가가 이번에는 무게로 돌아왔다.
제목은 수학자 뫼비우스와 작가의 우스를 함께 가리킨다. 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면이다. 지금 당신이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확인해 보라. 확인할 방법이 없다. <모비우스>가 말하는 것은 작품은 대상이 아니라 시점(視點)이라는 것이다.
<마그넷 시티즈(Magnet Cities)> 끌어당기는 힘만이 형태를 만든다

못도 받침도 접착제도 없다.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 말고는 이 형태를 지탱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이 작품은 완성된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 붙었다 떨어지기를 되풀이할 뿐이다.
출발점은 영국 건축가 세드릭 프라이스의 마그넷 시티 개념이다. 변화 가능성과 일시성, 사람의 필요에 반응하는 건축을 꿈꿨던 사람의 아이디어다. 구정아의 자석들도 놓이는 장소와 주변 환경, 옆 자석과의 관계, 심지어 설치하는 사람에 따라 매번 다른 구성이 된다. 형태는 관계에서 생겨난다.
<나&당신(I & Thou)> 바닥이 관계가 되는 자리

제목은 마르틴 부버가 1923년 펴낸 <나와 너(Ich und Du)>에서 왔다. 부버는 사람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두 가지로 나눴다. 상대를 대상으로 다루는 나-그것, 그리고 상대를 하나의 인격으로 마주하는 나-너다. 뒤의 관계는 상대를 규정하는 순간 무너진다. 끝없이 다시 맺어야 한다.
이 작품이 바닥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바닥은 밟는 것이다. 아무도 바닥을 감상하지 않는다. 관람객 대부분은 자기가 작품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밟고 지나간다. 작가는 가장 낮고 잊힌 공간인 바닥을 전시장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던 대상과 온전한 '나-너'의 관계를 맺어보라고 제안한다. 부버의 철학처럼 대상을 그저 밟고 지나가는 무의미한 배경('나-그것')으로 취급하는 것을 멈추고 새로운 인격체로 마주할 때 비로소 진정한 관계가 피어난다.
구정아에게 바닥은 오래된 캔버스다. △2007년 프랑스 바시비에르 아트센터의 대각선 흑백 체크무늬 바닥 △2010년 미국 뉴욕 디아 아트 파운데이션 개인전을 위해 구상한 <닥터 포그트(Dr. Vogt)> △2025년 루마 재단에서 드로잉과 함께 선보인 분홍색 바닥 <우수(OUSSSEUX)>까지. 그는 바닥·조명·건축에 개입하며 전시장 자체를 작품으로 다뤄 왔다. 진짜 관계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금 의식하고 마주하는 순간에 시작된다.
세 작품을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문장이 된다. 작품은 내가 선 자리(시점), 서로를 붙드는 힘(관계), 그리고 의식하지 못한 순간(지나침)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언제나 나중에 도착한다.
끝나는 것까지가 작품이다
<우스모스>를 보고 나오면 이상하게도 무엇을 봤는지 말하기 어렵다. 작품 목록은 기억나는데 그 목록이 전시의 전부가 아니라는 느낌이 남는다. 이 전시는 보는 순간이 아니라 미처 보지 못한 것이 다시 감각되는 순간에 모습을 드러내도록 설계돼 있으니까.
영원히 남기를 거부하는 작품들을 모은 이 전시도 12월 27일에 끝난다. 어떤 작품은 그 전에 이미 달라져 있을 것이다. 전시의 내용과 형식이 처음부터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 나프탈렌이 냄새를 내며 줄어들 듯 리움의 이 장면도 서서히 옅어질 것이다.
대부분의 전시는 남기기 위해 존재한다. <우스모스>는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고 사라진 뒤에 당신 안에서 다시 시작된다. <우스모스>는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가 아니라 작품이 당신에게 돌아오는 시간을 설계한 전시다.
질문 하나를 남겨둔다. '오늘 하루 당신은 몇 개를 그냥 지나쳤나. 그리고 그중 몇 개가 아직 당신을 찾아오지 않았나.'
☞ 뫼비우스의 띠: 긴 띠를 한 번 비틀어 양 끝을 붙인 고리. 한쪽 면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반대쪽 면에 닿아 안과 밖의 구분이 없다.
☞ 마르틴 부버: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계 철학자(1878~1965). 사람이 서로를 물건이 아닌 온전한 인격으로 마주하는 '대화'의 관계를 강조했다.
☞ 가비온: 철망 상자에 돌을 채워 쌓은 벽. '돌망태 옹벽'이라고도 한다.
여성경제신문 최영은 기자
ourcye@seoulmedia.co.kr
*여성경제신문 기사는 기자 또는 외부 필자가 작성 후 AI를 이용해 교정·교열하고 문장을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기사에 포함된 이미지 중 AI로 생성한 이미지는 사진 캡션에 밝혀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