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 문학을 말하다] 나이 듦에 대하여

박현옥 약사 2026. 10. 24.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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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공론은 약사문인회와 손을 맞잡고, 약사의 삶 속에 스며 있는 감성과 사유를 문학의 언어로 풀어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 코너에서는 시와 수필을 통해 약사들이 마음속에 품은 이야기들이 조용히 피어납니다.

젊은 날의 나 역시 그 우주비행사가 그렇듯 삶이라는 전장에서 숱한 상처를 입고 돌아오기 전까지는 내 발밑의 그런 작은 새싹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화성에서 온 우주 비행사나, 골절된 동료 곁을 떠나지 않고 돌보았던 원시 조상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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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공론×한국약사문인회] 박현옥

약사공론은 약사문인회와 손을 맞잡고, 약사의 삶 속에 스며 있는 감성과 사유를 문학의 언어로 풀어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 코너에서는 시와 수필을 통해 약사들이 마음속에 품은 이야기들이 조용히 피어납니다.

한 편의 글이 한 알의 약처럼, 독자 여러분의 하루에 따뜻한 쉼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박현옥 약사 제공.

영화 <마션>의 마지막께 장면은 잔잔하지만 인상적이었다. 화성 의 황량한 대지에서 홀로 죽음과 사투를 벌이다 구사일생으로 구조 되어 지구에 돌아온 우주 비행사. 그가 지구로 귀환한 후 어느 날, 벤치에 앉아 차를 마시다 우연히 벤치 아래 포장도로를 뚫고 올라온 작은 새싹을 보게 된다. 예전 같으면 아무 생각 없이 밟고 지나갔을 수 도 있을 작은 새싹. 하지만 그는 그 작은 초록을 발견하는 순간 허리 를 굽혀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안녕!" 하고 말을 건넨다. 그런 행동이야말로 생명에 대한 인간의 예의이자, 혹독했던 경험이 그에게 선사한 선물이라고 생각해 가슴이 뭉클했었다.

젊은 날의 나 역시 그 우주비행사가 그렇듯 삶이라는 전장에서 숱한 상처를 입고 돌아오기 전까지는 내 발밑의 그런 작은 새싹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오직 '올라가는 길'에만 마음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발걸음은 내 몫의 삶을 따라가느라 늘 종종거렸다. 그리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는 게 유능함이라 믿었다. 힘없고 약한 것들을 살피기에는 너나없이 바쁘고 버거워 내 앞의 삶에만 온통 몰입해 있었다.

이제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는 내리막길에 접어들고 보니 고은 시인의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이라는 문장이 비로 소 가슴에 와닿는다. 내 앞의 시간을 살아내느라 숨이 차서, 혹은 목표에 눈이 멀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야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 작한 것이다. 그것은 대개 작고, 조용하며, 좀체 앞줄에 서지 않는 뒷 모습들이다. 내가 쓰러져 본 경험으로부터 타인의 비틀거림을 이해 할 마음이 생기고, 나의 찌질함과 실수를 수없이 겪어내고 나니 타인의 허물도 비난보다는 애잔함으로 다가온다. 어디 그뿐인가, 내 몸이 약해지니 약국에서 어르신들이 늘 반복하던 고통의 호소도 어떤 의미였는지 이제야 제대로 감각으로 이해가 되고 공감되어 마음이 짠 하다.

이제 심신이 느긋해진 때에 이르러서야 나는 비로소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의 말을 떠올린다. 그녀는 문명의 첫 증거를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넓적다리뼈'를 꼽았다. 야생에서 치명적인 골절상을 입고도 살아남았다는 건 뼈가 붙기까지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누군가 곁을 지키며 먹이고 돌보았다는 뜻이다. 인류는 유능한 무기나 도구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여기는 연민과 그 곁을 지키는 '기다림'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마션>의 우주비행사가 작은 새싹을 쓰다듬으며 말을 건네는 그 마음, 산을 내려오면서 비로소 꽃에 눈길이 가는 그 마음처럼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이런 작은 것들이 진짜 문명의 얼굴이 아닐지 싶다.

나이가 준 또 하나의 선물은 '의심'이다. 흔히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말한다. 예전의 나는 세상이 가리키는 '달'을 쫓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어떤 현자의 말처럼 이제 나는 멈춰 서서 묻게 된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저 달을 보라고 손가락질을 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세상이 진리라고 내게 그동안 주입한 것들, 모두가 한 방향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하는 가르침이 과연 진짜 나의 달이었을까? 이제야 나는 군중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멈춰 설 용기를 낸다. 내 나름의 길을 찾아 나설 여유는 긴 세월 내가 겪은 숱한 실수와 좌절의 선물이다. 따라서 나의 '정답'이 누군가에게는 '오답'일 수 있음도 인정하게 되었다. 지구상 80억의 인구가 있다는 것은 80억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의미를 이제는 이해한다.

그러나 이 넉넉함의 이면에는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가 경고했던 노년의 부작용이라는 거대한 덫이 도사리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경험이라는 이름의 단단한 껍질 속에 자신을 가두고 고집의 성을 쌓기 쉽다. 서서히 사회에서 소외되는 불안과 상실감을 화려한 외피나 과거의 영광으로 자신을 무리하게 드러내려는 모습을 흔히 보이기도 한다. 내면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외부의 인정에 매달리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풍경인가.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훈계를 늘어 놓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드는 것 역시 모든 사람의 기피 대상일 뿐이다. 자기 객관화가 결여된 노년은 그저 측은할 뿐이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가르치려 드는 손가락'인가, 아니면 힘들 때 곁에 함께 있어 줄 수 있는 사람'인가? 진정한 노년의 품격은 넉넉한 품과 침묵의 깊이에서 나올 거 같다. 인생의 가을볕 아래서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여러 애잔하고도 다정한 풍경들 앞에 가끔은 눈물이 난다.

앞서가는 이들의 반짝임도 좋지만 뒤처진 자들이 내는 가쁜 숨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화성에서 온 우주 비행사나, 골절된 동료 곁을 떠나지 않고 돌보았던 원시 조상들처럼 말이다. 부디 나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에게 좀 더 너그럽기 를, 내 주위의 모든 생명과 더불어 역지사지의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삶이 그에게만 특별히 관대했을 리 없지만 나이 들어가며 더 온유하고 아름다워지는 사람처럼 말이다.

박현옥 
전북 전주시 완산구 
한국약사문인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