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와 오대산, 문수보살을 뵐 수 있을까 [산행 수필]

황대연 객원기자 2026. 10. 2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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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상원사 전경

[<사람과 산>  황대연  객원기자]       오대산은 문수 신앙의 본산으로 신비스러운 문수보살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지금까지 다섯 번째 오대산을 찾았으나 한 번도 문수보살을 뵙지 못했다. 문수보살은 깨달음의 근본이 되는 지혜를 상징한다는데, 이번에는 문수보살을 뵙고 지혜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 기대감에 마음이 설렌다.

상원사에 이르니 나뭇가지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하늘은 구름 몇 점 보일 뿐 물에 씻은 듯 맑고 파랗다. 얼마 전까지 폭염이 가슴 속까지 펄펄 끓게 하더니 어느새 햇볕이 한 결 부드럽고 옅어졌다. 청량한 공기 속에는 물과 나무, 흙과 낙엽 냄새가 뒤섞여 가을 향기를 물씬 풍긴다. 등산로 입구에 있는 관대(冠帶)걸이가 우리 일행을 맞아준다.

말 그대로, 의관을 걸어두기에 적당해 보이는 이 소박한 석조물은 조선시대 세조가 잠시 의관을 걸어 놓고, 계곡물에서 종창을 드러내고 씻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 이야기는 이러하다.
"왕위에 오른 세조가 단종을 사사하자, 꿈에 단종의 어머니 인현덕왕후가 나타나 저주하며 등에 침을 뱉었다. 세조가 꿈에서 깨자 침을 맞은 부위마다 종기가 생겼다.

그로부터 세조는 등창을 심하게 앓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오대산 상원사에서 법회를 마치고, 옷을 벗어 관대걸이에 걸어두고 계곡물에 들어가 몸을 씻고 있었다. 때마침 동자승이 나타나 거들어 주었다. 세조가 동자승에게 이르기를 '너는 임금의 옥체를 봤다고 발설하지 말라' 했다. 그랬더니 동자승이 세조에게 '임금께서도 문수동자를 봤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세조가 몸을 씻었다는 계곡
관대걸이
세조와 문수동자 전설이 담긴 상원사 벽화

과연 세조는 문수동자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몸을 씻었던 것일까? 이후로 종창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걸 보면, 세조의 극진한 불심이 문수보살을 감읍하게 했음은 틀림없나 보다. 이 같은 이야기는 속리산 '목욕소'에도 전해 내려온다. 이곳 오대산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문수보살 대신 약사여래가, 문수동자 대신 월광태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문득, 나도 한번 옷을 벗어 걸어두고 계곡 물에 풍덩 뛰어들고 싶어진다. 그렇게 하면 행여 문수보살이 나타나 지혜의 말씀으로 내 마음의 종창을 어루만져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잠시 잠겨본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빨리 가자고 한다. 일행은 벌써 산문에 들어선다.

중대사에서 적멸보궁에 이르기까지는 길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석등이 서 있다. 불은 켜있지 않았으나 불심이 서려 있는 것만 같다. 불 대신 스피커를 넣어놓은 것일까? 석등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불교 음악을 들으며, 티끌 하나 쌓이지 않은 풋풋한 공기에 취해 오름길을 이어간다. 적멸보궁 직전에는 용안수(龍眼水)라는 샘이 있다.

용의 눈에 해당하는 혈 자리라고 한다. 한 모금 마셔 보니, 맛은 그냥 물맛이다. 용안수를 마시면 눈이 밝아진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천리안은 바라지도 않지만 돋보기 없이 신문 한 줄 거뜬히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적멸보궁에 들어선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곳으로 '번뇌가 사라진 보배로운 궁전'을 뜻한다. 법당에는 불상은 없고 불단만 설치되어있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온 사리를 모셔놓았기 때문이다. 불단 앞에 서자 창을 통하여 뒤뜰에 있는 사리탑이 보인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사리탑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는데, 그때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받아와 모셨다고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이곳은 풍수지리상으로 오대산 다섯 봉우리인 비로봉, 동대산, 두로봉, 상왕봉, 효령봉에 둘러싸여 있고, 다섯 혈 자리인 동대사(관음암), 서대사(수정암), 남대사(지장암), 북대사(미륵암), 중대사(사자암) 중 중앙인 중대사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천하제일의 명당이라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다섯 봉우리는 마치 부처님을 호위하는 다섯 장수처럼 위풍당당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 참으로 늠름하다. 자장율사가 문수보살로부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받아와 모셔놓은 곳으로는 이곳 말고도 네 곳이 더 있다. 양산 영축산 통도사, 인제 설악산 봉정암, 영월 사자산 법흥사, 정선 태백산 정암사에 모셔놓았으며, 이곳을 포함 해 5대 적멸보궁이라 한다. 

적멸보궁에 예를 갖추고 오름길을 이어간다. 곱게 물든 단풍에서 가을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울긋불긋 피어난 단풍을 보니 나의 마음도 색색깔로 물들어 가는 듯하다. 단풍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해서인지 더욱 붉게 타오르고 있다.

가을은 산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는 말처럼, 가을이 점점 내려오고 있다. 어김없이 계절이 바뀌어 가고 있다. 연인 사이로 보이는 젊은 등산객 남녀가 빨간 단풍잎 하나를 주워 들고 얼굴을 맞댄 채 냄새를 맡으며 웃고 있다. 참 정겨운 모습이다. 저들의 모습에서 내 젊은 시절이 떠오르며 그리워진다.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 정상(해발 1,563m)에 선다. 정상에는 1m도 안 되는 자그마한 정상석이 자리하고 있다. 오대산의 모든 봉우리를 거느리는 맏형치고는 너무나 소탈한 모습이다. 하긴, 무슨 허세가 필요할까? 말 없어도 여러 봉우리가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그 누구의 조아림도 실은 필요 없으리라. 그곳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음으로 충분하리니.

올라왔던 길을 되짚어 하산 길에 들어선다. 올라갈 때 보지 못했 던 예쁜 꽃이 등산로 옆 저만치에서 방긋대고 있다. 한걸음에 달려가 보니 진달래꽃이다. 지금이 가을인데 진달래꽃이라니, 그야말로 철없는 진달래가 아닌가. 철없는 진달래일지언정 아름답고 반가웠다. 반갑다고 머리만 쓰다듬어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한 마디 했다. 진달래의 장난기 섞인 대꾸에 철없이 살아온 나 자신이 부끄럽다.

          "진달래야, 지금은 봄이 아니고 가을이란다."
          "흥! 누가 누구 얘기하는 거야. 철없는 건 마찬가지면서."
          "뭐, 뭐라고? 철없는 건 마찬가지라고?"

상원사 앞마당에 내려선다. 대웅전에서 울려 퍼지는 그윽한 노승 의 염불 소리가 산사를 맴돈다. '땡그랑~땡그랑' 울리는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가 은은하게 들린다. 잠시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아본다. 일만 명의 권속을 거느리고 설법하는 문수보살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고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문수보살이시여! 어디에 계시나이까?

이번에도 문수보살을 친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천 년의 향에 젖은 상큼한 공기를 한껏 마셨더니 가슴이 맑아지는 듯하다. 속세의 때 묻은 생각과 욕심을 모두 벗어 놓으니 일체 번뇌에서 해탈한 듯 마음이 고요하다. 맑아진 가슴과 고요해진 마음을 안고 발걸음을 되돌린다. 
오대산 비로봉 정상
비로봉에서 바라본 두로봉 동대산 백두대간능선

글.사진 황대연 객원기자 │ 백두대간 종주 등 2,900여 개의 국내 산과 킬리만자로 등 9개의 해외 산에 올랐다. 저서 『백두대간에 서다』, 『은퇴산꾼 고산에 서다』, 『헤어날 수 없는 사랑』, 『맹물에 조약돌을 삶아 먹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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