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과실은 어디로 갔을까[서중해의 경제망원경](69)

2026. 10. 2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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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입 화물 가득 쌓인 부산항 신선대 부두. 연합뉴스

영국의 경제학자 프레드 허시(Fred Hirsch)는 47세로 작고하기 2년 전인 1976년 <성장의 사회적 한계>(Social Limits to Growth)를 출간했다. 출간 50주년을 맞은 올해 이 책은 영국에서 다시 발간됐다. 그는 책에서 세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첫째, 왜 개인은 경제 성장을 갈망하면서도 성장이 이뤄지면 실망하는가(풍요의 역설)? 둘째, 왜 파이가 커졌는데도 분배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는가? 셋째, 왜 개인의 자유가 강조되는 시대에 오히려 집단주의·국가의 개입이 늘어나는가?

허시 이론의 핵심은 경제 발전 단계에 따라 사회를 지배하는 ‘희소성의 성격’이 달라진다는점이다. 과거 제조업 중심 시대와 현대 탈산업 시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게임의 규칙을 가진다.

‘제조업 중심’ 시대는 물질적 희소성이 지배했다. 기술 혁신과 대량생산으로 가전제품·자동차·내구재의 단가가 낮아지면서 과거 부유층만의 전유물이던 것들이 대중 전체의 것이 됐다. 허시는 이를 ‘민주적 부(Democratic Wealth)’라고 불렀다.

파이가 커지면 모두가 승자가 되는 양의 합(Positive-sum) 게임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경제가 성장하면 나와 내 자식의 삶이 절대적으로 나아진다”는 체감이 가능했던 시대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비교적 넓게 열려 있었고, 사회적 낙관론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경제 발전 따라 희소성 달라져

반면 물질적으로 풍요해진 현대 탈산업 사회에서는 지위의 희소성이 중심이 된다. 소득이 오르면 수요가 명문대 학위, 핵심지 주택, 상위 직업, 한적한 해변 등 수량이 절대적으로 제한된 지위재(Positional Goods)로 이동한다. 지위재 가격은 오르거나 접근 경쟁이 치열해진다. 이는 ‘과두적 부(Oligarchic Wealth)’다. 남을 밀어내야만 얻을 수 있는 제로섬(Zero-sum) 경쟁 속에서 대중은 끊임없는 상대적 박탈감을 겪는다. 성장의 과실이 개인의 웰빙으로 직결되지 않는 구조다.

이 프레임을 적용하면 오늘날 선진국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정치·사회적 현상이 선명해진다. 첫째, 과거 황금시대에 대한 향수다. 청년들이 그리는 것은 단순히 공장의 복원이 아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중산층에 진입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물질적 희소성 해소의 시대, 즉 노력과 보상이 비교적 직결되던 ‘민주적 부’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다.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아파트 모습. 연합뉴스

둘째, 시스템 불공정에 대한 분노와 정치적 극단화다. 허시는 지위적 경제로 진입하면 “성장하면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약속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청년 세대는 학벌, 자산 상속 등 승자 독식 구조를 경험하며, GDP 성장이 자신들의 삶에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성 체제에 반발한다.

셋째, 지위 사다리가 막히면서 나타나는 ‘게임의 법칙’ 변경 요구다. 지위재는 수량이 한정되므로 경쟁이 과열될수록 “누가 이 자원에 접근할 자격이 있는가”에 민감해진다. 공정성 담론에 대한 극단적 집착, 이민자와 다른 계층을 배제하려는 경향, 진입 장벽을 높이려는 정치적 움직임이 나타나는 이유다. 파이를 늘릴 수 없다면 경쟁자를 줄이려는 본능이 작동한다.

한국 경제 역시 허시가 제기한 구조적 전환을 보여준다. 소득 수준이 상승하면서 사람들의 선호는 변화한다. 주요 선행 연구에서 추정한 한국 경제의 소득 탄력성을 보면, 식료품·비주류음료는 0.3~0.5, 주거 및 수도·광열은 0.4~0.7 수준에 머문다. 이는 전형적인 필수재의 특징이다. 소득이 1% 늘어도 이들 재화에 대한 수요는 그보다 훨씬 적게 증가한다.

반면 교육·사교육비는 1.2~1.6, 오락·문화·외식은 1.2~1.5, 보건·의료는 1.1~1.4로 나타난다. 소득이 늘수록 이들 부문의 소비가 소득 증가율을 상회한다. 특히 교육비의 높은 탄력성은 한국사회에서 학벌과 지위가 갖는 강한 지위재 성격을 시사한다.

주택 수요는 특정 지역에 대한 선호가 압도적으로 작용하며, 이들에 대한 소득 탄력성은 사치재·자산재 성격을 띤다. 수입 수요 역시 1.2~1.8로 추정돼 소득 증가 및 해외 서비스와 고급 소비재에 대한 의존도를 빠르게 높이는 구조를 보여준다.

수요 측면에서 파악한 한국경제의 구조는 한국사회가 이미 ‘물질적 풍요’의 시대를 지나 ‘지위재 경쟁 사회’로 진입했음을 시사한다. 명문대 입학 정원과 핵심지 주택, 희소한 사회적 지위와 기회는 공급이 한정돼 있다. 현재 체제로는 모두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 오히려 성장의 과실이 개인의 웰빙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을 증폭시키게 된다.

성장 과실이 상대적 박탈감 증폭

허시에 따르면 자유주의 시장 사회가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희소성이 ‘사회적(지위적)’이기보다 ‘물질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적 희소성이 충족된 탈산업 사회에서 청년 세대의 아노미와 정치적 번아웃, 제조업 시대 향수는 일시적 이념의 변화가 아니다. 사회의 주된 경쟁 축이 물질적 생산성에서 지위적 점유로 이동했음에도 사회적 제도와 정치적 서사가 이를 따라가지 못할 때 발생하는 구조적 균열이다.

출간 50주년을 맞은 허시의 이론은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 경제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일자리 숫자를 늘리는 것을 넘어 사교육, 부동산, 학벌 세습으로 과열된 지위재 경쟁을 완화하는 제도적 개혁 없이는 어떤 경제 성장이나 공약도 청년 세대의 좌절과 정치적 불만을 잠재우기 어렵다. 성장의 한계가 물질이 아니라 사회에 있음을 인식할 때 비로소 다음 단계의 해법이 보인다.

이제는 사회적 평등과 분배의 공정성 그리고 삶의 질과 안정성을 높이는 쪽으로 정책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교육과 주거에서 과열된 지위 경쟁을 완화하고 의료, 여가, 돌봄 같은 공공재의 질을 보편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소득이 높아질수록 사람들의 욕망이 물질에서 지위로 옮겨간다는 허시의 통찰은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 정부에 중요한 정책적 함의를 제공한다. 파이가 커질수록 사람들은 공정한 분배에 더 민감해지기 때문에 성장 정책과 분배 정책은 상호 보완적으로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서중해 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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