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쏘아올린 전력 붐, 정부가 튼 물꼬…K-전선 ‘쌍끌이 호재’

이예서 기자 2026. 10. 2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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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전선 수주 잔고 10조원 눈앞…대한전선 4조원 돌파
중국산 배제·일본 공급 제한…K전선에 열린 수출 기회
LS전선 직원이 버스덕트 시스템을 설치하고 있다. [사진=LS전선]

【투데이신문 이예서 기자】LS전선과 대한전선이 인공지능(AI)발 전력 수요 증가와 정부의 전력망 확충 정책에 힘입어 성장 기회를 넓히고 있다. 올해 상반기 기준 양사의 수주 잔고는 13조6000억원에 달한다. 여기에 미국과 유럽의 중국산 전선 배제 기조까지 맞물리면서 글로벌 전력 인프라 시장에서 입지를 넓힐 기회도 커지고 있다. 'K전선 열풍'이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AI 데이터센터 확장과 노후 전력망 교체 수요가 맞물리면서 한국산 전선을 찾는 발길이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공급 부족을 겪는 메모리 반도체만큼이나 전선이 귀해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북미·유럽·아시아에서 전력 인프라 투자가 늘면서 전선뿐 아니라 데이터센터 내부 전력 공급에 쓰이는 '버스덕트' 수요도 커지고 있다.

실제 양사의 수주 잔고에서도 이 같은 흐름이 확인된다. 상반기 기준 LS전선과 대한전선의 수주 잔고는 각각 9조5535억원, 4조629억원으로 두 회사의 합계가 13조6000억원에 이른다. 대한전선은 처음으로 수주 잔고 4조원대를 기록했으며, LS전선은 3분기 실적이 반영되면 1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AI 데이터센터 확산은 전선업계의 핵심 성장 동력으로 꼽힌다. AI 모델을 학습하고 서비스하려면 막대한 전력을 쓰는 데이터센터가 필요하고, 시설이 늘수록 전력 설비 수요도 커진다. 특히 데이터센터 내부에 전력을 공급하는 배전 설비 '버스덕트'가 주목받는다. 구리나 알루미늄 도체를 금속 케이스에 넣은 버스덕트는 일반 케이블보다 많은 전력을 안정적으로 전달해, 고성능 장비가 밀집한 AI 데이터센터에 필수적이다. 국내 업체들은 이 배전망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탈리아 프리즈미안과 프랑스 넥상스 등 유럽 주요 업체가 장거리 송전용 제품에 주력하는 것과 달리, 국내 업체들은 데이터센터 내부 배전 설비까지 사업 영역을 넓혔다. 

글로벌 경쟁 환경도 국내 업체들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이 국가 안보를 이유로 전력망에서 중국산 제품을 배제하는 기조를 강화하면서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 업체들의 시장 진입이 어려워지고 있어서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산 케이블은 가격이 저렴해도 보안·안보 문제로 배제되는 경우가 있다"며 "특히 미국이 중국산을 배제하는 기조여서 경쟁력을 갖춘 국내 업체들에 유리한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업체들도 자국 수요를 감당하느라 해외 공급을 늘리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수요는 증가하는 반면 주요 경쟁국의 공급 확대는 제한되면서 국내 업체들이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대한전선이 미국에서 케이블 포설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대한전선]

여기에 정부 정책이 힘을 보탰다. 정부는 지난 7일 한국형 녹색대전환(K-GX) 전략을 내놓고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설비용량을 100GW까지 늘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문제는 이렇게 만든 전기를 수요처까지 실어 나를 전력망이다. 송전용량을 늘리려면 신규 노선과 철탑 건설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 부지 확보와 주민 반대, 인허가에 막혀 사업이 지연되는 일이 잦았다. 

정부가 꺼내 든 해법은 기존 전력망을 활용하는 것이다. 기존 송전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해 전선을 더 많은 전기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대용량 제품으로 교체해 2030년까지 추가 송전용량을 확보하겠다는 방침이다. 실제 증용량 수준은 전선 사양과 기존 설비의 수용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아울러 정부는 재생에너지 발전단지의 전기를 수요처에 직접 공급하는 직류 송배전 산업도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전력망 장비와 케이블 수요 확대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업계와 학계에서는 이번 전략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복수의 업계 관계자는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와 전력망 고도화는 전선 산업의 수요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며 "정책이 구체화되고 사업 추진에 속도가 붙으면 해저케이블과 HVDC 케이블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업 기회가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해상풍력 확대와 에너지 고속도로 구축 등 대규모 전력 인프라 사업이 추진되면 국내 전선 기업들의 생산·기술 경쟁력을 높이고 관련 산업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경희대학교 정범진 원자력공학과 교수도 정부의 정책 방향이 전선업계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정 교수는 "정부가 추진하는 방안이 구체적으로 나오기 전이지만 전선업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인 것은 맞다"고 설명했다.

양사 모두 준비된 카드가 있다. LS전선은 전선 중심부의 강철 대신 탄소복합재를 넣어 기존보다 통상 2배가량 많은 전력을 보낼 수 있는 증용량 가공송전선 'LSCC'를 갖고 있다. 2020년에는 칠레에서 876㎞ 규모의 공급 계약을 따내며 관련 제품의 해외 공급 경험도 쌓았다. 

대한전선 역시 기존 송전망의 용량 확대에 필요한 제품과 생산 역량을 갖추고 있다. 충남 당진공장에서 초고압부터 중저압까지 다양한 가공선을 생산하며, 송전용량을 높이는 데 활용되는 증용량 저이도 가공선도 공급하고 있다. 관련 사업 실적도 확보했다. 2019년 한국전력이 발주한 경기 고양시 신덕은~수색 구간 증용량 가공선 사업에 참여해 154kV 송전선로에 적용할 탄소복합재 기반 ACCC 가공선 약 75㎞를 공급했다.

전력 인프라 투자는 장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복수의 업계 관계자는 "전력 슈퍼사이클이 최소 15년은 이어질 것"이라며 "AI 데이터센터 확산과 전력 인프라 투자 확대가 계속되고 있어 지금은 아직 초기 단계"라고 전망했다. 전선 산업은 생산설비와 원재료에 대한 투자 부담이 크고 기술 개발에도 시간이 필요한 만큼 신규 업체가 단기간에 생산 역량을 확보하기 어렵다. 이미 생산 기반과 공급 경험을 갖춘 국내 업체들이 장기 수요에 대응하는 데 유리한 이유다. 

그동안 쌓아 온 생산 기반과 공급 경험은 장기 호황에 대응할 자산이다. 정 교수는 "한국은 지속적으로 전력망을 확충해 오면서 관련 생산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며 "기존에 축적한 생산 역량을 활용해 송전 용량을 확대하는 것이 새로운 생산 기반을 구축하는 것보다 수월하다"고 말했다. AI가 촉발한 전력 수요 증가에 정부의 전력망 정책이 더해지면서, 국내 전선업계가 그동안 축적한 기술과 생산 역량을 해외 수주와 고부가가치 사업 확대로 연결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