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지나갈 테지만[고수리의 관계의 재발견]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요. 경전에 있는 유명한 말입니다. 힘든 일이거나 어려운 일이거나, 즐겁거나 기쁘거나. 그게 계속되는 게 아니라 순간이거든요. 우리 지금 힘든 거는 금방 지나갑니다. 벌써 이틀 지났잖아요. 얼마 안 남았습니다. 힘내십시오. 이겨내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기억하세요. 감사합니다."
아파트에 엘리베이터 공사가 시작됐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파트에 엘리베이터 공사가 시작됐다. 이틀째 되던 날, 관리소장의 안내방송에 웃음이 터졌다. 얼마 안 남았다니. 공사는 한 달이나 더 남았고, 그동안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그런데도 웃을 수 있었던 건 아버지뻘 관리소장의 목소리가 왠지 찡하게 다가와서였다. 평소에도 배려하자고, 힘내자고 감성적인 멘트를 준비해 읽어주곤 했다.
올해로 스물두 살 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어르신들이 많이 사는 한 동짜리 아파트는 오래됐어도 구석구석 말끔한 편인데, 워낙에 바지런하고 깐깐한 관리소장 덕분이었다. 언젠가 관리사무소에 들렀을 때, 대형 달력에 수기로 빼곡하게 적힌 일정들과 책장에 빽빽하게 채워진 파일들을 보곤 깜짝 놀랐다. 꼼꼼하기까지 한 관리소장은 무슨 안내든 주민들 눈높이에 맞춰 구구절절 자세히도 일러주었다.
공사가 시작되고 층마다 쉬어가는 의자가 놓였다. 관리소장이 인쇄한 안내문도 붙었다. 2층 ‘시작이 반 오늘도 파이팅’, 3층 ‘작심3일 통과! 우선 성공’, 4층 ‘4랑 합니다 이웃님’(사진), 이런 응원 구호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엔 ‘공사 중인 기사님들께 감사 한마디! 한 달만 버티면 새 엘리베이터! 우리 모두 파이팅!’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기를 안고 계단을 오르던 10층 엄마가 안내문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힘내라고 붙여뒀나 봐. 느낌표가 몇 개야. 하나 둘 셋…. 스무 개나 되네.” 문장마다 느낌표가 힘차게 찍혀 있었다. 으라차차 기합을 외치듯이. “기사 아저씨 저기 공사하신다.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아기가 손을 흔들자, 아저씨가 손을 슥 흔들어 주었다.
계단에서 이웃들을 마주쳤다. 의자에 앉아 쉬어가는 어르신들, 엄마 손을 붙잡고 투덜거리며 올라가는 어린이들, 성큼성큼 두 칸씩 올라가는 부러운 청소년들도. 양손에 쓰레기를 들고 내려오는 이웃과 택배를 들고 올라가는 이웃끼리 마주칠 때면, 같은 처지에 힘내자고 절로 눈인사가 오갔다.
이제 막 계단을 오를 참인지 5층 할머니가 난간을 붙잡고 서 계셨다. 터벅터벅 내려오던 내게 할머니가 말을 건넸다. “애쓰셨어요.” 이 수고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뭉클해서, 이어달리기 바통을 넘기는 사람처럼 나도 마주 보고 웃었다. “힘내세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계단을 어떻게 오르내리려나 걱정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공사 마무리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우리 지금 힘든 거는 금방 지나갑니다”라던 안내방송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 또한 지나갈 테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고생한 기억보다 격려한 기억만 두고두고 남을 것 같다. 그런 게 참 즐거웠다고. 최신식 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대도 우리는 인사를 건네지 않을까 싶다.
고수리 에세이스트
Copyright © 동아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코스피 5500선 추락했는데…與대변인 “내년 1만피 갈것”
- 동탄-영통 찍고 분당-강남으로…‘반도체 머니’ 거침없는 ‘북진’
- 文뇌물혐의 수사에…공소청장 대행 “뼈 발라내는 수사”
- 역삼동 방화범 “죽이려는게 아니라 겁주려 했다” 궤변
- “화장실 쓰게해줘 감사” 압구정역 곳곳 역장의 편지, 무슨일?
- 12층 방범창에 세살배기 대롱대롱…의자 받치며 살려낸 주민들
- 마약 집유중 음주운전 남태현, “술끊고 어렵게 직장 구해” 선처 호소
- 北 IT인력, 국내업체 위장 취업 첫 포착…개발까지 했다
- “웨딩사진 초과됐으니 140만원 더 내라” 새신부 울린 스튜디오
- 李 “중수청 지휘감독 포기하는 건 대통령 탄핵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