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의 쓰고 달콤한 경제]‘큰 정부’와 ‘자본시장’의 불화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2026. 10. 2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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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에서 보건사회부 장관을 지냈던 이형호는 1972년 11월16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인터뷰에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경제개발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사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은 태어나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회보장제도를 구축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담고 있다.

당시는 큰 정부가 시대정신이었던 시절이다. 1930년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강조됐고, 이런 흐름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케인스주의가 경제정책의 주도권을 쥐었다. 다만 국가의 역할이 커지는 만큼 비용도 컸다. 미국의 연방 개인소득세 최고세율은 1951년부터 1963년까지 90%를 넘었다. 큰 정부의 위상은 1970년대 들어 흔들렸다. 케인스주의적 처방이 스태그플레이션 앞에서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문화적 반발은 이보다 앞선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다. 비대해진 관료조직과 권위주의적 질서에 대한 반감은 ‘68운동’으로 상징되는 서구 청년들의 저항을 불러왔다.

1980년대부터는 밀턴 프리드먼으로 상징되는 시장주의 경제학이 힘을 얻었다. 감세와 규제 완화, 민영화가 새로운 시대정신이 됐다. 그러나 역사는 다시 큰 정부를 불러냈다. 지난 세기의 큰 정부가 대공황과 전쟁이라는 시장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에서 탄생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큰 정부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돌아왔다. 주요 기업들이 국유화되는가 하면, 정부가 가계와 기업에 직접 현금을 지원하는 것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이는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정부가 개입하는 과정이었지만, 정부가 돈을 쓰는 데 익숙해지는 동안 재정 규율도 느슨해졌다.

진보·보수 정부 모두 ‘씀씀이 확대’

변화는 진보 진영에 국한되지 않았다. 재정 보수주의의 상징이었던 독일 기민당은 지난해 부채제동 장치의 완화와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수용했다. 영국 보수당은 팬데믹 당시 막대한 재정으로 고용을 떠받쳤고, 미국 공화당은 감세를 추진하면서도 재정지출을 줄일 생각은 전혀 없는 듯하다. 보수의 진보화라기보다 재정 보수주의의 퇴조에 가깝다.

앞으로도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줄어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장기적인 성장 둔화와 고령화는 사회안전망의 필요성을 높인다. 경제 전체가 성장하더라도 그 과실이 고르게 돌아가지 않는 양극화 역시 국가의 역할을 요구한다. 미·중 갈등 속에서 반도체와 에너지, 핵심 광물의 공급망을 안정시키는 일도 개별 기업의 선택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과거에는 시장에 맡겼을 문제를 이제는 안보와 산업정책의 이름으로 정부가 떠안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올해 성장률은 3%를 넘어 잠재성장률을 크게 웃돌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경제지표의 온기가 가계로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부자 기업과 가난한 가계’라는 표현이 낯설지 않다.

물론 기업도 기업 나름이다. 인공지능(AI) 투자 확대의 수혜를 보는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은 기록적인 호황을 누리지만, 2025년 국내 상장 제조업체의 약 43%는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조차 충당하지 못했다.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 기업들의 약진은 세계 제조업에 위협이 되고 있다. 유럽 자동차업계는 중국 전기차와 힘겨운 경쟁을 벌이고 있고,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도 중국과의 초격차에서 ‘초’가 빠질 수 있다는 우려에 직면했다. 그렇다고 중국 내수가 호황인 것은 아니다. 올해 1~9월 중국 소매판매는 1.1% 증가하는 데 그쳤고 고정자산투자는 7.2% 감소했다. 제조기업의 성장과 부진한 내수가 공존하는 역설이다. 일본과 대만에서도 경제 전체의 성과와 가계의 체감경기 사이에 간극이 나타나고 있다.

커지는 재정, 인내심 줄어든 시장

AI가 가져올 변화는 불안을 더한다. 생산성이 개선되더라도 이익이 노동보다 자본에 더 많이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고용과 임금의 충격을 완충하고 성장의 성과를 나누기 위한 공공부문의 역할은 오히려 커질 수밖에 없다. 걱정스러운 것은 큰 정부가 필요해지는 바로 이 시점에 정부와 자본시장이 불화를 빚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러 나라에서 장기 국채금리가 급등하고 있다. 막대한 국채 발행과 재정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금리를 밀어올리고 있다.

정부가 내세우는 지출의 명분이 아무리 정당해도 채권시장은 그것만으로 낮은 금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투자자들이 가격에 반영하는 것은 결국 상환능력이다. 금리 상승은 정부의 이자 부담을 늘릴 뿐 아니라 이미 체력이 약해진 가계와 기업에도 충격을 준다. 사회적 안전망이 절실해질수록 이를 뒷받침할 재정의 조달비용이 높아지는 딜레마다.

진보적인 정부일수록, 또 국가의 역할을 중시하는 정부일수록 채권시장과 더 세심하게 소통하고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설득해야 한다. 다만 지금까지 채권시장을 설득하지 못한 정부가 앞으로 뚜렷한 묘책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중앙은행이 다시 시장 안정의 전면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 도래할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팬데믹 직후 중앙은행의 대규모 국채 매입은 금리를 낮췄다. 채권시장의 가격 형성에 대한 강력한 개입이기도 했다.

최근 영란은행은 장기 국채 매각 방식을 재편하고 양적긴축(QT)에 따른 국채 매각 경매를 일시 중단했다. 아직 국채 매입을 재개하는 양적완화(QE)로 돌아선 것은 아니지만, 시장의 압력 앞에서 긴축의 속도를 조절하는 모습이다. 물가가 불안한 상황에서 중앙은행의 국채 매입이 만능 해법일 수는 없다. 중앙은행이 국채시장을 떠받치는 동안 정부가 재정 개혁을 미루는 도덕적 해이도 경계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큰 정부의 시대와 높은 금리의 시대가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늘어나는데, 그 비용을 조달하는 시장의 인내심은 줄어들고 있다. 이것이 지금 세계경제에 드리워진 가장 불편한 그림자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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