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어화, 마지막 꽃의 소매를 놓다 [진옥섭 풍류로드]

한겨레 2026. 10. 22.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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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어디 가시는 걸음인가. 분홍 가방 하나 들고 가다 문득 돌아보는 품이 갈 길 바쁜 사람이다.

2013년 '해어화'는 군산의 장금도, 동래의 유금선, 대구의 권명화를 한 무대에 모신 공연이었다. 해어화, 말을 알아듣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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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_명무 권명화 ②
어디에 또 판이 섰기에 그리 걸음이 바쁘신가. 2013년 ‘해어화’ 공연을 앞둔 무렵, 분홍 가방을 들고 문득 돌아보는 권명화. 이제는 먼 길 떠나는 뒷모습으로 보인다. 대구광역시 무형유산 살풀이춤 보유자. 지난 9월2일 별세, 향년 92. 이한구 작가 제공

어허, 어디 가시는 걸음인가. 분홍 가방 하나 들고 가다 문득 돌아보는 품이 갈 길 바쁜 사람이다. 어디에 또 판이 섰기에 그리 서두르시는가. 9월3일, 대구의 상가에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다 사진 한 장에 눈길이 멎었다. 2013년 ‘해어화’ 공연 때 이한구 작가가 찍은 권명화(1934~2026)다. 그때는 이쪽을 보는 모습이었는데, 이제는 먼 길 가는 뒷모습으로 보인다.

옛 예인들은 “이제는 저승 프로가 더 재미있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명창도 명무도 하나둘 이승을 떠나 그쪽으로 갔으니 말이다. 행여 그 판에 늦을세라 서두르시는가. 사진 속 선생은 몸은 저만치 가면서 얼굴만 이쪽으로 돌렸다. 살아서도 그랬다. 한 판을 마치기 전 다음 판을 궁리했고, 오늘보다 내일 일이 중했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호떡집에 불난 듯이” 바빴다.

9월2일 초상이 났다. 이튿날 찾은 빈소에서는 제자들이 울었다. 누군가는 매서운 호통을 떠올렸고, 누군가는 장구를 치며 “나니나…” 하던 구음을 그리워했다. 울음 사이로 생전의 권명화가 돌아왔다. 한번 마음먹으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사람. 경북국악원에서 박지홍(1889~1958)에게 춤과 소리를 배우던 시절도 그랬다. 춤에서는 거칠 것이 없었으나 소리만 하면 목이 쉬었다. 남에게 지고는 못 사는 성미라 스승에게 비방을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옛 명창들은 똥물을 마시고 목을 틔웠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해우소에 대나무 대롱을 찔러 넣어 고인 물을 마시고 악을 질렀다. 열흘 가까이 그 짓을 했다. 목이 트이기는커녕 온몸이 퉁퉁 부었다. 놀란 스승이 병원으로 데려가 거금을 썼다. 독은 가라앉았지만, 똥물 마신 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훗날 팔순이 다 되어서도 장구를 치며 구음을 하는데 목이 갈라지는 법이 없었다. 그 독한 물이 약이 되었던가.

장구를 치며 구음하는 권명화. 젊은 날 목을 틔우려 똥물을 마셨다가 온몸에 독이 올랐으나, 여든을 넘겨서도 하루 종일 소리해도 목이 쉬지 않았다. 그 독한 물이 약이 되었던가. 이제 그 구성진 구음을 어디서 다시 들으랴. 이한구 작가 제공

춤은 일찌감치 이름을 얻었다. 대구극장 경연대회에서 상을 받은 뒤로 무대가 이어졌다. 1953년에는 임시 국립극장이 된 대구 문화극장에서 승무를 추었다. 훗날 중앙의 문화계 원로들이 그를 박지홍의 춤 제자로 기억하게 된 중요한 무대였다. 1955년부터는 박지홍의 조교가 되어 입춤, 살풀이춤, 승무, 검무를 가르쳤다. 명인 박지홍이 있는 경북국악원은 예인들의 오아시스였다. 전쟁통에는 피란 온 김백봉(1927~2023) 같은 무용가가 춤을 배워갔다. 전후에는 떠도는 예인과 공연단체들이 쉬어갔다.

1957년 무렵 명고수 김득수가 국극단을 이끌고 대구극장에 공연을 왔다가 인사차 박지홍을 찾았다. 끼가 들썩거리던 권명화는 동료 두 명과 함께 국극단을 따라 천안으로 떠났다. 방방곡곡 면면촌촌을 부평초처럼 떠도는 일이었다. 그 가망 없는 생활을 접고 돌아왔을 때 박지홍은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재간 있는 제자가 돌아왔으니, 속으로는 기뻤을 것이다.

1958년 8월, 제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가 대통령상을 받았다. 경북국악원의 예인들이 총출연한 판이었고, 이를 이끈 박지홍은 공로상을 받았다. 그러나 영광은 짧았다. 그달 26일 수상기념공연을 연습하다 장구를 치던 박지홍이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소리와 춤으로 일세를 풍미한 명인이 제 장단을 채 마치지 못하고 간 것이다. 2000년 무렵 나는 그 경연대회의 영상을 찾아냈다. 당시 하회별신굿탈놀이의 ‘부네탈’을 썼던 제자 최희선(1929~2010)에게 보여주니, 깃발을 흔드는 이가 박지홍이라 했다. 자료조차 변변치 않던 명인이 필름 속에 살아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스승의 춤 제자 권명화가 그 중요한 판에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였을까. 그 해묵은 의문이 이번 상가에서 풀렸다. 둘째 아들의 생일을 물으니 1958년 8월16일이란다. 경연대회가 한창이던 때였다. 스승은 서울에서 깃발을 흔들고 제자는 대구에서 아이를 낳고 있었다. 열흘 뒤 스승이 세상을 떴다. 스승의 마지막 영광과 제자의 출산이 한 달력 안에 겹쳐 있었다.

1960년 진골목에 무용학원을 열었고, 1962년에는 서울로 올라가 학원을 운영했다. 어느 날 대구의 유지들이 상경해 귀향을 간청했다. 박지홍이 없는 대구에서 전통춤의 맥을 지킬 사람은 당신뿐이라는 것이었다. 1964년 약전골목에 다시 학원을 열자,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본래 병원이던 건물이라 방이 많았다. 예전 경북국악원이 그랬듯 대구를 지나는 예인들이 찾아들었다. 방마다 명인들이 묵어가며 소리나 춤 한 가락씩 남기고 갔다.

상가에서 만난 전 계명대학교 교수 장유경도 일곱 살부터 그 학원에서 춤을 배웠다. 예전에 내게 보여준 사진들이 떠올랐다. 1968년 중앙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 무용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은 ‘농촌 풍경’, 그리고 북춤, 도라지춤, 입춤, 수건춤이 흑백사진 속에 있었다. 학부모의 치맛바람과 스팽글 번쩍이는 깔깔이 의상들.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고전무용학원은 전통예술의 피신처였다. 훗날 명인이 된 연주자들이 머물렀고, 오늘의 무용가들이 걸음마를 뗐다. 권명화는 몇 차례 학원을 옮기면서도 대구를 지켰다. 자신의 춤을 보태면서도 원래 춤의 무게감을 잃지 않았다. 1995년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9호 살풀이춤 보유자가 되었다.

2013년 엘지(LG)아트센터 ‘해어화’(解語花)에서 소고춤을 추는 권명화. 승무의 긴 소매로 허공을 가르고 법고로 천둥을 울리더니, 소고 하나 들고 객석에 신바람을 일으켰다. 팔순을 앞둔 춤꾼에게 쏟아지던 그 박수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이한구 작가 제공

휴대전화 속 사진을 다시 들여다본다. 2013년 ‘해어화’는 군산의 장금도, 동래의 유금선, 대구의 권명화를 한 무대에 모신 공연이었다. 해어화, 말을 알아듣는 꽃. 당나라 현종이 연꽃 핀 연못가에서 양귀비를 가리키며 한 말이라 전한다. 활짝 핀 연꽃도 말을 알아듣는 이 꽃만은 못하다는 것이다. 후대에는 기녀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그해 엘지(LG)아트센터에서 세 송이 꽃이 피었다. 장금도의 민살풀이춤은 실오라기 같은 선을 허공에 풀어놓았고, 유금선은 동래학춤의 구음을 마치고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열창했다. 권명화의 승무는 긴 소매로 허공을 갈랐고, 법고를 치자 북소리가 날벼락처럼 떨어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덤으로 추어낸 소고춤이 객석에 신바람을 일으켰다. 박수는 무대를 기록하는 최고의 붓이란 생각이다. 그 열광적인 박수와 함께 공연실황을 디브이디(DVD) 3장에 담아 ‘해어화’로 펴냈다.

이듬해 유금선이 떠났고, 2019년에는 장금도마저 떠나 권명화만 남았다. 그해 서울 남산국악당에서 ‘몌별(袂別) 해어화’라는 판을 꾸몄다. 몌별이란 서로 소매를 잡고 작별한다는 뜻으로 먼저 간 두 분을 추모하는 공연이었다. 권명화는 소고춤을 추다 느닷없이 나를 무대로 끌어냈다. 마다할 수 없지 않은가, 사회자 마이크를 든 채 끌려나갔다. 그날의 장단이 아직도 내 몸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때는 선생이 내 소매를 잡았는데 이제는 내가 선생의 소매를 붙들고 싶다.

2019년 서울 남산국악당 ‘몌별(袂別) 해어화’ 공연. 소고춤을 추던 권명화가 느닷없이 필자를 무대로 끌어냈다. 선생의 신명에 마이크를 든 채 끌려나가 소매를 맞대고 춤을 추었다. 그날의 장단이 아직도 내 몸 어딘가에 남아 있다. 이한구 작가 제공

어느덧 밤이 깊었다. 장례식장을 나와 서울행 열차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마음이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내 초상에서는 한판 안 노는 것이야.” 선생이 호통치는 것 같았다. 장금도가 떠났을 때도, 유금선이 떠났을 때도 초상에서 한판 놀았다. 하물며 대구에서 그냥 간단 말인가. 대구역 직전에 차를 돌렸다. 다시 빈소로 돌아가 선생의 음악을 틀었다. 유족과 제자들이 모여 살풀이춤을 추고 소고를 들었다. 영정 앞에 한판이 벌어졌다. 울음이 장단을 타고, 장단이 울음을 달랬다.

9월4일 새벽 발인 때, 눈물마저 바닥난 딸 조은희가 있었다. 텅 빈 사람 같았다. 어머니를 보내는 딸이자 대구광역시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살풀이춤을 이어갈 전승교육사였다. 박지홍이 떠난 자리를 권명화가 지켰듯, 권명화가 떠난 자리에는 조은희가 남았다. 어머니가 평생 지고 온 춤이 이제 딸의 몫이자 임무였다. 나는 선생이 “그 속에 뭐가 있단 말이다” 하고 버럭 소리치며 딸을 험하게 조련하던 장면을 보았다. 팔을 한 번 들었을 때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허투루 흘러가는 몸짓을 그냥 두지 않던 선생의 호통. 딸과 제자들은 그 말을 먹줄 삼아 춤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사진 속 선생은 여전히 이쪽을 돌아보고 계신다. 잘 가시라, 선생. 소매는 여기서 놓겠습니다.

진옥섭 |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졌고, 서울의 굿을 발굴하면서 ‘무(巫)’를 만났다. 기생, 무당, 광대, 한량을 찾아 ‘남무(男舞)’, ‘여무(女舞)’,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렸다. 마침내 ‘무(無)’를 깨닫고,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다. 국가유산진흥원 이사장을 역임하고,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일했다. 현재 ‘사서삼통’, 4일은 서울 3일은 통영에 있으며, 무대와 마당 사이의 문화판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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