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광주 정원 재발견]⑨ 고흥 장수호 힐링정원: ‘천만 송이 들국화’가 건네는 소박한 위로

박정석 기자 2026. 10. 22.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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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고흥읍 내다보는 탁 트인 전망
2㎞ 나선형 길 따라 들국화 향기 물씬
도종환 시인 감성 담긴 접시꽃 최대 군락
개간석으로 쌓은 돌탑과 그네·외줄타기
동심 자극하는 산책로…매년 2만 명 매료
노란 국화와 연보랏빛 쑥부쟁이로 뒤덮인 장수호 힐링정원의 10월 하순 전경. /장수호 힐링정원 제공
정원은 화려하게 가꿔진 인공의 구조물이 아니라, 그 땅의 내력과 가꾸는 이의 삶이 켜켜이 쌓여 완성되는 '살아있는 자서전'이다. 남도일보는 전남광주 지역의 아름다운 정원을 조명하는 '정원 재발견' 시리즈의 아홉 번째 여정으로 고흥반도의 정기가 이어지는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고흥군 고흥읍 호형리로 향한다. 농촌 지도자로서 평생을 바친 백의영 대표가 황무지 야산을 개간해 일궈낸 전라남도 제7호 민간정원 '장수호 힐링정원'의 이야기다. 대규모 예산이 투입된 관 주도의 거대한 꽃단지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한 사람의 손끝에서 피어난 야생화와 땀방울이 어우러진 정원은 바쁜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소박한 낭만과 따스한 휴식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백 대표의 20년 노고와 세월을 품은 수목, 대가 없이 대중을 품어내는 정원의 온기를 현장에서 찾아본다.
새하얀 들국화가 만개한 장수호 힐링정원의 모습. /장수호 힐링정원 제공

◇대통령상이 틔운 국화 싹…황무지서 일군 기적

고흥읍 소재지에서 차로 5분 남짓 달려 장수저수지 인근에 다다르면, 나선형으로 부드럽게 감아 올라가는 3만 2천㎡(약 1만 평) 규모의 산자락 정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사계절 내내 피어나는 초화류와 울창한 수목이 어우러진 '장수호 힐링정원'(호형리 734-1)이다.

이곳은 본래 돌과 잡목이 무성해 농사조차 짓기 어렵던 버려진 황무지였다. 정원주 백의영(76) 대표는 1970년대 초 서울에서 고향 고흥으로 돌아와 마을 이장과 새마을 지도자, 농촌지도자 연합회장 등을 거치며 평생을 농촌 운동에 헌신했다. 1980년대 초 부모님과 자신을 위해 마련한 이 묵은 땅은 초기에는 밤나무나 뽕나무를 심고 고구마를 재배하던 소박한 밭이었다.

정원 조성의 전기가 마련된 것은 2005년이었다. 백 대표가 농촌 활성화 공로로 노무현 대통령 표창(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내려온 상금 중 1천500만 원을 지원받아 야산에 들국화를 심기 시작한 것이 정원의 소중한 첫 씨앗이 됐다.
새하얀 들국화 꽃잎이 바람을 타고 흩날리고 있다. /장수호 힐링정원 제공

백 대표는 "임신한 아내와 함께 손수 돌을 골라내며 참깨와 고구마를 심던 한 많은 땅이었다"며 "개인적 욕심을 버리고 농촌을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국화 식재가 지금의 천만 송이 꽃 정원으로 결실을 맺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꾸준히 정원을 가꿔온 그는 2018년 12월 전라남도 제7호 민간정원으로 공식 등록되는 결실을 맺었다. 이어 2019년에는 농협중앙회 '아름다운 농촌 가꾸기' 전국 은상 시상금 1천500만 원을 보태 수국 단지를 확장하는 등 끊임없는 정성을 쏟아붓고 있다.
국화밭 사이로 자연석을 이용해 쌓은 돌탑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해당 돌탑은 정원주 백의영 대표가 정원을 조성하기 위해 야산의 황무지를 개간하는 과정에서 나온 돌들을 버리지 않고 탑을 만드는 데 사용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장수호 힐링정원 제공

◇70여 개 소원돌탑…"자연에 새겨진 정성"

장수호 힐링정원의 산책로는 여타 정원처럼 가파르거나 직선으로 지르지 않는다. 완만하게 왕래할 수 있도록 조성된 2㎞ 길이의 나선형 탐방로는 걸음마다 다채로운 시각적 풍광을 선사한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산자락 곳곳에 우뚝 서 있는 70여 개의 돌탑이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돌탑들은 외부에서 들여온 외지 석재가 아니다. 백 대표가 수십 년간 밭을 개간하고 정원 길을 닦으며 나온 자연석을 버리지 않고 손수 하나하나 쌓아 올린 세월의 기록이다.

백 대표는 "산에서 나온 돌을 버리기 아까워 탑을 쌓기 시작했는데, 정원을 찾는 이들의 평안과 성공을 바라는 정성이 모여 신비로운 풍경이 됐다"고 설명했다.
정원으로 들어서는 초입에는 수십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소나무들이 방문객을 반긴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제공

탐방로를 걷다 만나게 되는 쉼터 벤치들은 단순한 휴식처를 넘어 근사한 전망대 역할을 해낸다. 벤치에 가만히 앉아 숨을 고르면 건너편 봉황산의 수려한 능선과 햇살에 반짝이는 장수저수지의 물빛 풍광이 한눈에 들어와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든다.

더불어 탐방로를 따라 조성된 35년생 황칠나무 500여 그루의 숲길에서는 '나무 인삼'이라 불리는 황칠나무와 측백나무가 뿜어내는 천연 안식향(安息香)이 상쾌한 바람과 어우러져 산책객의 심신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

정원 정상부의 소나무 숲에 들어서면 탁 트인 시야 너머로 고흥읍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관이 펼쳐진다. 2016년 국토교통부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됐을 만큼 탁월한 조망권을 자랑한다.
노란 에키네시아와 희고 붉은빛으로 어우러진 접시꽃이 초여름의 정원을 다채롭게 물들이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제공
에키네시아와 접시꽃이 만개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제공

◇국내 최대 접시꽃 군락지…사계절 피어나는 야생화의 향연

장수호 힐링정원은 가을철 '천만 송이 들국화' 명소로 유명하지만, 봄부터 초여름까지도 화려한 꽃의 대궐을 이룬다. 특히 5월과 6월이 되면 도종환 시인의 시로 잘 알려진 접시꽃이 정원 일대를 수놓는데, 단일 군락지로는 국내 최대 규모인 1천650㎡(500평 이상) 부지에 형형색색의 접시꽃과 함께 수국, 철쭉이 만개하며 장관을 연출한다.

가을이 깊어지는 10월 하순에 이르면 3.2㏊ 부지에 구절초, 쑥부쟁이, 옥국 등 수많은 들국화가 노랗고 하얗게 피어나 진한 향기를 내뿜는다. 계절에 따라 자리를 바꾸는 초화류 관리와 풀 매기 작업은 매일 아침저녁 백 대표의 땀방울로 이뤄진다.
접시꽃이 만개한 6월 장수호 힐링정원의 모습.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제공

다만, 백 대표는 민간정원이 가진 가장 큰 숙제로 관리비와 경제적 부담을 꼽았다. 지자체의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공공 정원과 달리, 사비와 가족들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민간정원은 매년 식재 교체와 인건비 부담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백 대표 역시 읍 소재지에서 개인 사업체를 운영하는 아내의 도움을 받아 정원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무인 입장료 함을 설치했을 뿐, 조례로 보장된 입장료를 강제하지 않고 무료에 가깝게 개방하는 소신을 오랜 기간 고수하고 있다.
장수호 힐링정원을 찾은 어린이들이 국화밭 사이에서 자연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장수호 힐링정원 제공

◇'사람을 모이게 하는 정원'…지역 상생과 힐링

장수호 힐링정원에는 매년 가을 들국화 축제 기간에만 2만여 명, 연간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고흥읍 초·중·고등학교와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 지역 학생들과 주민들에게는 일상 속 소중한 안식처가 되고 있다.

산책로 한쪽에는 손주들을 위해 만들었던 잔디 썰매장과 그네, 외줄 타기 시설과 파크 골프 연습장이 놓여 있어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백 대표는 "정원은 나비와 벌뿐만 아니라 사람을 끌어모으는 힘이 있다"며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지친 고흥 지역에 다녀가는 관람객들이 늘어나 지역 경제에 작은 온기라도 보탬이 되길 바라는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정원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따뜻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는 "지자체에서 수십억 원을 들여 만든 거대한 꽃단지와 비교하면 민간정원은 화려함이 떨어질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차를 타고 휙 둘러보고 지나치기보다, 걸어 올라오며 나무 하나, 돌탑 하나에 들어간 정원주의 노고와 땀방울을 마음으로 느끼며 편안한 힐링을 얻어가셨으면 한다"고 전했다.

지리산 자락에서 고흥반도로 이어지는 남도의 정원 연재 속에서, 장수호 힐링정원은 흙을 일군 한 농부의 집념이 어떻게 지역사회를 보듬는 따뜻한 공공의 안식처가 될 수 있는지를 정갈하게 증명해 보이고 있다.

/박정석 기자 pjs@namdonews.com <공동기획=남도일보·한국언론진흥재단>
 
장수호 힐링정원 백의영 대표. /박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