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는 줄줄 외면서 정작 우리 역사는 모른다"는 김부식의 한탄

하응백 작가 2026. 10. 2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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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응백 작가 특별기고 | 역사소설 『사국지』를 집필한 소설가 하응백은 독자들과 함께 삼국통일전쟁의 격전지 산성을 찾아가는 답사 여행을 하고 있다. 1차로 지난 봄 임진강과 한탄강 인근의 호로고루성, 매소성(대전리 산성)을 답사한데 이어, 2차로 지난 18일 40여 명의 독자와 함께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을 찾았다.

이후 신라는 소지마립간 때인 486년 일선군(선산군)의 장정 3천 명을 징발하여 삼년산성을 개축했다. 이때 신라가 소백산맥 넘어 교두보로 활용한 곳이 바로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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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전쟁, 격전의 현장을 가다] 보은 삼년산성
당나라 사신 왕문도가 태종무열왕 김춘추에게
'황제 조서 전해주다 급서한 곳' 삼국사기 명기
소설가 하응백씨가 지난 18일 충북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에서 답사객들에게 산성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하응백 작가 제공

| 하응백 작가 특별기고 | 역사소설 『사국지』를 집필한 소설가 하응백은 독자들과 함께 삼국통일전쟁의 격전지 산성을 찾아가는 답사 여행을 하고 있다. 1차로 지난 봄 임진강과 한탄강 인근의 호로고루성, 매소성(대전리 산성)을 답사한데 이어, 2차로 지난 18일 40여 명의 독자와 함께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을 찾았다.  『사국지』의 작가 하응백은 그날 현장에서 강연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이 글을 본지에 기고했다. 독자 여러분들의 일독을 바란다. [편집자 주]        

삼년산성의 전략적 위치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470년 자비마립간 때 삼년산성을 쌓았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475년 한성백제가 망하기 5년 전의 시점이다. 이후 신라는 소지마립간 때인 486년 일선군(선산군)의 장정 3천 명을 징발하여 삼년산성을 개축했다. 
 백두대간의 경상도 부분(편의상 소백산맥이라 한다)은 삼국시대 신라에게 천혜의 자연 방어선 역할을 했다. 고구려가 5세기 전성기 때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북도 영주시 일대를 장악한 적이 있지만, 신라는 6세기 초반까지 대체적으로 위로는 소백산맥과 아래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영토를 보전했다.      
 반대로 6세기 초반 이후 신라의 영토 확장기에 이르면 소백산맥은 군사 이동과 물자 수송의 걸림돌이 된다. 신라의 중원 진출은 신라의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일이기도 했다. 이때 신라가 소백산맥 넘어 교두보로 활용한 곳이 바로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이다.
 왜 하필 삼년산성인가? 경상도에서 중부지방으로 통하는 길은 죽령, 조령(문경 새재) 등 여러 곳이 있다. 이를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이 표에서 보듯이 화령재와 추풍령이 가장 고개를 넘기가 쉽다. 20세기 들어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도로가 추풍령을 통과한 이유도 바로 해발고도가 낮기 때문이라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신라는 왜 추풍령을 두고 화령재를 넘어 보은으로 먼저 진출했을까? 다음 표를 표자.  

상주에서 보은으로 이르는 길을 보면 상주 인근에서 넘는 화령재가 가장 높고 화령재 서쪽의 상주 화서면 일대는 행정구역상 경상북도이지만, 지형과 수계로 보면 이미 '충청도 권역'에  속한다. 신라군은 아군 지역인 화령재(해발 약 320m)를 지나면, 화서 고원(200m대)에서 보은 분지(약 160m)까지는 큰 고개 없이 보청천을 따라 서서히 내려가게 된다. 또한 보은은 청주로 진출하기에도 영동과 옥천을 경유해야 하는 추풍령보다 용이하다. 
 이런 지형상의 이점으로 인해 보은 지역은 신라가 중원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에 매우 편리했다. 한편으로 보은은 옥천과 함께 낙동강, 금강, 한강 수계와 다 가까운 한반도의 중심 지역에 해당한다. 때문에 보은은 신라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전략상의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삼국통일전쟁의 돌발 변수
 실제로 신라는 삼국통일전쟁의 초입에서 백제를 공격할 때 이 삼년산성을 왕이 머물면서 전장을 지휘하는 행궁으로 사용했다.
 당시 신라군의 동향을 살펴보자. 660년 김춘추, 김유신 등의 전쟁 지휘부는 5월 26일 서라벌을 출발해 6월 18일 경기도 이천에 도착하였다. 주력군은 다시 남하를 시작하여 5만 대군을 이끄는 김유신은 황산벌로 진격했다. 이런 일정을 보면 김춘추는 삼년산성에서 김유신에게 전군의 지휘권을 내어주고 승전을 독려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장면을 상상하면서 소설 『사국지』에서 이렇게 썼다.

 "춘추는 삼년산성 남문 보루에 올랐다. 남으로 행군을 시작하는 유신의 원정군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보무당당한 군사들이 끝도 없이 줄줄이 남으로 남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춘추는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남은 삶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자신이 죽기 전에 필생의 업으로 이루고자 했던 일이었다. 필부의 삶이 아니라 신라의 왕이었기에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의자왕이 아니면 자신이, 둘 중의 하나는 누가 해도 해야 할 일이었다. 춘추가 조금 더 빨랐을 뿐이었다."
충북 보은 삼년산성. 하응백 작가 제공

백제와의 격전이 치러지는 동안 왕 김춘추는 삼년산성 동남쪽에 있는 금돌성(今突城)에 안전하게 있으면서 전장을 지휘하다가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한 다음인 7월 29일 사비성으로 거둥한다. 이어 8월 2일 당나라 소정방과 함께 승전 의식을 치른 다음 김춘추는 8월 15일 이전에 재빨리 삼년산성으로 복귀한다. 당나라군이 김춘추마저 포로로 삼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삼년산성이 역사 기록의 무대에 화려하게 나타나는 건 바로 이 다음의 일이다. 소정방이 당나라로 돌아간 다음, 후임으로 웅진도독에 임명된 왕문도(王文度)가 9월 28일 삼년산성에 왔다. 『삼국사기』는 이날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당 황제가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보냈다. 28일 왕문도가 삼년산성에 이르러 조서를 전했다. 문도는 동쪽을 향해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해 섰다. 황제의 명을 전한 뒤 문도가 하사품을 왕에게 주려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곧 죽었다.(唐皇帝遣左衛中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二十八日, 至三年山城傳詔. 文度面東立, 大王面西立. 錫命後, 文度欲以宣物授王, 忽疾作便死.)"

 이 기록의 행간을 자세히 읽어야 한다. 웅진 도독 왕문도는 당나라 황제의 조서를 신라왕 김춘추에게 주었다. 이때 어느 위치에 서야 하겠는가? 아마도 군주남면(君主南面), 신하북면(臣下北面) 원칙에 따라, 북쪽에 위치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왕문도는 황제의 대리인이었기에 얼마든지 가능한 말이다. 그러나 김유신을 비롯한 수많은 신라군이 운집한 가운데 후일 태종 무열왕에 추존된 김춘추는 그 위치를 거절했을 공산이 크다. 황제는 북쪽에 있다 치고, 같은 신하끼리의 서열을 따지면 김춘추가 왕문도보다 위다. 따라서 춘추가 동쪽에 서고, 문도는 서쪽에 서야 한다. 결국 신라 측 주장이 이겼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삼국사기』에서 이례적으로 두 사람의 방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가 참고한 신라 측 기록이 원본일 텐데(왕문도의 자세한 사망 경위에 대해서 당나라 기록은 없다.) 방위에 집착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  
 옥신각신 다툼이 있었으나, 삼년산성이라는 입지와 군사의 위용을 갖춘 신라 측이 입장이 반영되어 신라 측의 주장대로 왕문도는 서쪽에 서서 황제의 조서를 전했다. 이어 하사품을 주려다가 쓰러졌다. 그리고 죽었다. 급사(急死)다. 화가 나서 혈압이 급박하게 올랐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렇게 소설을 썼다면, 독자들은 '황당하다', '개연성이 없다'라고 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답사객들이 삼년산성을 둘러보고 있다. 하응백 작가 제공
가을날의 삼년산성 
 그로부터 1366년이 지나 일군의 답사객이 삼년산성을 찾았다. 가을하늘은 청명했고, 삼년산성은 천년도 넘는 고요를 간직한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삼년산성은 우리나라 산성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잘 보존이 되고, 새롭게 축성이 되어, 비록 고증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하나, 660년 당시의 위용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답사객들은 서문에서 성벽을 따라 남문을 경유 북문에서 내려와 안내자의 강의를 듣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역사를 되새김질한다.
하응백 작가가 지난 18일 충북 보은 삼년산성에서 강연하고 있다. 하응백 작가 제공

 "나는 돌 틈에 손을 얹어 본다. 차갑고, 단단하고, 어떤 것은 따뜻하다. 천 년을 건너 넘어온 것은 승패가 아니라 돌을 날랐던 이름 없는 손들의 온기였다."(권승희)
 "아름답게 흔들리던 잎새들 사이로 차곡차곡 기립해, 1600년의 역사를 지켜온 돌무더기의 체온이 긴 세월을 넘어 내게 닿았다."(미경록)
 "마침내 나는 천년 저쪽 사람들과 연통이 닿았고 소통했다. 숱한 갑남을녀의 한숨과 김춘추 김유신과 같은 영웅들의 웅대한 포부를, 고난을, 두려움을 이해할 것 같았다."(김응규)

  『삼국지』는 줄줄 외고, 중국 『삼국지』 역사 기행을 하면서도, 우리나라 삼년산성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천 년 전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천년 앞을 내다보며 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지.

 "진·한 이래 역대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두루 통하여 자세히 말하는 이가 있으나, 정작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도리어 아득하여 그 처음과 끝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한탄스럽구나!(秦漢歷代之史,或有淹通而詳說之者;至於吾邦之事,却茫然不知其始末,甚可歎也!)" 
                                             하응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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