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선박 위에 굴뚝·날개가?…“한 세기 만에 돌아온 ‘돛’입니다”[경제밥도둑]

드넓은 바다 위, 흰 돛이 바람을 받아 부풀어 오른다. 갑판 위 선원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밧줄을 당겨 돛의 방향을 조정한다. 항해의 낭만 하면 떠오르는 풍경이지만, 돛이 거대한 상선을 움직이던 것은 한 세기 전의 얘기다. 산업혁명 이후 증기기관과 내연기관이 돛을 밀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취를 감췄던 돛이 최근 벌크·유조선 등 대형 상선 갑판 위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묘안을 찾던 조선·해운업계가 100여 년 전의 돛까지 다시 불러낸 것이다. 다만 21세기의 돛은 직물이 아니라 거대한 굴뚝과 날개 모양의 기계 장치다.
돛이 돌아오고 있다. 국제풍력선박협회(IWSA)에 따르면, 현대식 돛이라고 할 수 있는 ‘풍력보조추진장치(WAPS)’를 장착한 대형 상선은 100척을 넘어섰다. 글로벌 상선 전체 규모에 비하면 아직 ‘한 줌’이지만, 성장세는 매서울 것으로 전망된다. 네덜란드 연구기관 CE 델프트에 따르면 2030년 이 장치는 벌크·유조선을 중심으로 최대 1만700척에 장착될 것으로 추산된다. 현대식 돛 시장이 2050년대 연간 3조5000억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영국 교통부 ‘청정해양계획’ 보고서)도 나온다.
글로벌 해운·조선사들도 뛰어들고 있다. 일본 미쓰이상선(MOL)이 풍력보조추진장치를 도입한 데 이어 세계적인 컨테이너 해운사 머스크(Maersk)도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 국내 해운사 HMM도 ‘돛 단 유조선’을 운항 중이다. HD현대중공업,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 국내 조선사들도 풍력보조추진장치 개발과 이를 적용한 선박 설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실험 삼아 달았는데…도움이 되네
현대식 돛이 등장한 이유는 탄소배출 저감 효과 때문이다. 대다수 대형 선박은 원유를 정제하고 남은 찌꺼기 기름인 벙커C유 등 값싼 중질유를 하루에 수십~수백t씩 태우며 바다를 건넌다. 이 때문에 글로벌 해운업계가 내뿜는 온실가스는 연간 약 10억t에 이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해운업계에도 탄소 저감 규제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2050년 해운업 탄소 중립을 목표로 내걸고 온실가스 배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선박에는 설비, 운항을 바꾸는 개선 계획을 제출케 하고 있다. 유럽연합도 2024년 해운 부문을 탄소배출권 거래제(ETS)에 편입시켜 탄소 배출량에 따라 선사들이 비용을 부담하도록 하고 있다. 탄소를 줄이지 못하면 운항 비용 부담이 갈수록 커지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업계는 공짜 동력원인 바람의 힘을 빌려 연료 소비를 조금이라도 줄일 방법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특히 해운사 머스크탱커스의 2018년 ‘실험’이 현대식 돛의 연료 절감 효과를 입증했다. 유조선 갑판에 높이 30m짜리 원통형 돛 2개를 달고 1년간 운항해 봤더니 연료 소비가 8.2% 줄어든 것이다. 이후 다양한 돛 설계와 풍력 활용 최적화 기술이 발전하면서 효율은 더 높아졌다. 국제풍력선박협회는 풍력보조추진장치가 연료소비를 5~20%, 선박설계와 항로를 최적화했을 때는 최대 30%까지 줄여주는 것으로 본다. CE 델프트는 현대식 돛이 확산할 경우 2030년 연간 탄소 감축량이 최대 750만t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첨단 기계공학으로 무장한 현대식 돛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날개형과 굴뚝형이다. ‘윙세일’로 불리는 날개형은 날개 양면 압력 차에 의해 발생하는 양력을 이용해 추진력을 얻는다. 비행기 날개에 적용된 베르누이 원리다. 윙세일을 변형한 유형도 있다. 날개 표면에 구멍을 뚫어 공기를 빨아들여 양력을 몇 배로 키우는 ‘석션 윙세일’이다. 굴뚝형인 ‘로터세일’은 전기 모터로 회전하는 기계 장치가 바람과 만나 생겨나는 압력 차이, 즉 ‘마그누스 효과’를 이용한다. 그 밖에 ‘연(카이트)형’도 있는데, 굴뚝이나 날개를 세우는 게 아니라 뱃머리에 패러글라이더 모양의 연 형태 돛을 달아 상공에 띄우는 방식이다. 현대식 돛은 전반적으로 바람의 방향, 강도를 파악해 최적의 각도를 찾고 돛을 펼쳤다 접었다 하거나 적절하게 회전시키는 자동조절 기능을 갖췄다.
LNG선에까지 진출한 현대식 돛
한국의 조선업계에선 LNG운반선에 현대식 돛을 장착하려는 시도가 한창이다. HD현대중공업은 일본 미쓰이상선이 개발한 풍력보조추진시스템 ‘윈드 챌린저(윙세일)’를 적용한 LNG운반선 설계에 대해 최근 로이드선급(LR)으로부터 설계 적합성을 인정받았다. 통상 선미 쪽에 배치되던 선원 거주구를 배 앞쪽으로 옮겨 선박 중앙부부터 선미까지 갑판 공간을 확보하고, 이곳에 현대식 돛 4개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HD현대 계열의 HD한국조선해양이 독자 개발한 ‘윙세일’은 HMM의 5만t급 유조선에 장착돼 실제 바닷길을 누비고 있다.

한화오션 역시 자체 개발한 복합소재 원통형 돛 ‘로터세일’에 대해 2024년 노르웨이 선급(DNV)으로부터 설계 인증을 받았다. 한화오션은 지난 3월 사업보고서를 통해 이 로터세일의 시제품을 제작하고 성능평가, 공인 실증센터 구축 등을 추진할 계획임을 밝혔다. 삼성중공업도 윙세일을 적용한 LNG운반선 설계에 대해 기본설계 승인을 받은 데 이어 핀란드 해양 소프트웨어 기업 나파(NAPA)와 손잡고 기상 조건에 따라 항로와 속도를 최적화하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다만 현대식 돛이 업계의 ‘바람’대로 확산되기 위해선 해결해야 할 과제도 있다. ‘가성비’다. 조선업계의 한 관계자는 “선주들은 보수적이라 풍력보조추진장치를 통한 ‘비용절감’ 데이터들이 쌓일 때까지 기다리는 경향이 있다”면서 “아직은 5~20%로 연료절감 수준이 들쭉날쭉한데 ‘10%를 무조건 넘긴다’와 같이 확실한 효과가 보장돼야만 ‘자동 옵션’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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