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의 온도] 35년간 고향 못 간 네팔 숙련공

조영관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부대표) 2026. 10. 21.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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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서 온 라주(가명)는 1991년 10월 한국 땅을 밟았다. 처음 몇 해는 6개월마다 체류기간을 연장받았지만 1994년 연장이 끊기면서 미등록이 되었고, 2002 월드컵 무렵 1년짜리 비자를 받은 것 말고는 줄곧 법 밖에서 살았다.

구체적으로 출입국관리법에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민의 체류자격 부여 근거를 마련하고, 합법적 체류자격이 없더라도 자신의 소득을 신고하고 법에 따른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체류 상태를 등록하는 절차와 함께 심사기간 동안 강제퇴거되지 않도록 방지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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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현장 지켜온 미등록 이주민
체류자격 부여 근거 마련 시급

네팔에서 온 라주(가명)는 1991년 10월 한국 땅을 밟았다. 처음 몇 해는 6개월마다 체류기간을 연장받았지만 1994년 연장이 끊기면서 미등록이 되었고, 2002 월드컵 무렵 1년짜리 비자를 받은 것 말고는 줄곧 법 밖에서 살았다. 이주민이 체류기간을 넘긴 것은 출입국관리법 위반이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의 존재까지 '불법'이라 부를 수는 없다. '불법체류자' 대신 '미등록 이주민'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긴 시간 동안 라주는 가구·용접 공장을 오가며 숙련공이 되었고, 홀로 사는 80대 한국인 집주인에게 새벽마다 끼니를 차려 주는 이웃이 되었다. 네팔에 있는 가족에게 해마다 "더서인(네팔의 명절)에 돌아갈게"라고 말한 지 어느덧 35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법 밖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라주의 이야기는 이주노동연구모임 마르코가 사무금융우분투재단과 함께 펴낸 연구보고서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민의 삶과 정의로운 이주정책'(2026. 2.)에 소개되어 있다. 연구진은 한국에서 10년 넘게 미등록으로 살아온 이주민 10명을 여러 차례 만나, 고향을 떠난 날부터 지금까지의 한국에서의 삶을 그들의 말로 기록했다. 법무부 통계에서 '불법체류자 몇 명'으로만 헤아려지는 사람들이 실제 어떻게 이 땅에 와서, 왜 미등록이 되었고, 무엇으로 버텨 왔는지를 기록한 의미 있는 생애사 연구다.

이번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법 밖에 밀려난 '미등록'은 고정된 신분이 아니라 출입국 제도에 따라 변동 가능한 '유동적 상태'라는 점이다. 파키스탄 출신 아미르(가명)는 고용허가제 시행을 앞둔 사면 조치로 체류자격을 얻었다가 난민 소송이 끝나며 다시 미등록이 되었고, 2021년 미등록 이주아동 구제대책 덕분에 네 자녀와 함께 겨우 체류자격을 얻었다. 미등록이 제도에 따라 변경 가능한 상태라면, 우리 제도는 법 밖의 이주민을 다시 법의 보호 안으로 회복시킬 제도를 갖추어야 한다.

일부에서는 미등록 외국인에게 체류자격을 주면 그동안 법을 지킨 이들과의 형평에 어긋나고 미등록 체류를 부추긴다는 우려를 한다. 그러나 일손이 필요할 때는 눈감고 경기가 나빠지면 단속하는 일을 수십 년 되풀이했어도 미등록 체류자는 여전히 30만 명을 넘는다. 단속이 능사가 아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도 지난해 한국 정부에 공문서에서 '불법 이민자' 같은 표현을 쓰지 말고, 미등록 발생의 근본 원인을 살펴 합법화(정규화) 경로를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보고서가 제안하는 것은 일회성 사면이나 임시적 제도가 아니라, 거주기간과 사회적 유대 같은 요건을 법령에 정해둔 상설적인 체류 안정화 제도다. 영국의 장기거주 제도나 스페인의 '아라이고(arraigo, 뿌리내림)'처럼 국외에는 체류자격이 없는 이주민들이 그 사회에 뿌리내린 삶을 근거로 체류자격을 얻을 수 있는 안정화 제도가 이미 마련되어 있다.

정부는 최근 체류외국인 300만 시대를 맞아 외국인력 통합지원 로드맵을 제안했다. 그중 핵심적인 내용이 숙련 인력의 장기체류 방안이다. 단기순환형에서 장기체류형으로 변화하는 외국인력 제도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산업현장을 지켜온 법 밖의 이주민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출입국관리법에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민의 체류자격 부여 근거를 마련하고, 합법적 체류자격이 없더라도 자신의 소득을 신고하고 법에 따른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체류 상태를 등록하는 절차와 함께 심사기간 동안 강제퇴거되지 않도록 방지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35년째 "더서인에 갈게"를 되뇌는 라주가 더는 법 밖에서 늙어 가지 않도록, 이제는 정부가 이들의 삶의 기록에 책임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조영관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부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