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양산만 10년… K방산 시스템을 바꿔야”

진주/표태준 기자 2026. 10. 2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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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K-기업가 정신 국제 포럼
19일 경남 진주 경남이스포츠상설경기장에서 열린 ‘2026 진주 K-기업가정신 국제포럼’ 개회식에서 허승조 진주 K-기업가정신재단 이사장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4년째 개최된 이 포럼은 올해 처음으로 방산 세션이 생겼다. 경남 일대를 K방산 메카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진주시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벌어진 전쟁을 보세요. 저가 드론 등 각종 민간 제품이 전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설계·양산만 10년 넘게 걸리는 전통 시스템에 맞춰진 방산 단지는 이제 너무 느립니다.”

지난 19일 진주시 경남이스포츠상설경기장에서 열린 ‘2026 진주 K-기업가 정신 국제 포럼’에 참석한 존킴 안두릴코리아 대표는 K방산이 미래 전장의 변화에 대응하려면, 제조 역량이 우수한 것에 만족하지 말고 지금의 방산 시스템 틀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포럼이 열린 진주를 비롯해 경남에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현대로템, LIG 디펜스&에어로스페이스(LIG D&A),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방산 ‘빅4’를 비롯한 그 협력사 공장 등이 몰려 있다. 2024년 경남 지역 방산 매출액은 14조3324억원으로 국내 방산업계 전체 매출액(28조7530억원)의 절반가량 규모다. 지자체·기업들은 이를 기반으로 경남 일대를 K방산 메카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올해 4년째 열리는 이 포럼에 처음으로 ‘우주항공·방산 세션’이 생긴 것도 이런 점 때문이다.

그래픽=신소정

K방산은 최근 도전에 직면해 있다. 중동 전쟁 등 지정학적 갈등이 곳곳에서 커지는 가운데, 한국 등이 신흥 방산 강자로 부상하자, 유럽 등 주요국들이 일제히 역내 생산 무기 우선 구매 원칙 등을 내세워 일종의 수주 장벽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세션에 참가한 주요 방산업계 관계자들은 K방산이 마주한 현실에 대해 냉철한 진단을 내놨다.

◇“AI 시대 방산 경쟁력, ‘데이터 확보’에 달렸다”

안두릴의 경우 2017년 엔지니어 5명이 창업한 회사지만, 9년 만에 기업 가치 610억달러(약 81조원), 직원 8000명 규모의 글로벌 방산 기업으로 성장했다. 핵심은 미군과 미국 방산업계가 하지 않던 것에 도전한 것이었다고 한다. 미래 전장이 인공지능(AI)과 자율 주행 플랫폼에 좌우될 것이란 전망이 많았지만 SW(소프트웨어) 개발에 소극적인 걸 보고 2017년부터 AI 운영 체계 ‘래티스’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19일 경남 진주시 경남이스포츠상설경기장에서 열린 ‘2026 진주 K-기업가정신 국제포럼’ 개회식에서 우주항공·방산 세션 연사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패트릭 도나호 미국 콜럼버스주립대 최고운영책임자(COO), 존 킴 안두릴코리아 대표, 신익현 LIG디펜스&에어로스페이스(LIG D&A) 대표, 홍요섭 에어로바이런먼트 한국 대표, 김하늘 대한항공 해외사업개발 실장, 안현수 ANH스트럭쳐 대표. /진주시

존 킴 대표는 “기존 방산 기업들은 정부가 사업을 내고 그 계약을 따내기 전까지 절대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며 “안두릴은 위험을 감수하고 이 분야에 회사 자본·역량을 투입했고, 지금 래티스는 미국·영국·호주 등 전 세계 각 군이 운용하는 핵심 플랫폼이 됐다”고 말했다.

지대공 미사일 ‘천궁’을 UAE 등에 수출해 K방산의 대표 제품으로 만든 LIG D&A의 신익현 대표는 ‘데이터’를 강조했다. 신 대표는 “앞으로 방산 경쟁력은 AI를 학습시킬 양질의 데이터를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며 “우리 군과 방산 업체들이 수십 년간 무기를 개발·운용하며 쌓은 데이터를 정리하는 ‘온톨로지’ 작업이 시급하다”고 했다.

온톨로지는 AI가 이해하고 처리할 수 있도록 기존 데이터를 AI에 맞게 체계화하는 작업을 가리킨다. 현재 한국의 재래식 무기는 품질이 세계적 수준이라고 인정받지만, 방산 AI는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다.

드론이나 무인 수상정(USV)을 개발하는 한국 기업 대다수가 안두릴이나 미국 방산 기업 팔란티어의 AI 플랫폼을 쓰고 있어 지나치게 외국 기업에 종속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 대표는 “기존 사업의 데이터를 AI로 연계하는 체계가 구축돼야 방산 고급 인력의 외부 유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우주항공 기반 살려 드론 메카로”

경남에 무기 제조 역량을 갖춘 우주항공 관련 기업이 많은 만큼, 이 일대를 드론 생산 메카로 만들자는 주장도 나왔다. 최근 전장에서 드론 등 소형 무인기가 핵심 변수로 등장하고 있지만 중국 등과 비교하면 한국이 드론 전력화에 크게 뒤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최대 군용 드론 제조사인 ‘에어로바이런먼트’의 홍요섭 한국 대표는 “한국의 우수한 제조 역량을 보고 에어로바이런먼트를 비롯한 미국 드론 업체들이 드론 공급망을 넓히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며 “이 기회를 살리면 글로벌 드론 공급망에 진입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삼성·LG·GS·효성 창업 정신 태어난 진주

이날 진행된 ‘4대 기업’ 세션에서는 삼성·LG·GS·HS효성 임원들이 AI 시대 기업의 전략적 선택에 대한 토의를 진행했다. 이들은 대기업의 성과·안정 중심 문화가 AI시대의 약점이 될 수 있다며 진주에서 발현한 창업주들의 혁신을 되새겨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2026 진주 K-기업가정신 국제포럼이 19일 경남이스포츠상설경기장에서 개막했다. /진주시

진주는 주요 기업의 창업 정신이 발현한 곳으로 꼽힌다.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이 GS창업주인 허만정 회장과 LG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의 고향이다. 1921년 이 마을에 지수보통학교(옛 지수초)가 설립돼 인근 지역 인재들이 몰리면서,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도 이곳에서 공부했다.

강도혁 삼성인력개발원 상무는 “‘패스트 팔로어’로 성장하기 위해 삼성은 그간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문화를 미덕으로 여겼다”며 “이 때문에 AI시대에 필요한 과감한 도전·혁신을 주저한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6월 삼성이 ‘AI 대전환’을 선언하며 전사에 외부 생성형 AI를 도입하고, 사장단을 포함한 임직원 전체를 대상으로 AI 집중교육한 것을 언급하며 “삼성도 이제 한계를 인식하고 조직 문화를 송두리째 바꾸는 중”이라고 했다.

AI 등 기술 전환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며 더는 대기업 자체 역량과 기술만으로는 감당이 어렵다는 진단도 나왔다. 홍석현 GS벤처스 대표는 “GS그룹이 추진하는 AI데이터센터(AIDC) 사업 역시 여러 스타트업과 함께 개척해나간다는 전략이 핵심”이라며 “독자적으로 대규모 사업을 추진하기보단 여러 벤처 기업에 투자해 ‘빠른 생태계 구축’을 추구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포럼에서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CO) 의장 등 전·현직 유엔 고위 인사들이 모여 불확실성 시대의 국제사회와 기업의 역할을 논의하는 세션도 열렸다. 오준 전 경제사회이사회 의장(제 71대)은 “AI는 단순히 일자리를 빼앗는 게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잃을 수 있는 문제”라며 “모두를 포괄하는 ‘포용적 성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네스토르 오소리오 전 경제사회이사회 의장(제 69대)은 “AI 등 기술적 진보가 대도시와 대기업을 넘어 세계 지역사회 전반에 흘러가기 위해선 개발도상국 등의 디지털 인프라 접근성 확대가 급선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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