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서 나고 진주서 배우고 하동을 무대로 썼다 25년 집필, 원고지 3만1200장… ‘토지’가 세운 이정표
하동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 마당. 큰 나무 그늘 아래 선비 차림의 조형물이 책을 읽고 있다. 대하소설 '토지'의 최치수다. 조형물을 등지고 서면 평사리 들판이 훤히 내다보인다. 들판 너머로 섬진강이 흐르고, 지리산 자락이 병풍처럼 감싼다.
지금의 최참판댁은 '토지'가 널리 사랑받은 뒤 2001년 하동군이 지은 집이다. 소설 속 집을 실제로 지은 드문 사례다. 정작 박경리는 '토지' 1부를 연재하는 동안 평사리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다. '토지'가 널리 알려진 뒤에야 처음 찾은 평사리는 소설 속 풍경과 거의 같았다고 한다.
올해는 박경리 탄생 100주년이다. 그의 이름 앞에는 늘 대하소설 '토지'가 따라붙는다. 집필에만 무려 25년이 걸렸다. 대하소설은 방대한 분량 탓에 쓰는 이에게도, 읽는 이에게도 쉽지 않은 장르다. 박경리는 그 어려운 길을 끝까지 걸었다. 가슴 아픈 근현대사 속에서 한 가문의 이야기를 통해 꺾이지 않은 우리 민족의 생명력과 한을 글로 풀어냈다. 그렇게 '토지'는 한국 문학계의 큰 이정표가 됐다.
박경리 작가 사진=토지문화재단
◇소녀 '박금이', 작가가 되다
박경리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 통영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박금이'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살림을 꾸렸고, 딸에게 살갑지만은 않았다. 통영 박경리기념관은 이 어머니를 '애증과 연민이 교차하는 존재'라고 적었다.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은 훗날 소설 속 여러 여성에게서 다시 나타난다.
1934년 아홉 살 금이는 통영제일공립보통학교(현 통영초)에 입학했다. 교실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세병관이었다. 지금은 국보가 된 건물이다. 일제는 이순신 장군의 얼이 서린 세병관을 교실로 쓰며 민족정기를 훼손했다. 박경리는 '토지' 완간 10주년 언론 대담에서 그때를 이렇게 돌아봤다.
"친구들과 세병관 교실 칠판에 빨간 분필로 '대한민국 독립만세'라고 쓰고 일본을 욕하는 글도 썼다. 해저터널, 충렬사, 세병관을 통해 어릴 때부터 민족주의를 배웠다."
그는 일본 언론 앞에서도 스스로를 "(군국주의 일본에 반대하는) 철두철미한 반일 작가"라고 소개했다. 일본을 향한 그의 생각은 세상을 떠난 뒤인 2013년 산문집 '일본산고(日本散考)'로 묶여 나왔다.
집안 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딸을 진주공립고등여학교(현 진주여고)에 보냈다. 3·1운동 뒤 경남 유지들이 돈을 모아 세운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에 뿌리를 둔 학교다. 박경리는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다.
강희근 경상국립대 명예교수는 박경리를 '진주 문인'으로 꼽는다. 진주에서 태어났거나 공부했거나 활동한 작가를 아우르는 그만의 범주다. 박경리의 작품 중 여고 시절 본 진주의 기인 '또개'를 그린 시 '미친 사내', 가마못이 나오는 단편 '흑백 콤비의 구두'가 진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졸업 뒤 결혼한 박경리는 남편을 따라 인천에 자리 잡았다. 행복은 길지 않았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고, 남편은 부역 혐의로 목숨을 잃었다. 혼자 1남1녀를 키우며 은행에 다니던 박경리를 소설로 이끈 이는 '무녀도', '역마', '등신불'의 작가이자 당시 문단을 이끌던 소설가 김동리(1913~1995)였다. 김동리는 시인을 꿈꾸던 박경리에게 소설을 권했다. 그리고 본인도 모르는 사이 '박경리'라는 필명을 붙여 1955년 단편 '계산'을 '현대문학'에 추천했다.
이듬해 박경리는 아들마저 불의의 사고로 잃었다. 이 상처는 자전적 단편 '불신시대'(1957)에 고스란히 담겼다. 통영 박경리기념관은 이러한 아픔 속에 탄생한 박경리의 문학을 '고통 위에 피어난 서사'라고 소개한다.
1962년 나온 '김약국의 딸들'에는 고향 통영이 통째로 들어 있다. 연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책으로 펴낸 그의 첫 전작 장편이다. 기울어 가는 김약국 집안 다섯 딸의 이야기에 간창골, 충렬사 앞 우물, 선창가 같은 실제 지명이 그대로 나온다.
김영권 통영시 문화해설사는 "일제강점기 통영을 놀랄 만큼 자세하고 사실적으로 그렸다"며 "군더더기 없이 꼭 필요한 글만 썼다"고 말했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박경리'라는 이름을 많은 이에게 각인시켰다. 박경리는 이 소설에서 통영을 '조선의 나폴리'라고 소개했다. 통영이 오늘날 '동양의 나폴리'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지는 데에도 이 소설이 한몫했다.
하동 박경리 문학관 전경
하동 평사리 최참판댁
◇집필 기간만 25년, 대하소설 '토지'
김 해설사는 "김약국의 딸들과 토지를 나란히 놓고 보면 작가의 두 가지 힘이 보인다"고 했다. 통영은 겪은 대로 썼고, 평사리는 상상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그 상상은 외할머니에게서 시작됐다. 그 흔적이 하동 박경리문학관에 남아 있다. 2016년 문을 열어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았다. 전시실에는 1994년 문예지 '작가세계'에 실린 작가의 말이 걸려 있다.
"토지는 6·25전쟁 이전부터 내 마음 언저리에 자리 잡았던 이야기예요. 외할머니가 어린 나에게 들려주던 얘기가 그렇게 선명하게 나를 졸라대고 있었거든요."
외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거제도 어딘가에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이 있었다. 누렇게 익은 벼가 이삭째 땅에 떨어져도 거두는 사람이 없었다. 일꾼들은 이미 호열자(콜레라)로 다 죽은 뒤였다. 그 집에는 딸 하나만 살아남았다. 박경리는 "벼의 노란색과 호열자가 번져오는 죽음의 핏빛이 젊은 시절 내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토지' 1부가 바로 이 이야기다. 호열자가 평사리를 휩쓸고, 최참판댁에는 어린 서희만 남는다. 김 해설사는 "어린 딸을 혼자 키우며 가장 노릇을 한 작가의 삶이 최서희와 할머니 윤씨 부인에게 비친다"고 했다.
박경리가 소설 속 무대로 고른 곳은 하동 악양이다. 지리산 자락 아래 섬진강을 낀 넓은 들판, 최참판댁의 살림을 감당할 만한 땅이었다.
문학관 안내판에는 대하소설 '토지'의 규모가 숫자로 적혀 있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만 25년, 원고지 약 3만1200장, 5부 25편 362장, 등장인물 600여 명. 박경리의 나이 마흔셋에 시작한 연재는 예순여덟에 끝났다. 마지막 원고를 쓴 날은 1994년 8월 15일이다. 소설 역시 1945년 광복의 날에서 끝난다.
강희근 교수는 "제목 토지가 곧 주제"라고 했다. 그는 "토지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땅을 찾아 간도로 떠돈 우리 민족의 애환을 여러 갈래로 그렸다. 그래서 민족의 대하소설이라 부른다"고 했다. 소설은 1897년 한가위에서 시작한다. 그 뒤 반세기 동안 최참판댁 사람들과 평사리 이웃들이 겪은 일을 따라간다.
평사리만이 아니다. 박경리는 또다른 소설 속 무대인 간도 용정도 가 보지 않고 썼다. 그곳을 떠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었고, 옛 지도와 책을 뒤졌다. 1992년 한중 수교 뒤 간도 용정을 찾은 이들이 소설 속 풍경과 너무나 닮았다며 놀랐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김 해설사는 "토지가 세대를 넘어 읽히는 건 이처럼 철저한 사료 조사와 고증에서 나온 사실성 덕분"이라고 했다.
박경리 작가 사진=토지문화재단
통영 박경리기념관 전경
◇다시 고향 통영으로
'토지'의 마지막 원고가 완성된 곳은 강원도 원주다. 박경리는 1980년 원주에 터를 잡았고, 1999년에는 토지문화관을 열어 후배 문인들에게 창작 공간을 내줬다.
고향 통영 땅을 다시 밟은 것은 2004년이다. 떠난 지 50년 만이었다. 옛 동창과 이웃을 만난 그는 그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말년에는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뜻을 품었다. 그가 병마와 싸우던 때 도내 곳곳에는 쾌유를 비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박경리는 2008년 5월 5일,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나온 유고 시집의 제목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였다.
통영으로 향하던 운구차는 모교인 진주여고 교정에 들렀다. 교정에는 작가의 초상화가 걸렸고, 나무마다 흰 리본이 달렸다. 당시 교장이던 조헌국 전 진주교육장은 "진주로 들어오는 톨게이트에도 박경리 선생을 추모하는 현수막을 걸었다"고 말했다. 박경리는 생전 뜻대로 고향 통영에 잠들었다.
2010년 그 곁에 박경리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잔잔한 바다가 내다보이는 마당에 책을 펼쳐 든 작가의 동상과 시 '삶'을 새긴 시비가 나란히 서 있다. 전시실 벽 한쪽에는 박경리가 남긴 말이 적혀 있다.
"제 삶이 평탄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삶이 문학보다 먼저지요. 모든 인생이 그렇잖아요. 중간중간 불행도 있고… 인생은 물결 같은 것이거든요."
박경리의 말대로 그의 문학은 삶에서 나왔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상처는 '불신시대'로, 고향 통영은 '김약국의 딸들'로, 외할머니의 옛이야기는 '토지'로 남았다.
통영 바다와 진주여고 교정, 평사리 들판에는 지금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탄생 100주년, 깊어가는 가을에 그 길을 따라가 보면 어떨까.
임명진기자·취재 도움=토지문화재단
통영 박경리기념관 마당에 박경리 작가의 시, 삶을 새겨놓은 기념비.
통영 박경리기념관 마당에 있는 토지의 서문과 김약국의 딸들 중에서 제1장 통영을 새겨놓은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