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류영모 철학에서 기독교 틀 벗겨 보편화·대중화 업적

한겨레 2026. 10. 20.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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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사상가, 저술가, 그리고 참을 찾는 구도자로서 살아온 박영호(1936~2026.10.11) 선생님 마지막 가시는 길은 아주 소박했습니다.

스승의 '씨알' 개념을 '뜻'으로 풀어 역사철학적 경지를 개척한 함석헌 선생과 그것을 '실존'으로 설명하며 그의 사상을 교회, 기독교 체계 내로 수렴코자 했던 김흥호 선생이 선생님보다 앞선 다석의 제자들이었지요. 간혹 스승 다석을 '교회의 교사'로 여긴 김흥호 선생과 기독교 틀을 벗긴 선생님 간의 학문적 토론이 일곤 했습니다.

스승은 선생님에게 참, 곧 진리와 뜻이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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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박영호 전 다석학회 고문을 기리며
젊은 시절 고인(왼쪽)과 스승 류영모 김효정 부부. 유족 제공

다석처럼 농촌에서 일하고 살며
스승 사상 연구에 온전히 삶 바쳐
고학력 아닌 탓에 설움도 삼켰으나
해박한 지식·포용력에 다 고개 숙여

병석에 눕기까지 스승 사유 풀려
‘다석일지 낱말사전’ 편찬에 온힘

큰 사상가, 저술가, 그리고 참을 찾는 구도자로서 살아온 박영호(1936~2026.10.11) 선생님 마지막 가시는 길은 아주 소박했습니다. ‘제나’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얼나’로 솟구치는 삶을 원했던 선생님의 평소 뜻이 담긴 거룩한 순간이었습니다. 가족들과 가까운 제자 몇분이 선생님을 배웅했습니다. 생전의 다석 류영모(1890~1981)를 기억하는 마지막 어른, 임락경 목사님도 먼 길을 달려서 오셨지요. 말하고 쓸 자격이 없음에도 제 속의 기억을 통해 선생님을 추모하는 마음을 드러내 보겠습니다.

지난 8월 말 자제 박은홍 교수의 안내로 선생님 병상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한동안 제 모습을 두루 살피던 선생님께서 기쁘게 손잡아 주셨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셨으나 또렷한 기억을 갖고 마음속 이야기를 풀어 놓으셨지요. 몇몇 이야기는 아드님도 처음 듣는 내용이라 하며 아버님 말씀에 놀라워했습니다. 언젠가 때가 이르면 이날의 말씀을 되새겨 글로 남겨볼 생각입니다. 병상에서 선생님은 한울님을 ‘사랑’이라 불렀고 스승 다석을 ‘아빠’로 호칭했습니다. 스승을 통해 깨친 영원한 ‘하나’, 그의 큰 사랑과 당신 몸이 하나 되리라 믿었기에 평안했고 의연하셨습니다. 선생님에게 다석은 자신의 정신을 깨운 영적 ‘아빠’였던 것이지요. 하느님을 향해 ‘아빠’라 불렀던 예수의 심정과 견주어 보고 싶었습니다.

다석 사상을 풀어 잇는 세 계보가 있는 줄 압니다. 스승의 ‘씨알’ 개념을 ‘뜻’으로 풀어 역사철학적 경지를 개척한 함석헌 선생과 그것을 ‘실존’으로 설명하며 그의 사상을 교회, 기독교 체계 내로 수렴코자 했던 김흥호 선생이 선생님보다 앞선 다석의 제자들이었지요. 반면 선생님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집착하는 ‘제나’를 초월하는 ‘얼나’란 개념을 만들어 또 다른 길을 열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종교의 틀을 벗겨낸 채 다석 사상의 보편화를 추구했던 것이었지요. 간혹 스승 다석을 ‘교회의 교사’로 여긴 김흥호 선생과 기독교 틀을 벗긴 선생님 간의 학문적 토론이 일곤 했습니다. 성서 신학자로서 다석학회를 이끈 정양모 신부께서 선생님 입장을 편들어 준 토론장에 제가 자리했었습니다. 다석 사유를 기독교에 가둘 수 없다는 판정을 내려 주신 것이었지요. 후학인 저는 두 분 생각이 모두 옳다고 봤습니다. 스승의 사유 속에서 이웃 종교를 향한 개방성과 스승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헌신이 공존했기 때문입니다. 귀일하는 방식 차가 있을 뿐 하나인 ‘없이 계신 이’는 모두를 품는 분이었습니다. 병원에서 뵌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에서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습니다. 신학자로서 저는 선생님들 간 차이를 넘어 이른바 ‘다석학파’ 이름을 갖고서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동양적, 한국적으로 이해한 기독교를 통해 절대주의 오류에 빠진 기독교 병폐를 치유하길 바라서지요. 그럴수록 다석 사상의 보편화, 대중화는 이 땅에 남기신 선생님의 큰 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전 선생님은 ‘다석학회’를 창립했고 이를 통해 스승이 남긴 ‘다석일지’를 함께 연구하자고 후학들을 독려하셨습니다. 그 결과로서 ‘다석강의’(2006)가 출판되었고 정양모 신부님의 노작 ‘다석일지’(전 3권·2025) 또한 엮어졌습니다. 신부님이 묻고 선생님이 답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이뤄진 저술입니다. 아시듯 병져누우시기까지 선생님은 다석 연구를 위해 ‘다석일지 낱말사전’을 편찬하는 일에 매진하셨습니다. ‘ㄱ’에서부터 ‘ㅇ’까지를 완결하고 쓰러지셨으니 스승을 위해 자기 생을 바치신 것이었지요. 지금 제 옆에는 선생님 유고가 있습니다. 스승은 선생님에게 참, 곧 진리와 뜻이 같았습니다. 선생님 저술은 다석을 만났기에 가능했던 구도의 열매였고 삶을 바친 행위였습니다. 저는 선생님 저서 중에서 ‘다석 전기’(2012)를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여겨왔습니다. 이 책을 위해 선생님은 몇 년에 걸쳐 자료를 모았고 집필했던 바 스승을 고독한 성인이 아닌 민족을 위한 역사 속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한글을 ‘하늘소리’(천문)로 여겨 그 뜻을 풀어낸 다석 사유의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는 저서입니다. 향년 90으로 육체를 벗으셨으나 남기신 뭇 서적을 손에 쥐고 읽는다면 선생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무실 것입니다.

고인의 아들 박은홍 교수가 부친의 영정을 들고 있다. 유족 제공

선생님의 삶을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함석헌 선생께서 그렇게 부르고 찾으셨으나 선생님의 발길은 끝까지 다석을 향하셨지요. 약한 몸이었으나 스승처럼 농촌에서 일하며 살고자 하셨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고학력자가 아닌 탓으로 설움도 삼키셨으나 선생님의 해박한 지식(기억력), 넉넉한 포용력, 천재적 글쓰기에 모두가 머리를 숙였습니다. 저를 비롯한 다석 연구자들의 설익은 연구에 선생님은 늘 용기를 주셨습니다. 김흥호 선생님에게 사사했던 저를 선생님은 따뜻이 품어 주셨습니다. 그 고마움에 ‘유영모의 귀일신학’(2020)을 선생님께 헌정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 선생님은 떠나셨으나 자제 박은홍 교수와 친구가 되어 선생님을 기리는 일, 다석의 뜻 펼치는 일에 힘껏 힘을 보태겠습니다. 스승에게 ‘떠나도 좋다’는 허락받아 홀로 우뚝 서 그분처럼 스승으로 살았던 선생님을 잊을 수 없습니다. 허공처럼 큰 사랑 속에 머물며 저희 사는 세상을 살피실 선생님을 생각하며 거듭 영전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이정배/감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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