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 기자의 밑줄 긋기] 47년 만에 '여자의 얼굴'로 … 하루키, 자신의 세계를 뒤집다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6. 10. 20.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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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세계를 뒤집었다.

26세의 그림책 작가 가호(夏帆)는 지인 소개로 만난 남성에게서 모욕적인 말을 듣는다.

가호는 역설의 세계를 부수고, 자신만의 돛(帆)을 펼친다.

하루키스트(하루키 광팬)는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이번 소설 '가호'는 하루키 대표작 '해변의 카프카'와 대칭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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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1위 '가호' 읽어보니
그림책 쓰는 26세 여성 작가
현실과 꿈속 세계 넘나들며
자기만의 서사 찾는 성장담
전작 '해변의 카프카' 대척점
지난 7월 출간 후 일본 서점에서 30만부가 판매된 '가호' 판매 모습. 무라카미 하루키의 3년 만의 신작이다. AP·연합뉴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세계를 뒤집었다. 왜일까. 1979년 등단 후 47년 동안, 하루키 장편소설의 주인공은 전부 남성이었다.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 '태엽 감는 새'의 오카다 도루,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다자키. '1Q84'에는 여성 아오마메가 등장하지만 남성 덴고의 시점도 번갈아 서술된다. 하루키는 "내가 될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내가 아닌 남자"라고 밝힌 바 있다(2018년 뉴요커 인터뷰).

하루키가 처음으로 여성 단독 주인공을 내세운 장편소설 '가호'(문학동네 펴냄)가 번역 출간됐다. 일본에서 30만부가 팔린 바로 그 책이다. 출간 직후 이 소설에 밑줄을 그어봤다.

독자의 허를 찌르며 이야기는 출발한다. 26세의 그림책 작가 가호(夏帆)는 지인 소개로 만난 남성에게서 모욕적인 말을 듣는다. "솔직히 그쪽처럼 못생긴 상대는 처음이군요."(9쪽) 디저트를 먹고 커피를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가호의 반응이 기이하다. 그녀는 분노하지도 상처받지도 않고, 도대체 이 남자가 왜 이러는지를 두고 호기심이 인다. 귀가하니, 가호에게 기묘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꿈속인지, 혹은 꿈같은 것 속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온갖 상징과 비유가 지독하리만치 난무한다.

가호가 처음 맞닥뜨린 비현실적 존재는 '말하는 개미핥기 부부'였다. 개미핥기 '부인'은 가호에게 도쿄 서쪽 외곽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불가해한 힘에 이끌려 거처를 옮기니, 이번엔 '칼 가는 집'으로 가서 '죽은 흰개미를 오일에 절인 병조림'을 밀반입해 달라고 부탁한다. 칼 가는 집에 가니, 이번엔 또 느닷없이 개미핥기 '남편'이 등장해 칼 가는 집의 주인을 찌르라고 한다. "그 칼로 남자를 찔러요."(105쪽) 그 주인이 '흉포한 재규어'에게 감염돼 있다는 이유였다.

이게 뭔 소리란 말인가, 라는 자문 속에서 이야기는 질주한다. 개미핥기의 주문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면서, 가호는 불편한 감정으로 뒤섞였던 자신의 어머니를 마주한다. 이제 가호는 '모친 살해'를 수행해야 한다. 어머니가 '흰개미 여왕'에게 몸을 빼앗긴 상태라는 것. 이게 가호 자신의 이야기인지, 가호가 쓰는 그림책 속의 우화인지가 모호해진다.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 책은 단지 '이야기'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온다.

가호는, 그녀가 한때 그림책으로도 썼던 '자신의 얼굴을 찾아다니는 소녀'의 위치를 점유한다. 자기 얼굴을 잃어버린 소녀가 일단 '임시 얼굴'을 얼굴에 붙이고 길을 나서는데, 긴 세월이 지나자 임시방편으로 붙이고 다니던 얼굴이 '진짜 얼굴'이 돼 있었다는 일화다. 소설 첫 장면에서 가호는 소개팅의 남성에게 '외모가 추하다'고 모욕을 당했고, 타인에 의해 정체성을 규정당했다. 가호와 어머니의 관계도 연장선에 있다. 모친은 가호의 기원이지만, 가호를 규정해온 타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가호의 모친 살해는 어머니의 욕망과 기대를 단절하는 행위가 되고, 이로써 가호는 과거와 결별할 수 있다. '개미핥기 부부'는 이 여정의 안내자이고, '재규어'는 혼돈과 파괴를, '흰개미 여왕'은 지배로서의 모성과 가호의 두려움을 은유해낸다.

"이건 당신 자신의 세계 속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필연적으로 그 세계의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선도 악도 아닌 것도 다 같이 당신 품으로 밀려듭니다. 보세요. 이렇게 개미핥기도 오지요, 재규어도 나타나지요, 흰개미 여왕도 찾아옵니다. 당신이 그것들을 끌어당기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밀려드는 그것들 가운데서 어떤 것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단호히 제거해야만 합니다."(170쪽)

이 지점에서, 왜 소설 제목과 주인공 이름이 '가호'인지 고민하게 된다.

책 속 문장에 따르면 가호는 '여름 하(夏), 돛 범(帆)'을 쓴다. 가호는 2월 중순에 태어났다. 그런데도 가호의 이름이 여름인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한여름의 요트 꿈을 사흘간 꿨기 때문이다. 계절과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 것. 가호는 타자로부터 자신의 의미를 부여받았다. 가호는 역설의 세계를 부수고, 자신만의 돛(帆)을 펼친다.

하루키스트(하루키 광팬)는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이번 소설 '가호'는 하루키 대표작 '해변의 카프카'와 대칭을 이룬다. 아버지의 예언과 부친 살해를 다룬 '해변의 카프카'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가호'는 성별을 바꾸고, 딸이 아버지에게 애착을 느끼고 어머니를 경쟁자로 인식하는 심리학 용어인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가져왔다. 그러나 가호의 모친 살해는 생물학적인 어머니를 죽이는 게 아니다. 어머니의 몸을 '가로챈' 흰개미 여왕을 죽이는 것이므로, 이는 여성으로서의 모친과 가호의 동시 해방으로 이어진다.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고전적인 해석을 벗어나는 지점이 '가호'에게서 발견된다.

책에는 발터 베냐민의 '유용성' 개념이 등장하는데, 문학 독해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가호'가 성장담만이 아닌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는 지점이 분명할 것이다.

가호의 여정의 시작은 '호기심'이었고 그건 가호를 현실과 비현실이 중첩된 장소로 그를 데려갔다. 이것은 이야기에 빠져드는 인간의 '이야기하기 욕망'과 유관하다. '그건 나를 대체 어떤 장소로 데려갈까'(29쪽), '그것들은 제각각 서로 암시를 주고받으며 뒤섞여 우리 안에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55쪽)와 같은 문장은 이 작품이 메타 소설, 즉 이야기가 어떻게 탄생하고 그 이야기가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묻고 있다. 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한 삶을 살아내는 것과 같은 무게란 점에서, 둘은 사실 다르지 않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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