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은상] 김영미 ‘이끼’

경북일보 2026. 10. 20. 15:5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26 호미곶 흑구문학상
▲ 김영미

산모롱이를 돌아서자 그늘진 곳에 달맞이꽃이 한들거린다. 그 곁에 이끼를 덮고 선 당산나무 한 그루가 우뚝하다. 소가 누워 있던 형태로 변하였다는 산복 마을 초입이다. 조붓한 골목어귀부터 제 색을 드러낸 꽃이 객을 반기며 향기로 와 닿는다.

와우산 臥牛山을 끼고 있던 곳에 옛스러운 찻집이 터를 잡았다. 겉만 훑어보고 슬쩍 지나가 버리면 대수롭지 않을 평범한 시골집이다. 살아갈수록 엉킨 실타래처럼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나는 이곳을 찾는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두 갈래 잔디밭은 빗질을 한 것처럼 곱다. 저마다 피워낸 수굿한 꽃이 자리 잡고 있지만 풀 한 포기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친구에게 '풀을 뽑아 온다면 천 원을 주겠다.'고 농담을 건네자 금세 웃음이 터진다. 웃다가 또 우는 일은 감정이 아닌 한 귀퉁이에 남겨진 감성이지 싶다. 귀에 익은 옛 노래 탓인지 주르르 눈물이 흐른다.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마다 오목조목 자리매김한 이끼가 시간의 탑을 쌓고 있다. 공간을 채운 그 앞에서 저절로 탄성이 쏟아진다. 삶의 모서리마다 어깨를 기대며 살아온 세상사 이야기를 그려놓은 듯하다. 바람결에 불도화 꽃잎은 눈송이처럼 쏟아지고, 돌탑을 타고 오르는 분홍빛 으아리는 힘찬 개화를 알린다. 소나무둥치 아래 핀 노란 목향 장미와 아릿한 눈 맞춤을 한다. 때를 기다려 숨겼던 향을 밀어 올리자 자유로운 나비의 춤사위까지 흥을 돋운다. 잔디밭에 턱을 괴고 누워 음악 감상을 하는 소녀 인형이 부럽기만 하다.

이끼는 정원을 가꾸던 든든한 지원군 같다. 바가지 모양을 한 돌 화분에는 이끼가 보초를 서듯 띠를 둘렀다. 다보록한 다육이를 보듬어 주듯 껴안았다. 포대기로 띠를 둘러 아기를 안은 모습이 저러할까. 그런가하면 소담한 계곡을 만들어 운치를 더한다. 풀 한포기마다 쓰다듬은 손길이 사이를 잇는다. 이끼는 명주실처럼 길어 올린 갸느린 꽃 한 송이의 울타리가 되어 우주를 떠 받쳐준다.

이끼는 바람을 부르던 숲이 아니라 늪에 가깝다. 음습한 틈바구니마다 생명을 품어줄 그늘을 다스리는 꽃이 아닌가. 숨을 쉴 만큼 채웠던 수분마저 은근슬쩍 나눠주니 꽃나무의 거름으로 손색이 없다. 한 모금 물 기운은 씨앗을 보호하며 키울 터전이 될 터이다. 이끼를 보니 삭막했던 마음조차 파릇해진다. 식물뿐 아니라 나이를 먹을수록 헐거워진 시절 인연에도 연둣빛 사연을 건네준다.

이 집 주인은 옛 정취가 느껴지는 찻집을 운영하고 있다. 삼 십 여 년 전, 농가를 구입한 뒤 전통을 잇던 천장 서까래만 남겨두고 조경을 하였다. 작은 체구인 그녀는 늘 엷은 미소를 짓는다. 남다른 부지런함은 멈추지 않을 시계추를 닮은 것 같다. 자연 염색을 한 옥빛 천에 수를 놓거나 그림을 그린다. 새벽부터 해거름까지 집 안팎을 살피느라 쉴 틈이라고는 없을 듯하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에 집중하며 심혈을 기울인 장인 정신까지 엿보게 한다. 주름진 얼굴과 손은 햇볕에 까맣게 그을려 안쓰럽기만 하다.

나는 정갈한 정원을 순례하듯 감상하지만, 한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인가 싶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날마다 수 백 여종인 꽃의 진잎을 떼며 키운 화엄의 세계. 그 곁에서 시종일관 일손을 거들어 주는 것은 이끼 몫이다. 시들시들한 식물에게 주인 대신 새벽이슬의 감촉까지 골고루 건네주니 말이다.

이끼는 물의 씨앗이나 다름없다. 아니 슬픔을 이겨낼 사람의 눈물, 그 진득한 목숨을 잇는 마르지 않던 짜디짠 눈물을 닮았다. 언젠가 돌팍에 앉아 먼 바다를 바라보던 한 여인이 흐느끼던 소리를 들었다. '당신은 가고 이끼만 남았다'며 애절한 울음을 닦고 있었다. 한 평생 바다를 항해하다 바다보다 더 먼 곳으로 떠난 것일까.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수 억 년 푸른 숨결로 심장을 뛰게 하던 이끼가 여인의 지울 수 없던 추억의 곳간이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울퉁불퉁한 돌이 엎드려 숨을 쉬고 있다고 믿은 것도 이끼 때문이다. 이끼는 생사의 길목을 지켜주던 파수꾼이지 싶다.

기억에도 지울 수 없는 색이 자란다. 초등학교 시절, 아침이면 커다란 눈을 비벼가며 소를 이끌고 뒷산으로 갔다. 때로는 덩치 큰 소에게 끌려가다 길을 놓쳐버리면 온통 푸른 이끼를 덮고 있던 용샘을 지나야 했다. 산을 가로질러 굽이져 흐르던 계곡을 건너야 목적지인 야산에 오를 수 있었다.

고향 마을은 계곡으로 이어졌고 그 이름은 언제나 향수를 불러온다. 만날 재를 넘어선 바람은 옥수골, 감천골, 절골, 감나무골에 이어 삼계, 원계, 안계마을을 휘돌아 갔다. 콸콸 흐르던 물은 소리를 껴안고 광려천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흐름을 따라 나서지 못한 이끼는 슴슴하고 비릿한 향을 거머쥐고 있었다. 폭포수가 흘러내리던 큰 바위 언저리마다 촉을 틔우며 군락을 이루었다. 어느 화가의 붓이 살아 꿈틀댔을까. 물보라로 피어오르던 그 입자는 민둥산 같이 밋밋한 바윗돌에 초록 융단을 입혔다. 이끼는 징검돌을 놓듯 군데군데 생명의 푸른 점을 찍었다.

나는 학교 갈 시간도 잊은 채 계곡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희망의 끄나풀 같던 이끼는 오늘도 혼자 학교 툇마루를 닦아야 하는 나를 응원하리라.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언 손등에 떨어지던 붉어진 눈물과 매 자국을 덮어 주리라. 육성회비를 내지 못한 빈 손과 찢어진 고무신, 결핍으로 웃자라 버린 시린 마음을 감싸주리라. 가느다란 바늘 닮은 몸매로 귀는 열어 하늘과 교감한 것일까. 민들레 홀씨 같은 보풀들이 불쑥 얼굴을 내밀면 '어느 구름에 비 들었는지 모른다.'던 낯익은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물보라로 흩어지던 너럭바위 주변에서 생명의 불씨를 지펴주었다.

선태식물인 이끼는 탄소를 흡수할 지구 최초의 식물이다. 4억 전 전부터 존재한 생물군으로 만 여 종이 훨씬 넘는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건너야 할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 휘몰아치던 삭풍과 오랜 가뭄을 견디며 버틴 시간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지구의 혈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생태계의 순환과 토양, 식물의 세계를 숨 쉬게 하기 위함일 게다.

이끼는 언 손을 녹여줄 입김 같은 존재다. 식물이 성장 할 수 있도록 떠받쳐준 지렛대나 다름없다. 보이지 않던 손길처럼 온기어린 그리움으로 자라 삶의 흐름 속에 녹아있다. 찬바람이 뼛속을 파고들지만 돋을새김 같은 완성미를 갖추려 한다.

그녀는 심층수 같은 물의 속살을 닮은 듯하다. 찾아오는 길손을 위해 정원을 돌보며, 숙성하여 제다한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게 하니 말이다. 주름진 꽃밭을 누빈다. 떨어진 한 닢 낙엽을 줍느라 가을 추수를 하듯, 수 천 번 허리를 굽혔으리라. 담장 아래 연륜이 느껴지는 삼색 병꽃나무 한 그루가 수형을 잡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너를 기억한다.'는 꽃말 역시 범상치 않다. 비스듬하게 누워 있어도 너볏하다.

이끼는 돌이든 땅이든 밑바닥에 살갗을 맞대고 숨을 쉰다. 자태를 뽐내거나 뭇시선을 끌기 위해 키를 높이지 않는다. 다소곳이 발밑 세상을 섬기며 더듬어갈 뿐이다. 이끼가 공생 하는 정원에서 허기진 긴 숨을 고른다. 내 몸 어딘가에 숨겨진 휘파람 소리가 덩달아 일어선다.

◇김영미 수상소감

글쓰기 교실에서 숙제 한 편을 제출하니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맨 처음 받은 칭찬이었습니다.

그 후, 스승님께서는 수필쓰기란 '삶에서 향기가 나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을 초입, 뒤란 은목수 한 그루에 하얀 꽃망울이 맺히더니 상큼한 향기가 서둘려 바람에 실려 나갑니다. 길한 소식에 골목길까지 마중을 가는 듯합니다.

기쁜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눈물이 자리매김을 할까요.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에, 생의 최고의 순간인 수상 소식에 눈물을 닦습니다. 그 마디마디를 떠올려봅니다. 손자가 뒤뚱거리며 한 걸음을 떼었을 때 환호성을 지르며 눈물을 닦았고, 콧잔등에 돋보기를 얹어 가슴 뭉클한 수필 한 편을 읽고 흘린 눈물은 삶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아들은 '한 끗 차이'라는 말로 당찬 위로와 응원을 보내 주니 어룽진 눈물을 또 흘립니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라고 소리 내어 불러본 적이 없었지요. 또 자신의 힘으로 손끝조차 움직일 수 없는 젊은 조카는 눈만 껌벅이며 대화를 합니다. 슬픔어린 결핍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그래서인지 눈물이란 치유와 희망의 이름을 지닌 것 같습니다.

날마다 몸에 박혔던 옹이가 피어납니다. 거친 언어와 문장을 혜량해주신 심사위원님께 존경과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더 넓게, 더 깊게, 더 아름답고 따스하게, 세상을 품으라는 격려로 여깁니다. 성근 글에 빛을 얻었으니 글밭으로 나아가 정진하겠습니다.

길은 언제나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답이 있으리라 봅니다.

글쓰기는 삶의 발자취마다 녹아 있던 기억과 체험, 또 은유적 상상력으로 생동감을 안겨줍니다. 태곳적 향기를 지닌 이끼처럼 슴슴하고 비릿하지만 누군가를 위한 한 줌의 온기 어린 글을 쓰고 싶습니다.

오랜 세월, 손잡고 글 무늬를 새겨가는 목향수필 회원님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 차벗님을 비롯한 여명의 봉사자들과 기쁨을 나누렵니다. 먼 길 나설 때마다 힘을 실어준 남편과 아들, 함박웃음을 짓는 손자, 며느리의 울타리가 든든할 것 같습니다.

◇김영미 약력 및 이력

약력: 창원대학교 경영학 석사.

자유문학 신인상. 2011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제2회 한국수필 올해의 작가상. 마산예술공로상. 흑구문학상 은상 수상.

수필집<누비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