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여러 자아’로 미디어아트 선구자 된 린 허쉬만, 亞최초 개인전 서울서 개막

김민 기자 2026. 10. 20.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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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단 하나의 얼굴을 지키며 사는 게 옳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불과 몇십년 사이에 '부캐'로 다른 자아를 실현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리슨은 70대에 접어든 2014년 독일 칼스루에 예술미디어센터(ZKM) 회고전으로 뒤늦게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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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단 하나의 얼굴을 지키며 사는 게 옳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불과 몇십년 사이에 ‘부캐’로 다른 자아를 실현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소셜미디어에선 여러 계정을 만들어 다양한 삶을 사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런데 무려 50년 전에 ‘여러 개의 자아’로 미술계에 뛰어든 작가가 있다. 미국 출신의 미디어아트 선구자, 린 허쉬만 리슨(85)이다.

리슨의 아시아 최초 미술관 개인전 ‘린 허쉬만 리슨: 나의 [나]들’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21일 개막했다. 리슨은 70대에 접어든 2014년 독일 칼스루에 예술미디어센터(ZKM) 회고전으로 뒤늦게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2021년 미 뉴뮤지엄 회고전은 “기술과 정체성의 관계를 진단한 예지자”라는 호평을 받았다. 이번 한국 전시는 리슨이 60년 넘게 이어 온 예술 세계를 200여 점의 작품으로 조명한다.

초기 작품인 1960년대 드로잉엔 사람들 앞에 서 있거나 홀로 앉아있는 인물이 등장한다. 공통점은 손가락질 받거나, 두 개 이상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 여성으로서 겪는 ‘사회가 요구하는 정체성과 자기 내면 사이의 갈등’을 표현했다.

작가는 이런 고민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사회가 요구하는 답답한 틀은 상자에 넣고(설치 작품 ‘숨 쉬는 기계’), 스스로 여러 개의 ‘탈’을 만들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가상의 인물 ‘로베르타 브라이트모어’를 창조해 그 삶의 기록하거나, 심지어 자기가 가명의 평론가로 나서기도 했다.

리슨은 당시 미술계의 높은 벽에 막혀 여성 작가에게 전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자, 가상의 평론가 3명을 만들어 직접 평론을 실었다. 이 과정은 매우 치밀하다. 작가는 전통적 남성 미술 비평가 ‘허버트 구드’와 진보적이고 날카로운 시선의 ‘프루던스 줄리스’, 아방가르드 비평가 ‘게이 어벤던’ 등 각 캐릭터를 달리 설정했다.

그는 세 평론가의 이름으로 ‘린 허쉬만’을 칭찬하는 기사를 작성했고, 글은 실제로도 매체에 실렸다. 작품보다 ‘누가 검증했는가’를 따지던 갤러리 디렉터들에게 이 글을 보여주며 리슨은 첫 개인전을 쟁취했다. 뒷날 누군가 그 행동을 비판하자 리슨은 이렇게 답했다.

“나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불공정한 제도를 시험하고 폭로하기 위한 ‘위장 전술’이자 하나의 예술 작업이었다.”

이렇게 사회가 보는 시선과 개인이 갖고 있는 복잡한 정체성 사이의 긴장과 그를 통해 주고받는 영향이 작업의 핵심이다. 이를 잘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작품은 인형 설치 작품 ‘사이버로베르타’다.

관객은 예쁘게 생긴 인형을 보고 가까이 가다가 작은 화면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발견한다. 인형의 눈에 작은 카메라가 달려있고, 심지어 온라인으로 누구나 들여다보고 조작할 수 있다. ‘구경의 대상’이던 인형이 ‘감시자’로 변하는 순간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리슨은 다양한 기술을 활용했다. 1980년대 리모컨으로 이야기를 고르는 인터랙티브 작품 ‘로나’와 ‘딥 콘택트’, 배우 틸다 스윈턴이 출연한 영화 ‘에이다 러브레이스’와 ‘테크노러스트’ 영상 일부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건 여러 가지 표현 방식과 기술을 통해 작가가 들여다보는 건 결국 ‘사람’이라는 점이다. 리슨 스튜디오에서 30년 넘게 일한 테크니션 팔레 헹켈(Palle Henckel)은 “작가가 예술을 통해 묻는 건 결국 사람들의 상호작용 방식”이라며 “리슨은 기술의 변화에 민감하지만 그 자체보다 그것을 물감처럼 사용해 자기의 질문을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내년 2월 21일까지.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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