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철학을 가진 춤”…발레가 전하는 숭고한 사랑과 희생, ‘지젤’

현경아 2026. 10. 2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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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끝으로 선 발레리나가 중력을 거스르듯 가볍게 도약합니다.

국립발레단의 '지젤'은 오랫동안 관객의 사랑을 받아온 대표 레퍼토리인 만큼, 김 단장은 공연에 앞서 가진 인터뷰에서 "기존의 훌륭한 무용수들도 있지만, 조금 새로운 색깔의 무용수들도 보여드리면 좋겠다는 시점이 된 것 같다"고 새 주역 선발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국립발레단이 보유한 '지젤'은 바르가 직접 안무하고 무용수들을 지도해 완성한 버전으로, 김 단장은 발레에서 안무가의 버전을 지켜나가는 것이 곧 전통을 잇는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환상의 세계를 그린 '지젤'과 현실의 비극을 담은 '카멜리아 레이디', 발레가 음악과 움직임을 통해 얼마나 다양한 서사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지 두 작품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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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끝으로 선 발레리나가 중력을 거스르듯 가볍게 도약합니다. 긴 하얀 튀튀를 입은 무용수들이 한 몸처럼 팔을 뻗고 움직이면, 무대는 어느새 현실에 없는 존재들이 사는 세계가 됩니다. 이렇게 흰 의상의 무용수들이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빚어내는 장면을 '발레 블랑(흰 발레)'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발레의 환상적인 이미지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뚜렷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비극적인 사랑과 영혼의 세계를 무대에 올린 낭만주의 발레는 여러 걸작을 남겼고, 그중에서도 '지젤'은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대표작입니다.

'지젤'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독일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시작됩니다. 소박한 마을의 정취 속에서 순수한 소녀 지젤의 사랑이 싹트고, 이 사랑은 1막과 2막에 걸쳐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집니다.

지난 13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국립발레단 '지젤'은 김주원 단장이 취임 후 처음 올린 서울 전막 공연이었습니다. 새로운 무용수들에게 주역의 기회를 열어주면서도, 익숙한 고전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기보다 원래의 모습을 충실히 되살리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 무대는 어땠을까요?


● 대사 없는 발레, 몸짓으로 읽는 '지젤'

1막의 지젤은 사랑에 빠진 순수한 소녀입니다. 그러나 연인 알브레히트가 신분을 숨긴 귀족이고 약혼자까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지젤은 큰 충격 속에 죽음을 맞습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을 발레는 대사 한 줄 없이 전합니다. 알브레히트의 약혼녀 바틸드가 자신의 약지를 가리키는 몸짓 하나로, 지젤은 사랑이 무너졌음을 알게 됩니다.

발레에는 이렇게 약속된 몸짓, 즉 마임이 있습니다. 머리 위에서 팔을 빙글빙글 굴리면 "춤을 추자"는 뜻이고, 약지를 가리키면 약혼 또는 결혼했다는 뜻입니다. 이 약속만 알아도 동작의 난도에 매달리지 않고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2막의 무대는 죽은 지젤의 무덤 앞, 깊은 밤입니다. 죽은 처녀들의 영혼인 '윌리'의 우두머리 미르타는 알브레히트가 죽을 때까지 춤을 추게 만들려 하지만, 유령이 된 지젤은 사랑과 희생으로 그를 지켜냅니다. 인물 사이의 관계와 이야기의 흐름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1막이 목가적이고 밝은 무대라면, 2막은 섬세하고 정교한 낭만 발레의 매력을 보여주는 무대입니다. 흰 의상과 밝은 타이츠, 토슈즈가 어두운 배경과 선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에 무용수들의 동작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2막은 발레 블랑의 대표적인 장면으로 꼽히고, 줄 맞춰 선 윌리들의 군무는 낭만 발레가 추구해 온 형식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 "반짝거리는 보석들을 봤다"

이번 공연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변화는 새로운 주역들의 등장입니다. 주역 11명 가운데 6명이 해당 배역에 처음 도전했습니다. 검증된 베테랑뿐 아니라 새로운 얼굴들에도 작품을 이끌 기회를 준 겁니다. 새 얼굴은 지젤 역의 이은서·엄나윤·이하연·안수연, 알브레히트 역의 나대한·김윤으로, 이들은 이번 '지젤'에서 처음으로 전막 주역을 맡았습니다. 여섯 명 가운데 이은서만 드미솔리스트이고 나머지 다섯 명은 군무를 담당하는 '코르드발레' 단원입니다.

국립발레단의 '지젤'은 오랫동안 관객의 사랑을 받아온 대표 레퍼토리인 만큼, 김 단장은 공연에 앞서 가진 인터뷰에서 "기존의 훌륭한 무용수들도 있지만, 조금 새로운 색깔의 무용수들도 보여드리면 좋겠다는 시점이 된 것 같다"고 새 주역 선발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김 단장은 단원들의 기량이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주역에게 필요한 조건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예술성과 무대를 함께 만들어가는 태도를 꼽았습니다. 그는 "새롭게 반짝거리는 보석들을 이번에 와서 많이 보게 됐다"며 "주역으로서 보여줘야 하는 기량이나 테크닉은 기본이고,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예술성도 중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른 무용수를 배려하는 마음, 작품을 대하는 태도, 인물에 어울리는 표현력도 함께 고려했다고 덧붙였습니다.


● 무용수에서 단장으로…'내 춤'에서 '무대 전체'

한때 이 무대에서 지젤을 연기했던 무용수가 이제는 무대 전체를 책임지는 단장이 됐습니다. '지젤'은 김주원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에게 남다른 작품입니다. 2011년 국립발레단이 프랑스 안무가 파트리스 바르의 버전을 처음 선보였을 때 지젤을 직접 연기했기 때문입니다.

김 단장은 인터뷰에서 "그 당시에는 무용수의 입장에서 제 역할에 몰입하고, 제 춤에 조금 더 집중했다면 지금은 작품 전체를 바라보게 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기획 단계부터 리허설, 오케스트라와 무대, 의상·조명·분장까지 공연을 이루는 모든 요소를 챙겨야 하고, 공연이 끝난 뒤의 다음 단계까지 고민하는 것도 단장의 몫입니다.

국립발레단이 보유한 '지젤'은 바르가 직접 안무하고 무용수들을 지도해 완성한 버전으로, 김 단장은 발레에서 안무가의 버전을 지켜나가는 것이 곧 전통을 잇는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 느림과 기다림의 춤, 발레

발끝으로 서고, 다리를 바깥으로 돌려세우고, 중력을 거슬러 힘껏 도약하는 움직임. 발레는 몸이 원래 움직이는 방식을 거스르는 춤입니다. 얼핏 보면 화려한 기교가 핵심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발레의 매력은 인물의 감정이 쌓이고 관계가 변하는 과정을 몸짓으로 천천히 보여주는 데에도 있습니다.

김 단장은 인터뷰에서 "느림의 철학을 가진, 기다림의 철학을 가진 발레라는 예술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힐링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클래식 발레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랑, 비극, 희망 등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든 것이라며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만나 보라고 권하기도 했습니다.

다음 달(11월) 국립발레단은 쇼팽의 음악을 바탕으로 연극처럼 깊은 감정을 표현하는 드라마 발레의 대표작, '카멜리아 레이디'로 무대를 이어갑니다. 환상의 세계를 그린 '지젤'과 현실의 비극을 담은 '카멜리아 레이디', 발레가 음악과 움직임을 통해 얼마나 다양한 서사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지 두 작품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사진 출처 : 국립발레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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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아 기자 (kaka@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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