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에 말없이 누운 그대… 함께했던 무수한 여행을 기억하는가[사랑합니다]

2026. 10. 2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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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시게. 말 좀 해보시게나. 대상포진이 완치돼서 돌아오겠다던 그 짧은 한마디 말이 내게 남긴 마지막 소통이었다니.

왕복 두 시간을 운전하면서 둘이는 말이 없었지만 내 실수에도 자네는 일체의 내색이 없었으니 돌이키면 그 또한 미안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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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합니다 - 까만 물잠자리 친구 이순자에게
2016년 필자(가운데) 서예전을 찾은 친구 이순자(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여보시게. 말 좀 해보시게나. 자네는 내게 분명 의령으로 치유차 간다던 한마디 말을 남겼지 않은가. 일주일쯤 있다 돌아오겠다고. 대상포진이 완치돼서 돌아오겠다던 그 짧은 한마디 말이 내게 남긴 마지막 소통이었다니. 우리의 삼십 년 우정을 그렇게 허무하게 끝낼 수는 없지 않은가.

자네가 말을 닫고 말았으니 어떻게 응급실을 갔는가, 중환자실을 갔는가. 그러고는 이제 정녕 콧줄을 하고는 무정하게도 그렇게 요양병원 유리창에 갇혀 있는가. 이승의 까마득한 기억만을 간직한 채 까만 물잠자리 한 마리 되어 꿈에서만 물가를 날고 있는가.

어린 시절 고향 개울가 빨래터에는 푸른 수초 사이로 좁다란 물길을 따라 사철 맑은 냇물이 청청하게 흐르고 있었다네. 다리 건너 물 건너 빨래 동이를 이고 가는 언니 따라 종종걸음으로 아장아장 따라가던 단발머리 소녀. 여름이면 그 맑은 시냇가에서 파닥파닥 날개를 접으며 날아다니던 까만 물잠자리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네. 나타났다간 사라지고 사라졌다간 또 이내 나타나 고운 양 날개 접으며 날렵하게 날고 있던 그 신비한 물잠자리. 자네는 내 인생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져 간 까만 물잠자리인가.

의식 저 너머에서 자네는 나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오랜 세월 짝꿍이었던 나와 함께 거닐었던 무수한 여행지를 걷고 있는가. 악다구니 써가며 살아냈던 영감과의 한 생을 뒤척이고 있는가. 사지가 불편한 몸이 된 채 수개월 동안 병원 침대 붙박이가 되고 있으니 차라리 의식이라도 없다면 그 영혼이 자유로울까.

어제는 TV에서 숭덩숭덩 썬 오징어회가 먹음직스럽게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네. 나는 또 그 순간 지울 수 없는 한 개 회한의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어. 언젠가 통영 중앙시장에 갔을 때 자네는 산오징어회를 먹자고 했었지. 날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그걸 먹어낼 자신이 없어 스치는 말로 지나치고 말았었네. 그 후에 다시 통영에 갔을 때도 자네는 그 말을 했고 나는 또 예사로이 다음에 먹자고 했었지.

자네를 못 보는 지금 세상에서 그때 그렇게도 원하던 산오징어회를 함께 먹지 못한 게 이렇게 후회가 될 줄은 몰랐네. 여보게 친구. 참으로 미안하네. 내 이기심을 용서하게나. 자네는 그때 그 오징어회가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인생은 허락할 때 행해야 한다는 걸 왜 몰랐을까.

회한의 장면이야 어찌 그 먹거리의 기억만이 있을까. 장거리 운전 봉사의 달인이었던 자네와는 수십 년간 참 많이도 여행을 다녔고 그 시간의 갈피마다 누적된 추억 사진들이 지울 수 없는 장면 되어 갈잎처럼 쌓여만 가는데….

어느 해 가을날 그대 기억하는가. 남해·거제·통영·고성. 남해안 일대를 하루 종일 돌아 피곤도 잊은 채 핸들을 잡았던 것은 오직 P 수녀님의 기쁨을 위한 봉사가 아니었던가. 밤새는 줄 모르고 달빛 아래 허브향이 가득한 로즈메리 옆에서 흔들리는 그네에 앉아 우리는 한 수도자의 신앙고백을 듣느라 밤이슬에 옷이 젖는 줄도 몰랐지 않았던가. 지나고 보면 참 아름다운 삶의 순간이었지만 스쳐 지나간 시간들은 바람처럼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네.

체코의 골목길을 걷고 있을 때 유서 깊은 프라하의 돌길에 새겨지던 뾰족구두의 흔적은 우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차림새와 입성에 관한 한 언제나 정장을 고수했던 자네는 천생 여자였다네. 여행 차림새는 보통 바지에 운동화 편한 차림이었으나 자네만은 동유럽 여행 시에도 주름치마에다 구두를 신고 있었네. 그게 더 편하다면서. 잠시도 정장을 고수하지 못하는 내겐 그건 어쩌면 경이였다고 할까. 그 멋과 넘치는 끼를 이제 다 어디에다 두었는가.

운전 매너는 자네를 따를 사람이 없었네. 이제야 말이네만 내가 운전을 하지 않았을 때 수년간 전속기사처럼 꼭꼭 내 집 앞마당까지 태워다 주곤 하던 그 고마움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아마도 내가 갚지 못한 빚 가운데 가장 큰 사랑이 아니었을까. 누구에게라도 일단 동승한 친구는 꼬박꼬박 집까지 데려다주곤 하던 그 배려심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네.

한 번은 멀리서 오시는 강사 신부님을 모시기 위해 그 먼 공항에까지 장거리운전을 한 적이 있었지. 그러나 시간이 어긋났는지 서로 엇갈려 우리는 만나지 못하고 그만 헛걸음이 되고 말았지. 왕복 두 시간을 운전하면서 둘이는 말이 없었지만 내 실수에도 자네는 일체의 내색이 없었으니 돌이키면 그 또한 미안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네.

몇십 년간 우리가 함께했던 수많은 여정의 그림자들. 스쳐 간 도로 위의 흔적은 사라져도 추억만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더욱 진한 그리움의 이름이 되었다네.

사랑했던 친구여. 그 모든 아름다운 기억들은 가슴에 아롱져 세월 간다고 잊힐 수 있을까? 이제는 기도 속에서만 함께하는 그리운 사람아. 남은 생이나마 부디 평안하시게.

김양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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