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임동혁이 식민지 경성에 보낸 베토벤 '환희의 송가'
베토벤 합창 교향곡과
작곡가 임동혁 자취를 찾아서
베토벤 교향곡 9번의 마지막 악장에서 독창자가 외친다. “오, 벗들이여! 이런 소리가 아니라, 좀 더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자!” 이윽고 합창단이 실러의 시를 노래한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 인류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열망을 이보다 장엄하게 그린 음악이 또 있을까. 어느 날 이 곡을 듣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1824년 빈에서 초연된 이 음악은 어떤 길을 거쳐 오늘날 한국의 청중에게 도착했을까.
그 길을 더듬으며 옛 신문을 뒤지다가 1934년 10월 18일자 『경성일보』 2면에서 광고 하나를 발견했다. 빅터레코드가 발매한 베토벤 교향곡 9번 음반이었다. 지휘자는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연주는 필라델피아 교향악단. 12인치 레코드 아홉 장을 한 세트로 묶었고, 가격은 35원(엔)이었다. 당시 경성의 영화관 대정관 특등석 입장료가 50전이었으니, 특등석에서 영화를 일흔 번 볼 수 있는 돈이다. 『경성일보』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일본어로 발행됐다. 주된 독자는 식민지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이었다. 빈에서 탄생한 인류애의 노래가 미국 관현악단의 연주로 녹음되어 유통망을 타고 식민지 경성에 도착한 것이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37년 8월 21일자 『동아일보』에서 또 다른 흔적을 발견했다. 작곡가 임동혁(任東爀, 1907?-1995)이 쓴 음악수필 「제9교향곡」이었다. 그는 이 작품을 “음악 중의 음악이요 교향곡 중의 교향곡”이라 극찬하며, 도쿄에 머무는 동안 다섯 차례나 실연을 들었다고 적었다. 독창자와 합창단은 공연마다 달랐지만, 관현악단은 언제나 신교향악단이었다고 한다. 교향곡 9번은 대규모 관현악단과 합창단, 독창자까지 동원해야 하는 작품이어서 당시에는 실제 연주를 접할 기회가 드물었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고 노래하는 음악을, 식민지 조선의 젊은 음악가는 자신의 조국을 강탈한 제국의 수도에서 듣고 있었던 것이다.
임동혁이 작품에서 특히 감동한 것은 베토벤의 삶과 음악 사이의 역설이었다. 청력을 잃고 채권자에게 시달리며 조카 문제로 고통받던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찬란한 환희를 노래할 수 있었을까. 그는 이를 “고뇌를 체험한 환희”라고 표현했다. 흥미롭게도 임동혁은 몇 주 전 헬렌 켈러가 경성을 방문했을 때 통역자로 동행한 간세이가쿠인대학 강사 이와하시 다케오의 말도 인용했다. “진정으로 슬픈 사람은 그의 얼굴에 슬픔을 나타내지 않는다.” 청각을 잃은 베토벤이 환희를 노래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가져온 말이었다.
초연 때 알토 독창자 카롤리네 웅거가 귀가 들리지 않는 베토벤에게 청중의 갈채를 알려줬다는 유명한 일화도 소개했다. 다만 이 사건이 언제 벌어졌는지를 놓고는 증언이 엇갈린다. 초연을 지켜본 피아니스트 탈베르크는 2악장 스케르초가 끝난 뒤의 일이라고 회고했고, 베토벤의 제자 체르니와 비서 홀츠도 2악장 연주 도중 청중의 박수가 터졌다고 기록했다. 반면 웅거 자신과 베토벤의 전기 작가 쉰들러는 곡이 모두 끝난 뒤의 일이라고 전했다. 최근 연구에서는 2악장설을 지지하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임동혁은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일본 도요음악학교에서 공부했다. 일본음악콩쿠르 작곡 부문에서 1938년 입선, 1939년 3위, 1940년 입선으로 3년 연속 입상할 만큼 재능을 인정받았다. 일본 유학 중에 만난 일본인 성악가이자 도요음악학교 교수였던 미무라 쇼코(三村祥子, 1907~1985)와 결혼했다. 쇼코는 남편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와 임상희(任祥姬)라는 이름으로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성악을 가르쳤다. 전문적인 서양음악 교육을 받고 음악가로 성공하려면 일본이 중요한 통로였던 시절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는 제국이면서, 한편으로는 젊은 음악가들이 최신의 음악 지식과 공연 문화를 접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그러한 현실이 그를 어디로 이끌었는지는 이후의 기록이 말해 준다. 임동혁은 태평양전쟁기에 일본군의 무공을 찬양하고 조선 청년의 학병 지원을 독려하는 노래들을 작곡했다. 「반도학병의 노래」, 「다케야마 대위를 따라라」 등이 그의 작품 목록에 남아 있다. 그는 정부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포함됐다. 해방 후 임동혁은 한국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글을 썼다. 1946년에는 「민족음악수립의 제창」이라는 글도 발표했고, 1948년에는 『음악과 문화』라는 책을 출판했다. 전쟁 중 일본 제국을 위해 작곡했던 음악가의 이름 옆에, 해방 직후 ‘민족음악’이라는 제목이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시대의 격변을 느끼게 한다.
그 뒤의 생애를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임동혁은 어느 시점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내의 성을 따른 ‘미무라 아키라(三村朗)’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정확히 언제 떠났는지, 일본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웠다. 일본의 출판사 니치가이 어소시에이츠가 2008년에 펴낸 『일본의 작곡가: 근현대 음악인명사전』에는 그의 생몰연도가 1907~1995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2009년 정부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는 그의 출생일이 1912년 9월 25일로 기록되어 있다. 5년의 차이가 있는데, 어느 쪽이 정확한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플루트 곡 악보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했다. 미무라 아키라 작곡, 《가라쿠(ガラク)》. 무반주 플루트 독주곡이었다. 악보 표지에는 영문으로 ‘GARAC’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어의 ‘가라쿠’는 한국어 ‘가락’을 옮겨 적은 말처럼 보인다. 묘하게도 일본 악보 출판사는 이 곡을 ‘일본적이고 친숙한 작품’이라고 소개한다.

추가로 자료를 찾던 중 미무라 소노코(三村園子)라는 여성 플루티스트의 1995년과 2003년 음반에 《가라쿠》가 수록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소노코는 도쿄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해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의 수석 플루트 연주자였던 윌리엄 킨케이드에게 배웠다. 1966년 일본으로 귀국한 뒤에는 연주와 교육 활동을 이어갔으며, 도쿄학예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플루트 입문서도 출판했다. 아키라와 같은 성씨를 쓰는 소노코는 그와 어떤 관계일까.
조사는 뜻밖에도 종교 관련 자료로 이어졌다. 1966년 9월 22일자 미국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문 《컬럼비아 유니언 비지터(Columbia Union Visitor)》에는 미무라 소노코의 일본 귀국을 알리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소노코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머무는 동안 현지 재림교회에 출석했고, 교회에서는 귀국을 앞둔 그를 위해 송별회도 열었다. 기사에는 일본에 있는 소노코의 부모가 딸을 걱정하며 미국 교회 관계자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내용도 나온다.
일본에서도 관련 자료를 찾아냈다. 도쿄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아마누마교회와 관련된 일본어 소책자 《세속 사회에서의 성음악》에 미무라 아키라의 이름이 있었다. 서문에는 그를 ‘아마누마교회의 명예장로였던 고(故) 미무라 아키라’라고 소개하고, 그가 생전에 교회음악의 진흥을 위해 마련한 자금으로 책자를 배포한다고 적혀 있다. 이 일을 추진한 음악인 다섯 명 가운데 플루티스트 미무라 소노코와 도쿄도교향악단에서 활동한 트롬본 연주자 미무라 노리모토(三村範基)도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성이 미무라(三村)다.

그런데 바로 그 아마누마교회에서 오는 11월 8일 미무라 소노코가 플루트를 연주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먹고사는 일에 매여 살다 보니 만사 제치고 도쿄까지 달려갈 형편은 못 되어 아쉽지만, 혹여 나중에라도 공연장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미무라 아키라, 그러니까 임동혁이 당신의 아버지가 맞습니까? 그렇다면 《가라쿠》라는 곡의 제목은 한국어 ‘가락’에서 온 것입니까? 아버지는 일본에서도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좋아하셨습니까? 혹시 아버지 앞에서 《가라쿠》를 연주한 적이 있습니까? 그때 당신의 플루트에서 흘러나오는 그 가락을 들으며 아버지는 어떤 표정을 짓고 계셨습니까?”
임승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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