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5대 위대한 경험”… 호크니가 극찬한 18세기 런던 하우스
거대 유물 대신 ‘어느 한 시대의 삶’을 소장한
런던의 데니스 세버스 하우스
영국, 그중에서도 잉글랜드 왕정을 떠올려 보자. 수많은 왕가가 명멸했지만 오늘날까지 영국의 이미지와 문화에 가장 깊은 흔적을 남긴 시대를 꼽으라면 단연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일 것이다. 런던 시내에 들어서며 마주치는 오래된 건축물 상당수가 이 시기의 양식이다. 빅벤, 타워 브릿지, 세인트 판크라스 역, 그리고 자연사 박물관과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 모두 이 시기에 지어진 건축물이다. 건물은 잘 보존돼 지금도 감상할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생활까지 생생하게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런던에서 단 한 곳,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빅토리아 시대의 한 가정집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되는 곳이 있다. 데니스 세버스 하우스(Dennis Severs’ House)다.
데니스 세버스 하우스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이 집이 위치한 스피타필즈(Spitalfields) 지역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현재 런던의 리버풀 스트리트(Liverpool Street) 역이 있는 이 지역은 병원(고대 영단어 ‘Spital’)이 있는 평원(fields)이라는 뜻으로, 12세기 당시 런던 외곽에 지어진 세인트 메리(St. Mary) 병원 근처의 지역명이었다. 1666년 런던 대화재 당시만 해도 시골에 불과했던 스피타필즈는 화재 이후 무역상들이 도심을 드나드는 관문이 되면서 점차 번성했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자주 찾는 빈티지 명소 브릭 레인(Brick Lane)은 당시 벽돌을 생산해 나르던 골목에서 이름을 따왔고, 이곳의 랜드마크인 트루맨 브루어리(Truman’s Brewery)도 이 시기에 오픈했다. 17세기 후반 스피타필즈 마켓이 들어서자 많은 사람이 이주해 왔다. 18세기에 접어들며 아일랜드 이주민과 유대인, 그리고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넘어온 프랑스 개신교도 위그노(Huguenots)가 이 마켓을 중심으로 유입되었다.

데니스 세버스 하우스는 이 시기 피난해 온 위그노들이 런던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보여주는 곳이다. 미국 출신 데니스 세버스는 런던에 첫눈에 반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영국으로 건너왔다. 1979년 재건축 위기에 놓인 이 집을 구매했고, 빅토리아 시대의 집으로 탈바꿈해 직접 생활했다. 전기나 가스 난방을 일절 쓰지 않고,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것처럼 촛불로 어둠을 밝히고 벽난로의 온기로 겨울을 났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저비스(Jervis)’라는 허구의 가문을 만들어내 18~19세기 위그노 가족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가구와 인테리어만 갖춘 게 아니다. 그 시절의 냄새와 온기까지 담았다. 흉내 내는 수준을 넘어, 마치 당대의 정물화 속으로 걸어 들어간 듯 소름 끼치도록 정교하다.
이 집에 도착해 노크를 하면 문을 열고 반겨주는 직원이 있다. 여느 박물관의 직원이 아닌 18세기의 사람이 나와 반겨준다. 친절하면서도 조금은 엄숙한 기운이 감도는 말투로 집을 소개하고, 주인이 잠시 외출 중이니 들어와 기다리라며 안으로 안내한다. 이 순간부터 방문객은 18세기 공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관람은 소리를 내지 않는 '침묵 속의 관람(Silent Visit)'으로 진행된다. 관람객들은 침묵 속에서 오직 마룻바닥 삐걱거리는 소리, 시계의 째깍거림, 그리고 고요 속에 깨어나는 오감에 집중하며 저비스 가문의 흔적을 추적하게 된다.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라운지에는 싱그러운 과일과 차가 마련되어 있다. 무언가 깜빡하고 나간 듯 테이블 위에 손수건이 놓여 있고, 찻잔의 차는 방금 따른 듯 따뜻하다. 의자도 조금 전 누가 일어선 듯 한 발짝 물러나 있다. 주인은 어디 갔을까 두리번거리며 아래로 내려가면 천장 낮은 부엌이 나온다. 요리를 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으슬으슬한 지하실 공기를 데우려던 것일까. 화구처럼 보이는 곳에 불도 지펴져 있다. 다시 올라와 라운지와 거실을 둘러보면 실크 산업에 종사했던 위그노들답게 곳곳에 질 좋은 실크 장식이 걸려 있다.
계단을 오르면 누군가 방금 빨래를 널고 나간 듯하다. 덜 마른 옷이 빨랫줄에 걸려 창으로 드는 바람에 살랑이고, 이부자리는 흐트러진 그대로다. 위층으로 갈수록 19세기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당시 실크 원단 산업의 규모가 감소하며 작은 방에 6명 이상의 식구가 함께 살기도 했다.기운 옷가지와 부러진 의자가 형편이 어려워진 위그노들의 삶을 말없이 보여준다.


17세기 말 수십만 명의 위그노가 잉글랜드로 건너왔고, 그 상당수가 런던에 정착했다. 그들은 런던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많은 후손을 남겼다. 오늘날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본인도 모르지만 위그노 출신의 조상이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위그노들은 때로 출신을 감추려 성을 영어식으로 바꾸기도 했다. 블랑(Blanc)을 화이트(White)로, 불랑제(Boulanger)를 베이커(Baker)로, 들라크루아(De la Croix)를 크로스(Cross)라는 성으로 번역해서 바꾸는 등 이제는 자연스러운 영국인들의 성으로 남겨졌다.
얼마 전 작고한 영국의 대표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이곳을 방문한 뒤 “세계 5대 위대한 경험 중 하나(One of the world’s five great experiences)”라고 극찬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유물이나 역사적 소장품을 전시하는 곳이 아니기에, 데니스 세버스 하우스를 박물관이라 부를 수 있을지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매일 찻잔과 촛대에 온기를 불어넣고 과일과 음식을 차려 위그노의 삶을 숨 쉬게 하는 이곳이야말로, 거대한 유물 대신 '한 시대의 삶'을 소장한 가장 특별한 박물관이 아닐까.

런던=박소연 테이트 미술관 수장고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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