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가 신임한 남자, 무법천지 차밭에 뛰어들다 [서영수의 명산명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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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 성지 멍하이. 海茶廠도 1940년부터 현재까지 멍하이현 소재지를 지키고 있다.
정부에서 임명한 멍하이 현장 리위모李毓謀는 공정한 법 집행을 내팽개치고 차 상인과 밀착해 차마고도를 통한 밀수출을 눈감아주고 사리사욕을 취했다. 리푸이가 차창을 운영하며 멍하이와 동남아 시장에서 겪은 생생한 체험을 녹인 논문은 중국 현대 차 산업 방향을 바꾼 기폭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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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 성지 멍하이.海현은 현대 보이차 트렌드를 주도하는 신新육대차산 핵심 기지다. 징마이산景邁山을 제외한 다섯 차산이 멍하이현에 몰려 있다. 전 세계 보이차 업계 1위 브랜드 '대익'을 탄생시킨 멍하이차창.海茶廠도 1940년부터 현재까지 멍하이현 소재지를 지키고 있다. 황실공차로 명성을 떨친 고古6대차산은 란창강 동쪽, 강을 건너지 않는 지역에 있어 일찌감치 중원에 알려졌다. 교량도 없던 시절 배 타고 란창강을 건너야만 갈 수 있었던 신육대차산은 강외江外차산으로 분류하며 차량이 다닐 도로도 하나 없는 열악한 험지였다.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있는 현 소재지를 벗어나면 차산에 사는 소수민족이 오가는 비좁고 가파른 산길로 이동해야 했다. 국경을 넘나드는 마방馬.이 개척한 협소한 차마고도가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교통로였다. 거친 자연환경과 중앙정부 장악력이 느슨했던 멍하이는 뒤늦게 주목받았다.
차마고도 출발지로서 정통성을 자랑하던 고6대차산은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에 발생한 전란과 화재로 쑥대밭이 됐다. 중국은 황폐와 쇠락을 거듭하는 고6대차산을 대체할 새로운 보이차 공급기지를 찾아야 했다. 란창강 너머 깊은 밀림 속에 있는 멍하이 지역 차나무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신육대차산에 산개한 차나무를 녹색 황금으로 만들려면 강력한 공권력이 필요했다. 1930년대 멍하이는 정글 법칙이 지배하는 무법천지였다.

新6대 차산의 핵심지, 멍하이
그 당시 멍하이 이름은 포하이佛海였다.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윈난에서도 서남쪽 끝자락 변방에 있는 오지였다. 미얀마(옛 버마)와 국경을 마주한 멍하이가 차마고도 요충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유명무실해진 고6대차산에서 발을 뺀 차 상인들이 멍하이로 넘어왔다. 그들은 차산을 지배하는 토사를 앞세워 찻잎을 헐값에 수매했다. 정부에서 임명한 멍하이 현장 리위모李毓謀는 공정한 법 집행을 내팽개치고 차 상인과 밀착해 차마고도를 통한 밀수출을 눈감아주고 사리사욕을 취했다. 이들이 찻잎 원가 100배 이상을 남겨 엄청난 돈을 버는 동안 산골에서 차나무를 키우는 소수민족은 여전히 헐벗은 삶에 허덕였다. 이런 불합리한 차 산업구조를 타개하고 티베트, 동남아, 유럽에 특화된 차를 만들어 수출 전략 물자로 육성해야 한다는 '푸하이 차 산업 개요'라는 논문을 1938년 리푸이李拂一가 발표했다. 리푸이가 차창을 운영하며 멍하이와 동남아 시장에서 겪은 생생한 체험을 녹인 논문은 중국 현대 차 산업 방향을 바꾼 기폭제가 됐다.
1937년 7월 발발한 중일전쟁에서 후퇴를 거듭하던 중화민국 정부는 군수물자 자금 확보를 위해 해외로 수출할 차가 간절했다. 윈난을 제외한 주요 차 생산지가 대부분 일본군 수중에 있었다. 윈난을 장악한 군벌 룽윈龍雲에게도 전략 물자인 '차'는 소중했다. 윈난 최초 현대식 차 공장을 길도 없는 난눠산 밀림 속에 설립하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룽윈은 전격 승인했다. 중앙정부 간섭을 피할 목적으로 윈난성 재정청장이었던 루총런陸崇仁을 시켜 사기업 형태로 투자했다. 수익과 세금은 모두 룽윈 몫이었다. 루총런이 신임하는 바이멍위白孟愚가 '난눠산시험차창' 설립자로 나섰다. 바이멍위가 뼈를 갈아 넣은 차 공장에서 나온 자금 덕분에 룽윈은 장제스로부터 윈난 경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푸하이 차 산업 개요'를 동시에 접한 중화민국 정부와 윈난 군벌 룽윈은 '생명줄과 같은 차 산업을 누구도 독점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권 분쟁으로 각을 세우기보다는 타협점을 찾았다.





중일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꼭 필요했던 茶
장제스가 이끄는 중화민국 정부와 룽윈이 장악한 윈난성 정부는 1938년 12월 16일 쿤밍에 본사를 둔 '윈난 중국차 공사'를 5:5 합작으로 공동 설립했다. 공사 공식 슬로건Slogan을 '차를 통해 나라를 구한다以茶救國'로 정했다. 윈난성 경제위원회 책임자로서 당연직 공사 이사장을 맡은 머윈타이繆雲臺는 핵심 국책사업이 된 차 산업 현대화 가능성을 타진할 적임자를 찾았다. '중국 현대 차의 아버지'라 불리는 우줴농吳覺農이 중국차 공사 소속 후베이성 은시恩施실험차창 부창장으로 재직하는 판허쥔范和鈞을 머윈타이에게 추천했다. 은시차창 책임자로 있는 우줴농은 판허쥔이 가진 재능과 열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줴농에게 차를 배운 판허쥔은 기계식 제다 공정 설계와 차 기계 제작을 직접 진두지휘했다. 그 과정에서 기계화 생산이 차의 품질을 고르게 만들고 수출 경쟁력을 높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1905년 일본에서 태어난 판허쥔은 북송시대 학자 판중옌范仲淹 27대손이다. 장쑤성 창수 출신 아버지가 일본 유학할 때 태어났다. 상하이로 돌아온 그는 1924년 상하이 푸둥 고등중학을 졸업했다. 성적 우수자에게 고등학교에서 지원하는 공비장학금公.奬學金을 받아 프랑스로 가서 파리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소르본'이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파리대학교는 유럽 최고 대학이었다. 그는 파리대학 의학부에 재학 중이던 뤄윈친婁允琴을 만나 파리에서 결혼했다. 중국 국내 사정으로 장학금이 중단되어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두 딸을 키우며 6년 만에 수학과를 졸업하고 1930년 귀국했다. 상하이 성심병원 부인과 의사로 근무하는 부인과 달리 판허쥔은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프랑스어 통역으로 살림에 보탰다.
1933년 5월 차 전문가 구보Courbot가 중국차 산지를 시찰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상하이로 왔다. 수행 통역관을 판허쥔이 맡게 됐다. 저장浙江, 안후이安徽, 짱시江西 등 중국 대표적인 차 생산지를 구보와 함께 탐방했다. 차와 인연이 멀었던 판허쥔이 차 세계로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수학을 배워 정밀한 분석력을 지닌 판허쥔은 프랑스 학자 구보가 조사하는 방식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중국 전통 녹차 제다 과정, 유통 구조, 위생 문제 등을 기록했다. 한 달 이상 지방을 다니며 조사를 마친 구보와 판허쥔은 상하이로 돌아왔다.

중국 현대 차 산업의 교과서
우줴농이 차 검역을 총괄하던 상하이 상품검사국을 방문한 구보가 판허쥔을 소개했다. 판허쥔은 구보와 함께 다니며 자신이 쓴 기록 '중국 양장 녹차洋莊綠茶 조사기'를 우줴농에게 보여 주며 가르침을 청했다. '양장 녹차'란 국내 소비용이 아닌 수출을 목적으로 가공·생산되던 녹차를 뜻한다. 판허쥔 노트에는 녹차색을 더 푸르고 선명하게 보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화학 안료를 사용하던 관행을 비롯해 차의 품질을 속여 부당 이득을 취하던 유통업계 비리 실태가 낱낱이 적혀 있었다. 내용을 살펴본 우줴농은 다음날부터 판허쥔이 상품검사국으로 출근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중국 양장 녹차 조사기'를 바탕으로 우줴농과 판허쥔이 공동 작업한 '중국차업문제'를 1937년 상하이에서 책으로 출간했다. 두 사람은 당시 중국차 산업의 핵심 문제점과 중국차 부활을 위한 구체적인 개혁 방향을 제시했다. 중국 지식인과 정부는 적나라한 중국차 산업 실태에 충격을 받은 동시에 희망을 봤다.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윈난성 대엽종 차나무가 어쩌면 황금알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했다. 항일 전쟁이 터진 상황에서도 장제스 정부는 국가 직영 차 전문 회사 '중국차업공사'를 서둘러 설립했다. 차 종주국이라는 자존심 이전에 전쟁 자금 확보를 위해 차로 외환을 벌어야만 했다.
'윈난 중국차 공사' 이사장 머윈타이가 멍하이 탐사 적임자로 선택한 판허쥔은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후베이성을 출발했다. 중국 동부 연안 및 주요 육로 교통망이 일본군에 의해 봉쇄되거나 위협받고 있었다. 전투 현장을 피해 안전한 후방 우회 경로를 이용해야만 했다. 판허쥔 가족은 국민당 정부 임시 수도 충칭을 경유해 윈난성 쿤밍에 1939년 3월 도착했다. 여장을 풀자마자 판허쥔은 칭화대학교를 졸업한 기술자 짱스청張石城과 함께 4월 1일 쿤밍을 떠나 멍하이로 향했다. 일본군이 봉쇄한 도로를 피해 판허쥔 일행은 따리大理, 바오산保山을 거쳐 국경을 넘었다. 영국령 버마(현재 미얀마) 남쪽 무역도시 양곤Yangon에서 리푸이를 만났다. 판허쥔이 쓴 서적 '중국차업문제'는 중국차업공사 설립 발화점이 됐고, 리푸이가 발표한 '푸하이 차 산업 개요'는 윈난 중국차 공사 탄생 모티브가 된 공통점이 두 사람에게 있었다. 중일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 확보를 위한 중국차 수출 최전선에 앞장선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윈난 법정대학을 나온 리푸이는 푸싱차좡復興茶莊을 경영하며 티베트와 미얀마에 차를 수출하는 멍하이 실력자였다. 멍하이현 교육국장을 지내며 소수민족 언어와 문화에 정통한 그는 판허쥔이 알 수 없는 현지 차 무역 생태계를 뼛속까지 꿰뚫고 있었다. 중앙정부가 내려보낸 판허쥔이 멍하이에서 환영받지 못할 외지인이라는 사실을 리푸이는 예견하고 있었다. 마방을 이끄는 리푸이는 길잡이가 되어 판허쥔 일행을 보호해 국경을 넘어 멍하이로 무사히 안착시켰다. 쿤밍을 떠난 지 57일에 걸친 험난한 여정이었다.
연고도 없고 갈 곳도 없는 판허쥔 일행에게 리푸이는 자택에서 숙식을 해결하도록 도움을 줬다. 멍하이에 입성한 판허쥔을 감시하는 눈초리가 여럿 있었다. 불법 이권 카르텔 정점에 있는 현장 리위모를 축으로 20여 개 차창 대표와 마방을 움직여 밀무역을 실행하는 차 상인이 볼 때 판허쥔은 물리쳐야 할 외지에서 온 적이었다. 신육대차산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세습 족장 토사들도 차 산업 실태를 파악하러 온 판허쥔을 경계하며 냉대했다. 윈난 군벌 룽윈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난눠산 차창 대표 바이멍위도 무시 못 할 경쟁상대였다. 사방이 적이었다. 무법지대 한가운데 무방비 상태로 뛰어든 셈이었다.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인물도 판허쥔을 사지로 몰아넣을 구실을 찾기 위해 현장 리위모와 긴밀히 내통하고 있었다.

<하편에 계속>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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