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에도 TPO가 있을까

이은선 2026. 10. 19.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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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투를 하면 연애 상대가 싫어할 수도 있을 텐데 괜찮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타투가 정치적 저항이라는 뜻은 아니다.

장애나 흉터가 있는 몸과 타투가 있는 몸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래서 '타투가 공적인 자리에 어울리는가'라는 질문 역시 타투라는 행위 하나만의 문제로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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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의 ‘틀을 벗어난’ 칼럼] 타투와 ‘정상적인 몸’의 정치

타투를 하면 연애 상대가 싫어할 수도 있을 텐데 괜찮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히려 그래서 더 타투를 하고 싶었다. 연애시장에서 조금 더 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는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 나를 계속 숨기고 싶지 않았다. ‘흠’이 없고, 무난하고, 누구에게나 선택될 가능성이 높은 몸이 되기보다, 나를 싫어할 사람에게는 일찌감치 걸러지는 편이 나았다.

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웃는다. 연애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일부러 ‘비정상성’을 부여하기 위해 몸에 무언가를 새긴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모양이다. 나는 그 웃음이 재미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이니 자유롭게 꾸미라고 하면서도, 그 자유가 향해야 할 방향은 꽤 명확하게 정해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 예뻐지기 위한 화장, 날씬해지기 위한 운동, 가지런해지기 위한 교정, 어려 보이기 위한 피부관리는 ‘자기관리’가 된다. 반면 피어싱이나 타투, 삭발처럼 사회가 기대하는 아름다움이나 단정함에서 멀어지는 선택에는 곧잘 질문이 따라온다.

“멀쩡한 몸에 왜 굳이?”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멀쩡한 몸’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 멀쩡한 몸에 왜 굳이 타투를 했냐는 질문을 받을 때, ‘멀쩡한 몸’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우리 몸은 애초에 자연 그대로 살아가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자르고 치아를 교정하고 근육을 만들고 살을 빼고 화장을 하고 피부를 관리하고 흰머리를 염색하지만, ‘자기관리’로 여겨질 뿐이다. [이은선 제공]

‘멀쩡한 몸’이라는 이상한 말

타투를 하지 않은 피부가 있고, 타투를 한 피부가 있다. 흔히 전자를 원래의 몸으로, 후자를 원래의 몸에 무언가를 한 상태로 생각한다. 물리적으로만 보면 맞는 말이다. 피부에 잉크를 넣었으니까. 하지만 우리의 몸은 애초에 ‘자연 그대로’ 살아가지 않는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털을 뽑고, 치아를 교정하고, 살을 빼고, 근육을 만들고, 화장을 하고, 염색을 하고, 피부를 관리한다. 어떤 사람은 쌍꺼풀을 만들고, 점을 제거하고, 코를 높인다. 어떤 변화는 ‘자기관리’라고 격려를 받지만, 어떤 변화는 ‘몸을 망치는 일’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몸을 인위적으로 바꾸었냐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바꾸었냐가 중요하다.

페미니즘은 오래전부터 몸이 단순히 개인에게 주어진 자연적인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이 새겨지는 장소라는 사실을 이야기해왔다. 바람직한 몸의 기준을 배우고, 그 기준에 맞춰 스스로 몸을 통제하고 관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의 몸에는 모순적인 요구가 따라붙는다. 꾸미지 않으면 자기관리를 하지 않는다고 하고, 지나치게 꾸미면 타인의 관심을 갈구한다고 한다. 성적 매력이 있어야 하지만, 과하게 성적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젊고 날씬해야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나에게 타투는 단순히 그림을 몸에 새기는 일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내 몸에 남기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든 타투가 정치적 저항이라는 뜻은 아니다. 누군가는 예뻐서 하고, 누군가는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하고, 누군가는 별다른 이유 없이 한다. 나 역시 타투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몸을 둘러싼 나의 선택이 사회와 무관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내 몸 자체가 언제나 정치적 선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몸이 아름답고 단정하고 정상적이며 ‘공적인 자리에 어울리는 몸’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이미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라는 뜻에 가깝다.

 

‘정상적인 몸’은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정상성’의 가장 강력한 힘은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타투가 없는 사람에게 우리는 “왜 타투를 안 했어요?”라고 묻지 않는다. 하지만 타투가 있으면 질문이 생긴다. 왜 했는지, 무슨 뜻인지, 부모는 뭐라고 했는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지, 취업할 때 어떻게 할 것인지…. 어떤 몸은 그냥 존재하지만 어떤 몸은 설명되어야 한다.

장애학자 레너드 데이비스(Lennard J. Davis)는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는 ‘정상적인 몸’이라는 관념 자체가 역사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지적한다. ‘정상’은 자연에 원래 존재하던 명확한 경계라기보다, 인간의 몸을 측정하고 평균을 만들고 그 평균을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과 연결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기준이 되어왔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정상적인 몸’은 단지 흔한 몸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상’은 그래야 하는 몸이 된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멀어진 몸에는 불편한 시선과 설명이 따라붙는다.

물론 흉터가 있는 얼굴이나 절단된 신체, 장애가 있는 몸이 경험하는 차별과 타투가 있는 몸이 경험하는 불편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차이를 지우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다른 몸을 바라보는 시선 앞에서 하나의 질문은 함께 던져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 어떤 몸은 아무런 설명 없이 한 사람의 몸이고, 어떤 몸은 그 모습이 된 이유부터 설명해야 하는 몸이 되는가.

“그래도 타투는 네가 선택했잖아!”

장애나 흉터가 있는 몸과 타투가 있는 몸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맞다. 타투는 내가 선택했다. 그래서 타투를 둘러싼 혐오나 불이익에 ‘자업자득’이라는 논리가 쉽게 붙는다. 취업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걸 몰랐느냐, 다른 사람들이 무섭게 볼 수도 있다는 걸 예상하지 못했느냐, 공적인 자리에서는 가려야 할 수 있다는 걸 알고도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했으니, 그 결과 역시 스스로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상태를 스스로 선택했다는 사실이 그 상태를 이유로 주어지는 불이익까지 스스로 선택했다는 뜻일까. 타투를 선택했다는 것은 타투가 있는 몸으로 살겠다는 선택이다. 그것이 취업에서 덜 신뢰받거나, 공적인 자리에서 몸을 가리거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의 ‘정상성’을 추가로 증명하며 살아가겠다는 데 동의했다는 뜻은 아니다.

온라인에서 타투에 관한 이야기를 보다 보면 “타투를 하고 나면 내가 정상인이라는 걸 증명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종종 마주친다. 타투가 있으니 오히려 더 친절해야 하고, 더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하고, 더 성실한 사람임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몸에 새겨진 이미지가 그 사람의 성격과 도덕성까지 먼저 추측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정상적인 사람’은 자신이 정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증명을 요구받는 순간, 이미 누군가는 정상의 바깥에 놓여 있다.

 

타투를 가려라?

여기서 한 가지가 더 이상하다. 우리는 정말 ‘타투’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걸까. 나이가 든 사람의 흐릿해진 눈썹을 또렷하게 만들기 위한 눈썹 문신을 보고 그 사람의 도덕성이나 직업적 자질을 의심하는 경우는 드물다. 눈썹에 색소를 넣는 일도 피부에 색소를 주입하는 행위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문제 삼는 ‘타투’의 이미지에서 빠져나간다. 반면 팔과 목, 손등에 드러나는 그림은 전혀 다른 의미를 얻는다. 같은 피부 위의 흔적이라도 그것이 어느 몸의 어느 부위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에 따라 하나는 미용이고, 다른 하나는 일탈이 된다.

▲ 자료 사진 - Image by Kyle McKaskle from Pixabay

몸을 둘러싼 다른 규범도 이와 비슷하게 작동한다. 같은 신체 부위라도 누구의 몸에 있느냐에 따라 가려야 할 것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특히 가슴을 둘러싼 규범을 생각하면 더욱 선명하다. 남성의 가슴과 여성의 가슴은 사회적으로 전혀 다르게 읽히고, 보여도 되는 범위 역시 다르게 규정된다. 몸은 그저 몸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 몸의 성별과 나이, 직업, 그 위에 남겨진 흔적과 그것이 놓인 장소가 함께 읽힌다.

그래서 ‘타투가 공적인 자리에 어울리는가’라는 질문 역시 타투라는 행위 하나만의 문제로 보기 어렵다. 누구의 어떤 타투를 우리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타투라고 의식조차 하지 않고, 누구의 어떤 타투를 보는 순간 그 사람의 인성과 정치적 태도와 직업적 자질까지 상상하기 시작하는가. 우리가 나누고 있는 것은 ‘타투가 있는 몸과 없는 몸’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몸과 그렇지 않은 몸인지도 모른다.

최근 기본소득당을 둘러싼 여러 논의 과정에서 한 정치인의 타투가 드러난 모습을 두고도 논쟁이 벌어졌다. 국회라는 공적인 장소에서 타투를 드러내는 것이 적절한지를 두고, 개인의 자유라는 의견과 공식적인 자리라면 가렸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섰다. 그 논쟁을 보면서 다시 ‘TPO’(때와 장소와 상황에 맞게)라는 말을 생각했다. 물론 우리는 장소에 따라 옷을 다르게 입는다. 장례식과 수영장에 같은 옷을 입지는 않는다. 어떤 자리에서 일정한 복장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정장을 갖춰 입은 사람에게 그 아래 드러난 타투까지 가리라고 요구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타투는 아침마다 골라 입는 티셔츠가 아니다. 이미 그 사람 몸의 일부다. 그렇다면 “국회에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말과 “국회에 어울리는 피부를 보여야 한다”는 말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간격이 있다.

그 사람이 흐트러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의 모습이 흐트러진 것은 아닐까. ‘정치인은 이렇게 생겨야 한다. 교사는 이렇게 생겨야 한다. 회사원은 이렇게 생겨야 한다. 여성은 이렇게 보여야 한다.’ 그 기준에서 벗어난 몸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 낯섦을 ‘TPO’라는 말로 설명한다. 그래서 TPO라는 말은 옷에 대한 규칙을 넘어, 어떤 모습의 사람이 그 공간에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질문을 반대로 던져 보자

왜 우리는 어떤 몸은 가려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왜 어떤 몸의 변화는 자기관리가 되고 어떤 변화는 훼손이 되는가. 왜 어떤 타투는 미용이 되고 어떤 타투는 일탈이 되는가. 왜 어떤 몸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고, 아무것도 해명하지 않고,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채 공적인 공간에 들어갈 수 있을까.

나의 몸이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래서다. 내 몸에 새긴 그림 하나하나가 정치적 선언이어서가 아니다. 어떤 몸은 그대로 존재할 수 있고 어떤 몸은 가리고 설명하고 자신의 괜찮음을 증명해야 한다면, 몸을 둘러싼 그 경계 자체가 이미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투를 가려야 하느냐고 묻기 전에, 다른 질문을 먼저 해보고 싶다. 어떤 몸은 왜 가리지 않아도 되는가.

 

[필자 소개] 이은선 : 고등학생 시기 학칙 개정과 학생인권조례 제정 활동을 하며 청소년 인권 운동을 만났다. 청소년이 학교와 사회에서 그저 버티는 존재가 아니라, 부당한 순간에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시민이 될 수 있기를 고민하며 활동해 왔다. 현재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폭력에 반대하며 비건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청소년-시민입니다』, 『노키즈존 한국 사회』 등을 공저했고 청소년의 경험과 권리, 젠더화된 규범에 대해 글을 써왔다. 주변 존재들에 물들고, 물들이는 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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