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저작권 빈틈 타고… 국내 AI기업도 ‘헌책 사냥’ [탐사기획-학습데이터 부적절 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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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지에서 잇따르는 실체가 불분명한 헌책 대량 주문이 인공지능(AI) 업체가 벌인 일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AI 업체의 중고 서적 확보 움직임이 포착됐다. 수요의 배후에 거대 기술기업이 있다는 의혹은 지속적으로 제기됐지만, 국내 AI 기업이 직접 헌책 매입에 나선 사실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중고 서적 확보 움직임도 자사 AI 모델의 학습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 일부 헌책방 역시 지난 몇 달 사이 AI 업체발로 추정되는 대량 매입 문의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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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1만여권 매입 희망”
중고 서점에 거래 제안 메일
모델성능 향상 학습용도 추정
주문 목록 80% ‘발간 20년 이상’
사서들 “흔한 베스트셀러도 없어
독서·소장 목적으로 보기 어려워”
일부 출판사에도 구매 문의 지속
세계 각지에서 잇따르는 실체가 불분명한 헌책 대량 주문이 인공지능(AI) 업체가 벌인 일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AI 업체의 중고 서적 확보 움직임이 포착됐다. 수요의 배후에 거대 기술기업이 있다는 의혹은 지속적으로 제기됐지만, 국내 AI 기업이 직접 헌책 매입에 나선 사실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AI 모델의 성능을 향상하기 위해 종이책을 학습 데이터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현실화하면서 저작권 침해 여부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도 촉발될 전망이다.
18일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AI 스타트업 스캐터랩은 지난달 초 수도권에 있는 한 중고 서점에 대규모 헌책 거래를 제안했다. 스캐터랩 소속 한 머신러닝 엔지니어는 이메일을 통해 “중고 도서를 대량으로 매입하려고 알아보던 중 귀사의 재고 규모를 보고 연락드린다”며 구매 가능 여부를 문의했다.

스캐터랩은 AI로 생성된 가상 캐릭터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제타’를 운영 중인 업체다. 이 업체는 과거 AI 모델 학습용 데이터를 부적절한 방식으로 수집한 사실이 적발된 바 있다. 자사의 다른 서비스인 ‘연애의 과학’을 통해 이용자들의 실제 카카오톡 메신저 대화 내용 약 90억건을 확보한 뒤 이 중 일부를 AI 챗봇 ‘이루다’에게 학습시킨 것이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2021년 4월 스캐터랩에 과징금 5550만원, 과태료 4780만원을 부과했다. 서울동부지법 민사15부는 지난해 7월 스캐터랩이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들에게 10만∼40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미국 법률 판례 데이터베이스인 ‘코트리스너(Court Listener)’에 관련 재판 증거물로 공개된 앤트로픽의 내부 문서 중에는 “더 높은 품질의 데이터(특히 인터넷에 공개돼 있지 않은 책)를 추가하면 더 작고 저렴한 모델이 더 큰 모델을 능가할 수 있다”, “어쩌면 고품질 책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콘텐츠일지도 모른다” 등의 대목이 있다. “중고 서적은 우리가 공략하려는 영역이다. 현재까지는 주로 평판 있는 도매업체 두어 곳을 통해 중고 서적을 구매해 왔다”는 언급도 눈길을 끈다.

국내 일부 헌책방 역시 지난 몇 달 사이 AI 업체발로 추정되는 대량 매입 문의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취재팀이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9일까지 서울·인천·경기 지역 소재 헌책방 중 보유 서적이 1만권 이상인 업체 44곳을 전수조사한 결과, 5곳이 최근 적게는 6000여권에서 많게는 1만여권에 달하는 양의 구매 문의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관련해 헌책방 업주들은 “이례적인 규모의 주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경기 평택시에서 50년 이상 서점을 운영했다는 A씨는 “6000∼7000권이면 서점 하나를 새로 차리는 수준”이라며 “그 정도 주문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권당 3000원으로 책정해도 1800만∼3000만원 규모의 거래다. 일반적인 단행본 약 300g을 기준으로 잡으면 최대 3t에 육박한다.
문의를 받은 업주 상당수는 거래 상대방의 정체나 주문한 책의 용도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한 헌책방은 주문자로부터 ‘해외 도서관 납품용’이라는 설명만 들었다고 했다.

현직 도서관 사서들은 해당 목록에 대해 의구심을 표했다. 경기 지역에서 근무하는 사서 곽모씨는 “메이저 출판사의 흔한 베스트셀러조차 한 권도 보이지 않는다”며 “일반적인 도서관에서 살 만한 책들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제주 지역 사서 김모씨 역시 “소장가치가 있는 게 아니면 출간된 지 3년이 지난 책들은 구입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독서나 소장 자체가 목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물류업체 B사 측은 도서 매입 목적이 AI 모델 학습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업체 사장은 취재팀과의 통화에서 “방탄소년단의 영향으로 전 세계적으로 한국 음식·문화·음악 등이 굉장히 흥행을 하고 있어, 파트너사가 해외에 한국어 헌책을 판매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이라며 “헌책방에서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아직 구매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일부 출판사에도 수상한 구매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경기 파주출판단지에 소재한 업력 20년 이상의 한 출판사는 올해 5월부터 세 차례 각각 200∼300권 규모의 주문을 받고 자사 서적을 납품했다. 이 출판사 대표는 “아주 오래전에 출간한 서적부터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들까지 문학 위주로 각각 1권씩 주문을 받았다”며 “예전에 절판된 책들도 주문 목록에 포함돼 있었는데, 마침 파본이 회사 창고에 있어 물량을 맞출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출판사 역시 최근 같은 업체에 700여권을 납품했다. 이들 출판사에 책을 주문한 업체 역시 ‘해외 도서관 납품용’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탐사보도2팀=백준무·이예림·최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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