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탐구생활] 사람처럼 걷고 느끼는 로봇… KAIST, 움직이는 AI시대 연다

이성현 기자 2026. 10. 18.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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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Physical AI KOREA 2026’ 현장을 가다
휴머노이드·로봇 조종사·자율 초음파 기술 한자리에
두 발·네 발 로봇 협업…항공기 조종부터 의료까지
KAIST, 로봇 연구원 설립·5대 공통 플랫폼 개발 추진
정부 내년 3조1000억원 투입…산업화 본격 시동
핵심 부품·지능 알고리즘 자립은 향후 과제
13일 대전 KAIST 본원에서 열린 ‘피지컬 AI 2026 비전 선포식‘에서 박해원 KAIST 기계공학과 교수 연구팀이 개발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KAIST 중 ‘K’ 글자를 몸으로 밀어 이동시키고 있다. 이성현 기자

“오늘 시연이니까 문워크가 빠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 13일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 본원 KI빌딩 무대. 키 180㎝가 넘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음악에 맞춰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를 선보이자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어 로봇은 20㎏ 무게의 커다란 상자를 두 팔로 밀어 옮기더니, 영문 알파벳 구조물을 하나씩 움직여 ‘KAIST’라는 문자를 완성했다.

박해원 KAIST 기계공학과 교수 연구팀이 개발한 이 로봇은 사람처럼 두 발로 걷는 것은 물론, 몸통과 팔을 이용해 무거운 물체를 옮기는 능력을 선보였다. 단순히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물체의 크기와 위치에 맞춰 전신을 움직이는 기술이다.

이날 KAIST가 선보인 것은 휴머노이드뿐만이 아니었다. 두 발·네 발 로봇의 협업부터 항공기를 조종하는 로봇, 환자의 몸을 검사하는 초음파 로봇까지 다양한 기술이 한자리에 등장했다. 인공지능(AI)이 화면 속 가상 세계를 넘어 현실을 인식하고 직접 움직이는 ‘피지컬 AI(Physical AI)’ 시대가 성큼 다가왔음을 보여준 현장이었다.

명현 KAIST 교수가 13일 대전 KAIST 본원에서 열린 ‘피지컬 AI 2026 비전 선포식‘에서 사족보행로봇 ‘테리-큐(TERI-Q)’를 소개하고 있다. KAIST 제공

■ 두 발·네 발 로봇의 협업… 로봇 간 역할 분담 ‘눈길’

“지원아, 책상 좀 정리해 줘.”

명현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지시에 사람처럼 두 발로 걷는 휴머노이드 ‘지원’이 탁자를 향해 움직였다. 곁에는 네 발로 걷는 사족보행 로봇 ‘테리-큐(TERI-Q)’가 함께했다.

지원은 탁자에 놓인 물건을 확인하고 어떻게 처리할지 물었다. 명 교수가 파우치를 정리하도록 지시하자 손에 해당하는 그리퍼로 파우치를 집어 들었다. 이어 테리-큐의 등에 실린 상자 안으로 옮겼다. 테리-큐는 무대에 놓인 장애물을 지나 이동하며 역할을 나눠 수행했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정리 작업이지만 두 로봇에는 서로 다른 기술이 적용됐다. 이날 처음 공개된 ‘테리-큐’는 카메라나 라이다 없이도 관절과 모터 등에 전달되는 감각을 이용해 지형을 추정하며 걷는 ‘드림워크’ 기술을 활용한다. 사람이 눈을 감고 걸을 때 발에 전해지는 감각으로 바닥 상태를 파악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지원’의 역할은 물체를 인식하고 집는 것이다.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파우치를 잡으려면 위치뿐 아니라 손에 가할 힘까지 조절해야 한다. 단순히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는 산업용 로봇과 다른 점이다.

KAIST가 주목하는 것은 이처럼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로봇의 협업이다. 한 대의 로봇에 모든 기능을 집어넣기보다 각자의 강점을 살려 공동 작업을 수행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공장이나 물류창고처럼 여러 기계가 동시에 움직이는 공간에서 협업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든다는 계획인 것이다.

배현민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가 13일 대전 KAIST 본원에서 열린 ‘피지컬 AI 2026 비전 선포식‘에서 로봇팔 초음파 스캔 시스템을 시연하고 있다. KAIST 제공

■ 항공기 조종부터 초음파 검사까지…현실로 나온 로봇 기술

심현철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연구팀은 항공기나 선박 조종석에 앉아 사람이 사용하는 장치를 직접 조작하는 인간형 로봇 ‘파이봇(PIBOT)’을 소개했다. 계기판과 운항 정보를 분석하고, 조종간과 각종 스위치를 사람처럼 다루는 방식이다. 자동조종장치가 조종사의 개입을 전제로 제한된 영역에서 작동한다면 파이봇은 기존 항공기의 조종석 자체를 활용해 더 넓은 범위의 조종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목표다.

연구팀은 해군과 협력해 함정 조종 시뮬레이터에서 파이봇이 조타 장치를 조작하는 기능도 검증했다. 항공기와 함정 등 서로 다른 기종과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로봇 조종사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의료 분야에서는 배현민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연구팀의 자율 초음파 로봇팔이 소개됐다.

배 교수가 가리킨 로봇팔 끝에는 초음파 탐촉자가 달려 있었다. 의료진이 환자의 몸에 탐촉자를 대고 움직이면서 장기를 찾는 것처럼 로봇이 스스로 검사 위치와 방향을 조절하는 기술이다.

약 58만5000개의 다중 시점 초음파 프레임 데이터를 사전 학습한 이 로봇은 월드 모델(World Model)을 활용해 탐촉자(Probe)를 움직였을 때 내부 장기 모습이 어떻게 변화할지 정밀하게 예측한다.

배 교수는 로봇팔을 가리키며 “이 로봇 안에 숙련된 방사선과 전문의 한 명이 들어있는 셈”이라며 “환자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실시간 동작을 설명하고, 적정 압력을 유지해 환자의 고통을 줄이면서 신뢰도 높은 3차원 영상 재구성이 가능하다”고 소개했다.

배충식 KAIST 총장이 13일 대전 KAIST 본원에서 열린 ‘피지컬 AI 2026 비전 선포식‘에서 웨어러블 로봇을 직접 착용하고 있다. 이성현 기자

■ 로봇 입은 배충식 총장… “움직이는 AI 시대, 한국이 연다”

“이 로봇은 제 걸음을 돕는 동시에 제 걸음을 읽고 있습니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배충식 KAIST 총장의 등장이었다.  배 총장은 공경철 기계공학과 교수 연구팀이 개발한 웨어러블 로봇을 착용한 상태로 무대에 올랐다.

배 총장은 “제가 이 연단까지 걸어오는 동안 로봇은 제 다리의 힘과 균형, 걸음의 리듬을 측정했고 인공지능은 그 데이터로 제 몸의 상태를 읽어냈다”며 “로봇이 사람을 돕는 기계를 넘어 사람을 이해하는 감각이 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앞서 공 교수 연구팀은 2024년 국제 장애인 보조로봇 경연대회 ‘사이배슬론’에서 웨어러블 로봇 종목 우승을 차지했다. 보행이 어려운 사람의 움직임을 돕던 기술은 이제 착용자의 신체 상태를 분석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다만 배 총장은 개별 로봇 성능보다 그 기술이 필요한 이유를 강조했다.

그는 “일할 사람은 줄고 돌봐야 할 사람은 늘어난다. 공장에서, 병원에서, 농어촌에서, 그리고 국경에서 사람의 손이 닿지 못하는 자리가 매일 생겨나고 있다“며 ”이번 전환에서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투자의 규모가 아니다.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기술의 기반이며 그 기반 위에 설 사람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KAIST는 △특정 로봇에 국한되지 않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공통 플랫폼 기술 구축 △제조·의료·국방·물류·일상 전반으로 기술 보급 △젊은 연구자 양성과 기술 창업 지원 및 산업현장 종사자 재교육 확대 △산학협력과 국제 공동연구를 통한 연구 성과의 현장 확산 등 4대 추진 방향을 제시했다.

배 총장은 “기술의 전환은 곧 사람의 전환이어야 한다”며 “생각하는 AI의 시대는 세계가 열었지만 움직이는 AI의 시대는 대한민국이 열겠다”고 약속했다.

배충식 KAIST 총장이 13일 대전 KAIST 본원에서 열린 ‘피지컬 AI 2026 비전 선포식‘에서 웨어러블 로봇을 착용 후 KAIST 4대 추진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KAIST 제공

■ 로봇 연구원 설립 추진… 5대 플랫폼 기술로 지원

KAIST는 ‘로봇 연구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모델은 미국 카네기멜론대의 ‘로보틱스 인스티튜트‘다. 여러 연구팀이 공동 연구시설과 실험 공간을 활용하면서 기술을 축적하고 이를 산업과 창업으로 연결하는 체계다.

KAIST가 기업들에 판을 깔아주려는 핵심은 5대 공통 플랫폼 기술이다. △액추에이터 △물리 데이터 측정·처리 △데이터센터 △운동지능 △감각지능이 그 대상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피지컬 AI가 내세울 수 있는 최대 무기로는 ‘제조업 현장 데이터’가 있다. 가상 공간이 아닌 실제 공장과 병원 바닥에서 매일 쏟아져 나오는 물리 데이터야말로, 현실 세계를 학습해야 하는 피지컬 AI에겐 대체 불가능한 핵심 자원이기 때문이다.

다만 국내 연구기관과 기업들이 개별 기술 개발에만 매달려서는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왔다. 연구진은 국내 기업과 연구기관들이 똑같은 기술을 중복 개발하며 힘을 뺄 게 아니라, 각자 잘하는 분야에 집중하고 원천 기술은 개방·공유하는 판을 짜야 글로벌 판도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기술의 현장 적용에도 과제가 남았다. 이날 휴머노이드 시연에서는 바닥 표면이 일정하지 않아 로봇이 카이스트 글자 구조물을 옮기던 중 잠시 움직임을 멈추기도 했다. 연구진이 동작을 조정한 뒤 시연은 이어졌지만, 주변 환경의 작은 변화에도 로봇의 움직임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연구진은 “당장 오늘 시연에서도 조명 조건 등이 변하면 잘 안 될 때가 있다”며 다양한 환경에서 데이터를 모아 학습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결국 연구실에서 구현한 기술을 실제 산업현장에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피지컬 AI 상용화의 핵심 과제인 셈이다.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 본원에서 열린 ‘Physical AI KOREA 2026’ 행사에서 KAIST 교수들이 피지컬 AI 기술과 산업화 방향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성현 기자

  ■ 내년 3.1조 투입에도… “껍데기보다 기초체력 키워야”

정부도 피지컬 AI 산업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내년 범정부 피지컬 AI 예산은 3조1000억원으로 올해 9000억원보다 약 3.4배 늘어난다. 전체 AI 예산 16조4000억원의 18.9%에 해당한다.

행사가 끝난 후 현장에서 만난 공경철 KAIST 기계공학과 교수는 국내 피지컬 AI 산업의 가장 치명적인 병목 현상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공 교수는 “최근 피지컬 AI 연구개발 흐름을 보면 너무 급한 상황이다. 기초가 없는 상황에서 부품을 미국과 중국에서 사 와 빨리 무언가를 만들려고만 하다 보니 겉모양만 만드는 개발이 반복되고 있다”면서 “그러다 보니 결국 로봇의 ‘겉모양(껍데기)’만 만드는 소모적 개발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엔비디아가 오랜 기간 그래픽처리장치(GPU) 기술을 축적한 끝에 현재의 경쟁력을 갖췄다는 점을 사례로 들었다. 피지컬 AI 역시 완성품을 서둘러 만드는 것보다 핵심 부품과 기반 기술을 꾸준히 발전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이어 공 교수는 “지금이라도 한 템포 쉬어가는 느낌이 들더라도, 핵심 부품과 지능 알고리즘을 우리 기술로 직접 다지는 것이 오히려 피지컬 AI 강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라며 “정치권을 포함해 전 국민적으로 피지컬 AI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큰데, 아직은 실체를 많이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이번 행사가 (국민들에게) 피지컬 AI가 왜 필요하고 어떤 단계를 밟아 발전하고 있는지 희망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대전=이성현 기자 andy043@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