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째 사랑하고 배신한다…‘클로저’는 왜 늙지 않을까

양형모 기자 2026. 10. 18.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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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 태어난 연극이 2026년에도 새 캐스팅으로 돌아왔다. 패트릭 마버의 '클로저(Closer)'다.

왜 '클로저'는 29년이 지나도록 관객에게 여전히 가까운(Closer) 연극일까.

'클로저'의 29년 전 에피소드들은 지금 우리의 일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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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런던 초연, 국내 11번째 시즌 맞은 ‘클로저’ 29년 전 온라인 채팅과 가짜 신분…SNS 시대에도 낯익은 사랑 문근영·이윤지·안소희·전성민, 배우마다 달라지는 앨리스 대본은 그대로, 관객은 나이를 먹는다…거듭 봐도 새로운 이유

서로 다른 곳을 향한 앨리스(전성민)와 댄(강영석). 사랑했던 두 사람 사이에 쓸쓸한 거리감이 감돈다. 양형모 기자
[스포츠동아 양형모 기자] 1997년에 태어난 연극이 2026년에도 새 캐스팅으로 돌아왔다. 패트릭 마버의 ‘클로저(Closer)’다.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지 29년. 국내에서는 2005년 처음 무대에 오른 뒤 2010년, 2013년, 2016년, 2024년 등을 거쳐 2026년 11번째 시즌을 맞았다. 연극 한 편이 20년 넘게 배우를 바꿔가며 다시 관객을 만나는 일은 흔하지 않다.

왜 ‘클로저’는 29년이 지나도록 관객에게 여전히 가까운(Closer) 연극일까.

네 남녀의 이야기다. 부고 기사를 쓰며 작가를 꿈꾸는 댄은 거리에서 앨리스를 만나 연인이 된다. 앨리스의 삶을 소설로 쓴 그는 사진작가 안나에게 끌리고, 피부과 의사 래리까지 끼어들면서 네 사람의 사랑은 꼬이기 시작한다. 사랑하고, 속이고, 의심하고, 헤어진다. 사건만 놓고 보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세부를 들여다보면 얘기가 꽤 달라진다.

앨리스 역의 전성민. 검은 가죽재킷 차림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 웃음 뒤에 감춰진 앨리스의 속마음은 좀처럼 읽기 어렵다. 사진제공|레드앤블루
연극 ‘클로저’에서 안나 역의 리사. 검은 정장 차림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모습에서 안나 특유의 우아함과 차분함이 느껴진다. 사진제공|레드앤블루
댄은 온라인 채팅방에서 안나 행세를 하며 중년의 의사 래리와 대화한다. 그 거짓말은 래리와 실제 안나의 만남까지 만들어낸다. 1997년에는 낯설었을 이 일이 지금은 별로 놀랍지 않다. 익명 계정, 가짜 프로필, SNS 속 또 다른 자아, 데이팅앱에서 만난 낯선 사람. ‘클로저’의 29년 전 에피소드들은 지금 우리의 일상이 됐다.

기술은 달라졌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 네 사람은 상대의 과거를 알고 싶어 하고, 누구를 더 사랑했는지 확인하려 들며, 듣고 나면 상처받을 답까지 끝내 묻고 만다. SNS가 없던 시대의 사람들이지만 행동은 지금과 차이가 없다. 연락과 관계의 도구는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질투와 소유욕은 새 버전을 내놓지 않았다.

래리 역의 오만석이 안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다. 다정한 얼굴 뒤에 질투와 소유욕을 감춘 남자다. 사진제공|레드앤블루
인물들의 직업도 흥미롭다. 댄은 죽은 사람의 삶을 글로 정리하는 부고 기자이고, 안나는 사람의 얼굴을 찍는 사진작가, 래리는 피부를 들여다보는 의사다. 셋 모두 남을 기록하거나 관찰하고 살피는 일을 한다. 그런데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속마음은 제대로 읽지 못한다. 제목이 ‘클로저’라는 사실이 이 대목에서 쿡 하고 옆구리를 찌른다.

‘클로저’가 재공연에 강한 또 다른 이유는 배우에게 맡겨진 몫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앨리스가 그렇다.

앨리스는 자신의 과거를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정체를 짐작할 만한 말을 남기지만 그것마저 사실인지 확신하기 어렵다. 그런데 공연이 끝난 뒤 대사를 되짚어보면 거짓말처럼 들렸던 말들 가운데 진실이 숨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배우가 어느 대사에 힘을 주고 어떤 말에 슬픔을 담느냐에 따라 앨리스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연극 ‘클로저’ 공연장의 캐스팅 보드. 이날은 오만석(래리), 리사(안나), 강영석(댄), 전성민(앨리스)이 무대에 올랐다. 양형모 기자
2010년 문근영, 2013년 이윤지, 2024년 안소희, 2026년 전성민의 앨리스를 봤다. 네 배우가 같은 인물을 맡았지만 기억 속 앨리스는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배우의 앨리스는 베일에 싸인 여자였고, 어떨 때는 쉽게 사랑하고 쉽게 돌아서는 사람으로 보였다. 자신의 삶 대부분을 거짓으로 감춘 여자로 읽히는가 하면 진실과 거짓말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침묵과 이별을 선택한 사람이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어느 하나의 해석만 맞다고 하기 어렵다. 희곡 안에는 그 모든 가능성이 함께 들어 있을 것이다.

안나의 사진전에 걸린 앨리스(소주연)의 흑백 초상. 텅 빈 무대에 남겨진 앨리스의 얼굴이 묘한 쓸쓸함을 자아낸다. 사진제공|레드앤블루
그래서 이미 줄거리를 아는 관객도 다시 공연장으로 향하게 된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번에는 어떤 앨리스를, 어떤 안나를, 어떤 댄과 래리를 만나게 될지가 궁금한 것이다. 가령 댄이 앨리스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대목도 앨리스를 어떤 여자로 그리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상처받은 연인의 절박한 호소가 되기도 하고,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는 가혹한 추궁이 되기도 한다. 앨리스가 달라지면 댄까지 달라 보이는 것이다.

‘클로저’를 다시 보는 재미는 배우가 바뀌는 데에만 있지 않다. 관객도 그사이 나이를 먹고, 사랑하고, 헤어진다. 스무 살에는 앨리스의 당당함이 쿨해 보였다면, 마흔 살에는 그가 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헤아리게 된다. 대본은 그대로지만, 세월이 흐르면 관객의 눈에 들어오는 인물도 달라지는 것이다.

세상은 ‘클로저’보다 훨씬 빨리 변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인간은 생각보다 멀리 가지 못한 모양이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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