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사랑’ 속 카메라가 지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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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사랑'은 이창동 감독이 '버닝'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관객이 진짜 호석과 미옥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영화의 끝에서 카메라가 뒤돌아서면서다.
미국 심리학자 셸리 테일러와 수전 피스크는 1970년대 실험에서 사람들이 눈앞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사람을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 바 있는데, 이를 영화로 바꾸자면 카메라가 프레임 한가운데 놓은 사람은 그것만으로 이야기의 원인으로 지목된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영화는 분명 네 사람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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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사랑’은 이창동 감독이 ‘버닝’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2026년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이 영화에 관해 감독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10여 년 전 해고 노동자를 다룬 영화를 준비하다 접었고, 그 이야기가 오랜 시간을 거쳐 두 부부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해고라는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눈에 더 오래 머문다. 행인들이 주인공을 가리고 지나가는 불안한 커트로 시작하는 영화는 곧이어 다큐멘터리를 찍는 과정으로 옮겨간다.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는 해고 노동자 호석(설경구)과 그의 아내 미옥(전도연)의 삶을 카메라에 담는다. 164분 동안 관객은 대부분 예지의 렌즈 뒤에 서서 호석의 침묵을 지켜보고, 미옥의 표정을 읽고, 그들의 선택에 이유를 붙인다. 관객이 진짜 호석과 미옥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영화의 끝에서 카메라가 뒤돌아서면서다. 다큐멘터리 촬영이 중단되고 관객은 비로소 부부의 시점으로 초대된다. 호석과 미옥은 여태 지켜봐왔던 것처럼 문제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상한 평온함에 감싸여 있다. 고작 시점이 바뀌었을 뿐인데 왜 이해가 송두리째 달라질까?
호석의 분노는 어디에서 왔나
“내가 약속에 늦으면 길이 막혔기 때문이고, 동료가 늦으면 그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1971년 미국 심리학자 에드워드 존스와 리처드 니스벳은 사람들의 이러한 응답 경향을 ‘행위자-관찰자 비대칭’이라 불렀다. 행동하는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보고, 지켜보는 사람은 행동하는 그 사람을 본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다르니 원인을 찾는 곳도 달라진다는 것이 존스와 니스벳의 해석이었다.
같은 일이 관찰자 자리에 선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로 벌어진다. 다큐멘터리 카메라가 호석의 얼굴을 비출 때, 그가 매일 마주하는 세계는 자연스럽게 흐려진다. 그래서 화면 속 호석의 무기력과 분노는 쉽게 ‘호석이라는 인물’의 특징으로 환원돼 읽히게 된다. 미국 심리학자 셸리 테일러와 수전 피스크는 1970년대 실험에서 사람들이 눈앞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사람을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 바 있는데, 이를 영화로 바꾸자면 카메라가 프레임 한가운데 놓은 사람은 그것만으로 이야기의 원인으로 지목된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시점을 바꿔주면 어떻게 될까? 1973년 미국 심리학자 마이클 스톰스는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다. 처음 만난 두 사람에게 대화를 나누게 하고, 카메라 두 대가 두 사람의 모습을 각각 정면에서 촬영했다. 이후 일부 참가자에게는 자신의 시점에서 찍힌 영상을, 다른 참가자에게는 상대편 자리에서 찍힌 영상을 보여줬다. 실험의 핵심은 ‘행위자-관찰자 비대칭’이 역전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자기 시점으로 된 영상을 본 사람들에게서는 당연하게도 고전적 비대칭이 그대로 나타났다. 하지만 상대 시점의 영상을 본 사람들에게서는 그 경향이 거꾸로 뒤집혔다. 자기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자, 당사자는 자신의 행동 원인을 상황이 아니라 성격 탓으로 돌렸다.
관찰자에서 행위자가 된 관객
‘가능한 사랑’의 마지막 장면은 마이클 스톰스의 실험을 영화로 옮겨놓은 것처럼 보인다. 관객은 2시간30분이 넘도록 관찰자 자리에서 판단하는 위치에 있다가 마지막 순간 술자리에 동석한 행위자의 자리로 옮겨진다. 그러나 관객이 보는 것은 지금까지와 같은 호석, 지금까지와 같은 미옥. 그 장면에서 새로 얻게 되는 정보나 놀라운 반전은 따로 없다. 그들은 그들이 인터뷰 중에 했던 말대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장면은 두 인물, 특히 호석에 대한 관객의 느낌을 송두리째 뒤바꿔놓는데, 이때 무너지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두 인물에 대한 판단 내용이 아니라 둘을 판단하던 관객의 확신이다.

논의를 더 확장해 보자. 지금까지 다룬 행위자-관찰자 비대칭은 어디까지나 사소한(혹은 일상적인) 행위에 관한 실험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중대한 사안에서 인간은 좀더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이에 관한 연구도 살펴보자. 미국 심리학자 대니얼 래시터는 1980년대부터 경찰의 신문 영상을 연구했다. 그는 하나의 신문을 세 가지 시점으로 나눠 찍었다. 카메라가 용의자를 비추는 버전, 형사를 비추는 버전, 둘을 똑같이 비추는 버전이다. 용의자를 비춘 영상을 본 사람들은 강압이 가장 적었다고 판단했고, 형사를 비춘 영상을 본 사람들은 강압이 가장 컸다고 판단했다. 이 실험의 독특성은 그 결과의 끈질김에 있다. 비대칭은 모의재판에서 판사가 주의하라고 경고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실제 경찰이 녹화한 신문 영상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프레임 밖에서 오는 압력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도 끈질기게 간과됐다.
‘가능한 사랑’의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가 바로 그 프레임 밖의 존재다. 카메라가 호석과 미옥에 집중할 때, 그들을 찍는 예지와 그의 남편 상우(조인성)가 과거의 사태에 무엇을 보태고 있는지는 화면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과거의 실직 사건과 폭력적인 시위 진압이라는 사태에 프레임 밖의 관찰자들은 관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분명 네 사람의 이야기다. 예지와 상우의 욕망은 관찰 대상인 호석과 미옥의 삶을 흔들고 그들의 작은 평화를 침해한다. 그들의 현재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과거까지도.
시점의 문제는 타인을 볼 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기억할 때도 작동한다. 1983년 인지심리학자 조지아 니그로와 울릭 나이서는 사람들이 과거를 두 가지 방식으로 떠올린다는 점을 밝혔다. 내 눈으로 과거를 다시 보는 ‘현장 기억’과 장면 속의 나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관찰자 기억’이다. 후속 연구들은 관찰자 시점으로 떠올린 기억이 감정적으로 덜 강렬하다는 사실을 보였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바깥에서 바라보면 감정의 강도가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트라우마 연구자들은 관찰자 시점을 고통을 피하는 방식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현장 기억과 관찰자 기억이 그 내용상에서도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캐나다 심리학자 헤더 맥아이작과 에릭 아이크에 따르면 현장 시점의 기억에는 당시의 감정과 신체 감각이 더 많이 담겼고, 관찰자 시점의 기억에는 외모나 공간 배치 같은 바깥의 정보가 더 많이 담겼다.
삶을 뒤흔들 어떤 심판대
총파업과 해고의 상처를 안고 사는 호석은 영화 후반까지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을 거부한다. 카메라가 그에게 강요하는 것은 관찰자 기억이 아니라 현장 기억이다. 고통을 다시 헤집으라고 요구하는 것이고, 행위자-관찰자 비대칭 관계에서 행위자 위치에 서라는 것이다. 어쩌면 호석이 카메라에 찍히기를 끈질기게 거부했던 것은 이를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카메라에 대고 이야기하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하리라는, 자신이 어떤 심판대에 오르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서윤빈 소설가
*서윤빈의 과학 읽다: 세상 모든 콘텐츠에서 과학을 추출해보는 시간. 공대 출신 SF 소설가가 건네는 짧고 굵은 과학잡학.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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