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서로 잡아먹는 게 살 길… 파라마운트도 워너브러더스도 사라진다

정준기 2026. 10. 17.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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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 문화평론가가 요즘 대중문화의 '하입(Hype·과도한 열광이나 관심)' 현상을 예리한 시선으로 분석합니다.

나는 LG 휴대폰을 썼다.

나는 오랜 영화 꼰대로서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대한 애정을 갖고 살아왔다. 파라마운트, 워너브러더스, 20세기 폭스, 유니버설 스튜디오, 컬럼비아 픽처스 등은 독자적인 제작 관행과 스타, 감독, 장르적 색깔을 발전시키며 100년을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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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의 하입 나우]
<15> 할리우드 IP 통폐합과 다양성의 종말
편집자주
김도훈 문화평론가가 요즘 대중문화의 '하입(Hype·과도한 열광이나 관심)' 현상을 예리한 시선으로 분석합니다.
8일 미국 뉴욕 뉴욕증권거래소에 스카이댄스 현수막이 걸려 있다. 스카이댄스는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가 워너 브러더스 디스커버리를 인수하면서 설립된 합병법인이다. 뉴욕=로이터 연합뉴스

나는 LG 휴대폰을 썼다. 그 시절은 휴대폰 브랜드가 꽤 많았다. 삼성 애니콜, 팬택 SKY, LG, 모토로라 등 골라 사는 재미가 있었다. 각각의 회사들은 매년 새로운 디자인의 휴대폰을 내놨다. 굳이 LG를 썼던 이유는 하나다. 디자인이다. LG는 초콜릿폰, 샤인폰, 프라다폰 등 재미있는 이름을 붙인 휴대폰을 많이 생산했다. 기술력에서 승부를 볼 수 없으니 디자인으로 승부를 본 건 아니다. LG는 온갖 기술을 탑재한 최선의 상품을 만들고도 홍보를 잘 못한다는 고유의 특징을 그때도 간직하고 있었다. 무뚝뚝한 회사다. 나는 무뚝뚝한 회사를 좋아한다.

LG전자가 '샤인폰'에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씨가 디자인한 한글 문양을 입힌 '샤인 디자이너 에디션'을 출시한 2006년 12월 19일 서울 삼청동 삼청각에서 모델들이 제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내가 쓰던 LG 휴대폰은 사실 일본 회사 휴대폰이었다. 당시 일본의 산요, NEC, 파나소닉 같은 회사가 생산한 휴대폰은 디자인이 아주 일본스러웠다. 그 동네 가와이(귀여움) 문화는 휴대폰 디자인에도 그대로 적용이 됐다. 나는 귀여운 디자인을 좋아한다. 한국은 일본 휴대폰을 거의 수입하질 않았다. 다만 LG는 가끔 일본 회사 휴대폰을 그대로 수입해 자기 로고를 얹어 팔았다. 나 같은 디자인 사대주의자들을 노린 것이었나 보다. 삼성이고 LG고 나발이고 오직 모토로라 레이저만 쓰던 친구들보다는 덜 편협한 선택이었다고 믿는다.

선택의 시대는 끝났다. 스마트폰 시대는 모든 것을 작살냈다. 이젠 애플과 삼성 외 선택의 여지는 없다. 재미없어 죽겠다. 어쩔 도리 없다. 소프트웨어의 시대가 오자 하드웨어 디자인은 더는 의미가 없어졌다. 나는 애플을 선택했다.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두 회사 제품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건 선택은 아니다. 디자인이 좋아서 애플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도 역시 좀 웃기는 일이다. 매년 출시할 때마다 미묘하게 디자인이 바뀌긴 한다만, 그래 봐야 직사각형의 뒷면 색깔이나 달라질 뿐이다. 어쩐지 글이 폴더폰 시절을 그리워하는 꼰대의 한탄이 되어가는 중이다. 꼰대라 어쩔 수가 없다.

애플의 최신 스마트폰 아이폰 18 프로·프로맥스가 국내에 공식 출시된 18일 서울 중구 애플 명동점에서 방문객이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꼰대에게는 또 한탄할 일이 생겼다. 나는 오랜 영화 꼰대로서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대한 애정을 갖고 살아왔다. 할리우드의 역사는 스튜디오의 역사다. 1930, 40년대 출범한 스튜디오들은 각각의 특징이 있었다. 파라마운트, 워너브러더스, 20세기 폭스, 유니버설 스튜디오, 컬럼비아 픽처스 등은 독자적인 제작 관행과 스타, 감독, 장르적 색깔을 발전시키며 100년을 살아남았다. 프랜차이즈 시대가 시작되며 각 스튜디오의 특징도 옅어지긴 했다. 어느 순간 다들 비슷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스튜디오의 자존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100년을 영화만 만들던 꼰대들의 자존심이다.

그런 시대는 끝이 나고 있다. 이달 6일, 파라마운트는 워너브러더스를 인수했다. 이름은 스카이댄스가 됐다. 스카이댄스는 2006년 영화 제작자 데이비드 엘리슨이 설립한 제작사다. 오라클 공동 창업자인 억만장자 래리 엘리슨의 아들인 데이비드 엘리슨은 막대한 자본력(그러니까, 아빠 돈)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그는 2025년 파라마운트를 인수했다. 할리우드는 탄식했다. 백년 역사를 가진 스튜디오를 IT 억만장자 아들이 삼켜버린 건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데이비드 엘리슨이 1년 만에 또 워너브러더스를 인수하려 하자 할리우드는 난리가 났다. 영화인들의 반대 성명이 이어졌다. 경쟁을 유지해야 고유의 색깔을 잃지 않을 거라는 근심이 터져 나왔다. LG가 휴대폰 사업을 접을 때의 내 마음이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데이비드 엘리슨(가운데) 스카이댄스 CEO가 8일 미국 뉴욕 뉴욕증권거래소에서 동료들과 대화하고 있다. 뉴욕=로이터 연합뉴스

이제 파라마운트와 워너브러더스는 없다. 데이비드 엘리슨은 회사 이름을 스카이댄스로 통합했다. 연간 30편 이상의 극장용 영화를 만든다는 조건을 내세우긴 했다. 근심을 잠재우기 위해서다. 그럴 리가. 스카이댄스는 60억 달러 비용 절감을 추진 중이다. 제작 편수와 관계없이 대량의 인력 감축이 이어질 예정이다. 당연히 파라마운트와 워너브러더스가 가진 고유의 색깔도 사라질 것이다. 머리가 통합되면 몸도 하나가 된다. 디즈니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시라. 2019년 월트 디즈니 컴퍼니는 전통의 20세기 폭스를 인수했다. 조지 루카스의 루카스필름도 인수했다.

디즈니는 다양성을 내세웠다. 덩치만 키우는 게 아니라 다양한 영화를 만드는 스튜디오가 되겠다고 자부했다. 말만 그랬다. 1935년부터 사용해 온 20세기 폭스라는 이름에서 '폭스'는 사라졌다. 폭스의 애니메이션 제작사 블루 스카이도 문을 닫았다. 디즈니는 루카스필름의 '스타워즈' 시리즈를 자사 OTT를 위한 양산형 IP로 바꿨다. '스타워즈'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시리즈만 매년 쏟아내자 전통의 팬들은 등을 돌렸다.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한 뒤 벌어진 일들을 떠올려보시라. 창의적인 애니메이션의 강자였던 픽사는 속편만 내놓는 지루한 이름이 됐다. 스카이댄스의 운명도 그렇게 될 것이다. 하나의 회사가 되는 순간 제작, 투자, 배급 전략도 같아진다. 색깔은 사라진다. 다들 다양성의 시대라고 외치는데 다양성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있다.

디즈니플러스 로고.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이 모든 건 넷플릭스 때문이다. 스트리밍의 시대가 오자 극장용 영화의 위기가 시작됐다. 지난 10년간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자체 콘텐츠만으로는 넷플릭스와 경쟁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선택한 방법은 덩치를 키우는 것이다. 전통의 스튜디오들이 100년간 축적한 콘텐츠를 확보하는 전략이다. 이제 개별 영화의 성공은 점점 덜 중요해지고 있다. IP를 확보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잡아먹어야 한다. 과거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영화를 통해 성장했다. 더 좋은 영화, 더 재미있는 영화, 더 다양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생존 방식이었다. 스카이댄스는 IT 산업에서 축적된 거대 자본을 무기로 할리우드를 통합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더는 영화가 아니다. 자본이다. 자본은 경영 방식도 바꾼다.

나 같은 꼰대가 이렇게 한탄해 봐야 소용없다. 새로운 세대의 관객들에게 스튜디오 이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스튜디오라는 하드웨어는 이제 의미가 없다. IP와 플랫폼이라는 소프트웨어의 시대가 왔다. 파라마운트, 워너브러더스, 유니버설, 컬럼비아라는 이름들은 노키아, LG와 모토로라처럼 사라질 운명이다. 참고로, 스카이댄스 대표 데이비드 엘리슨은 영화배우로 경력을 시작했다. 매력도 없고 연기력도 별로라 딱히 스타가 되진 못했다. 물론 나는 이 양반이 자기가 만들 영화에 자기를 캐스팅하는 뻔뻔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아니다. 일론 머스크, 샘 올트먼, 피터 틸 같은 IT 억만장자들이 요즘 벌이는 화려하고 괴상한 짓을 떠올려보니 내 믿음에 별로 자신은 없다.

김도훈의 하입나우

정준기 기자 j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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