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게 풀려 산뜻하게 녹아드는 맛

정동현 음식 칼럼니스트 2026. 10. 17. 00:3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스시

어머니와 스시를 먹으면 꼭 아버지 이야기를 하게 된다. “너희 아빠가 그렇게 스시를 좋아했는데 나중엔 먹지도 못하고.” 아버지는 간암 진단을 받고 얼마 후에 의사에게서 ‘날것을 삼가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 이후 아버지는 날것을 먹지 않았다. 어머니도 덩달아 스시 먹을 일이 사라졌다. 평생 먹는 것을 참는 게 힘들던 아버지는 생애 마지막에는 그 어떤 음식을 가져가도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께 ‘드시라’고 애원하는 날이 찾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먹는 데 취미가 없었다. 건강 진단을 받으면 백이면 백 “식사를 잘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 것도 오래됐다. 회사 쉬는 날 어머니와 따로 약속을 잡는 데는, 한 끼라도 제대로 채워주고 싶은 노림수도 있었다.

어머니 앞에 놓인 스시가 언제 사라지는지 곁눈질을 했다. 조금 전 주인장이 쥐어 준 스시가 여전히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하나씩 주니까 양이 정말 많은 거야.” 어머니는 억지로 먹는다는 듯 젓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스시를 들어 올렸다. 앞에 선 주인장은 불상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다음 생선을 다듬었다.

서울 마포구 ‘즐거운 마음으로’의 스시 오마카세.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자주 하는 식사가 아니니 더 나은 곳을 가고 싶었다. 그렇게 찾은 스시집 이름은 ‘즐거운 마음으로’였다. 어머니는 경의선숲길을 지나 이 집 앞에 설 때면 늘 같은 말을 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찾을 수 있겠니?” 건물 1층을 넓게 썼지만 위치가 길 뒤편이고 문은 벽과 구별이 잘 안 됐다. “예약만 받으니까 알아서 찾아오겠죠.” 내 대답도 늘 비슷했다. 인원수에 맞춰서 미리 재료 준비를 해놓아야 하니 즉흥적으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고 식사를 할 수는 없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니 마치 재즈바에 온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매킨토시’라고 이름 붙은 앰프와 커다란 스피커가 벽 뒤쪽에 붙어 있었다. 스시집치고는 꽤 공간을 크게 써서 주인장은 뒷주방과 앞 스시 카운터까지 오갈 때 발걸음을 늦출 수 없었다. 하지만 또 같은 이유로 음악 소리가 편안하게 울렸다.

어머니와 내가 자리를 잡고 앉자 곧 어란과 참송이버섯을 올린 달걀찜, 아귀 간을 감싼 광어회, 훈연한 삼치회, 졸인 문어가 연달아 나왔다. 작은 음식 하나라도 양념이나 재료, 혹은 조합에 변주를 줬다. 나는 음식이 나오자마자 표적을 노리듯 젓가락을 들었다. 어머니는 음악 몇 소절이 지나고 나서야 손을 움직였다. 두 점씩 나온 것 중 하나는 슬쩍 내 앞으로 밀어놓기도 했다.

씨알 굵은 바지락국이 나온 후 스시가 시작됐다. 정석대로 첫 점은 자연산 참돔이었다. 숙성을 했는지 도톰한 생선 살이 이에 한 번 걸렸다가 부드럽게 풀렸다. 밥에 스민 초와 간이 튀지 않고 생선이 머금은 기름기를 정돈해줬다. 분홍빛의 단새우는 투명했고 끈적임 없이 산뜻하게 녹아내렸다.

재료를 다듬는 손은 부산스럽지 않고 각을 잰 것처럼 절도가 있었다. “아빠가 살아 있었음 얼마나 좋아했겠니.” 어머니는 밥을 오래 씹다가 쉬고 다시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주인장은 어머니의 말과 말 사이에 스시를 내놓았다.

한치에는 제주도 영귤즙을 뿌렸다. 어린 황돔에는 영귤 껍질을 갈아 묻혔다. 내장을 살려 익힌 새우에는 새우를 갈아 구운 가루를 입혔다. 보스턴에서 온 성게알을 김에 말아 냈을 때는 난 어머니에게 ‘밥이 무너지니 이건 바로 드셔야 한다’고 말했다. 투명한 얼음처럼 잡맛이 하나도 없는 성게알이 달달한 뒷맛만 남긴 채 녹아내렸다. 기름기가 올라온 참치 뱃살에는 뿌리째 간 와사비를 잔뜩 넣었다. 전갱이 초절임에는 채 친 시소 잎과 실파 페이스트를 올렸다.

어머니는 한 점을 넘길 때마다 이야기를 하나씩 꺼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 여자 짝꿍을 못 만날까 봐 애를 태웠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거나, 이미 수십 번 들은 것들이었다. 주인장은 조용히 날카로운 칼로 생선을 자르고 아직 온기가 남은 밥알을 쥐어 스시를 만들었다.

근처 단골 가게에서 골라준다는 멜론을 다듬어 우리 앞에 내놓았을 때는 식사의 막바지였다. 눈이 크게 떠질 만큼 달고 시원했다. 어머니도 기어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입에 넣었다. 나는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점심 스시 코스 10만원, 저녁 스시 코스 20만원 0507-1322-1301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