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세상 모든 아버지를 위하여, 영화 ‘웨일폴: 고래에 먹힌 남자’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236번째 레터는 14일 개봉한 영화 ‘웨일폴: 고래에 먹힌 남자’입니다. 이 영화, 제목이나 스틸 사진이나 예고편을 보면 영락없이 해양괴수물입니다. 홍보 마케팅도 그런 쪽입니다. 저도 그런 줄 알고 별다른 기대없이 시사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전혀. 원작자가 올해 퓰리처상 수상 작가입니다. 아버지, 사랑했으나 제대로 작별하지 못한 아버지를 만나 화해하고 다시 태어나는 아들의 이야기랍니다. 어디서? 고래 뱃속에서. 이 영화를 흔한 서바이벌 스릴러로 오해하실까봐 제가 본 이 영화에 대해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자식에게 모든 걸 남겨주고 떠나는 아버지들에 대해서도요.

그러면, 영화 제목부터 보실까요. 영어 단어를 그대로 음차한 제목이라 언뜻 무슨 뜻일까 싶은데, 원제가 ‘Whalefall’입니다. 고래가 죽고 나면 그 사체가 심해로 가라앉아서(whale이 fall해서) 심해 생명체의 먹이가 되고, 그 먹이를 먹고 자란 생명체들이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낸다고 해요. 자신의 죽음으로 새로운 생명을 이어가게 하고 빛이 되게 하고. 삶의 순환을 상징하는 단어죠. 여기까지만 들으셔도 이 영화가 서바이벌 액션 서스펜스 호러 재난 스릴러에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으시나요. (물론 그런 부분도 있습니다.)
한국어 제목은, ‘웨일폴’이라고만 쓰면 아무도 모르니까 즉각 알아들 수 있게 ‘고래에 먹힌 남자’를 덧붙였습니다. 그 심정이 이해는 가는데, 저만해도 저 제목 때문에 별로 관심이 안 갔어요. 대왕고래, 대왕문어 이런 류의 거대한 생물체가 나오고 피튀기게 싸우고 어쩌고 하는 류, 넷플릭스에서 수시로 양산되는 저가보급형 영화 제목으로 딱 적합하게 들려서요.
하지만, 갔습니다. 시사회. 그렇더라도 일단 보는게 저의 일. 그리고 아주 기분 좋게 놀랐습니다. 서바이벌 액션 서스펜스 호러 재난 스릴러처럼 포장돼 있는데 이렇게 문학적일수도 있구나. 관객들이 짐작하기 어려울텐데 레터로 꼭 보내야겠다, 생각하면서.

영화 보고 나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이 작가 검색이었어요. 역시는 역시. 원작 소설 작가 다니엘 크라우스가 다른 영화도 아니고 기예르모 델 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의 원안자더군요.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그 영화. 정부가 운영하는 비밀스러운 연구소에 양서류 인간이 있고, 청소부가 발견한다는 다니엘 크라우스의 아이디어를 델 토로 감독이 듣고 영화로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원래 두 사람이 다른 작품 같이 만들다가 대화 중에 얘기가 나왔다는데, ‘셰이프 오브 워터’가 소설로 나왔을 때 다니엘 크라우스도 공동 작가로 들어갔습니다. 올해 5월에 발표된 퓰리처상에선 픽션 부문에서 ‘Angel Down’으로 상을 받았는데 한글판이 나왔나 검색해봤더니 아직이네요.
물에 대한 상상력이 남다른 작가가 철처한 취재와 탐구를 거쳐서 완성한 소설이 ‘웨일폴’입니다. 맞아요. 이 영화 실화 아닙니다. 보시고 나면 젤 먼저 궁금해지실 거에요. “이거 실화야?” 아니라고 합니다. 다니엘 크라우스가 과학적인 근거를 철저하게 묻고 확인해서 썼다고 해요. 제목에서 워낙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바로 말씀드릴 수 있지만, 주인공이 산 채로 통째로 꿀꺽 고래한테 잡아먹힙니다. 자칫하면 환상소설인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실화를 재구성한듯 실감나게 전개됩니다. 저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지? 하면서 몰입하게 돼요.

주인공이 잡아먹히는 고래가 향유고래(sperm whale)인데, 사람을 통째로 삼켜서 위까지 통과시킬 정도의 식도를 가진 고래가 향유고래라서 선택했다고 합니다. 고래 중에는 식도가 턱없이 좁아서 살아서는 위까지 도달할 수 없는 종류도 많대요. 사람이 고래한테 잡아먹혀서 그대로 끝나버리면 영화가 전개되기 어렵겠죠.
아니, 그럼 사람이 고래한테 잡아먹히는데 살아나왔다는 건가? 도대체 어떻게? 거기에 대한 생생한 답변이 이 영화에 있습니다. 아마 고래 뱃속에서 위장 운동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구체적으로 길고 상세하게 보여주는 거의 최초의 영화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럼, 주인공이 애초에 어떻게 고래 뱃속에 들어가게 됐는지부터 말씀드릴게요.

영화는 한 남자의 얼굴로 시작합니다. 우리의 타노스, 아니 조쉬 브롤린(영화 속 이름은 미트 가디너)입니다. 과거 전설적인 잠수부였던 남자. 관객은 이 장면에선 아직 그것까진 알 수 없고, 타노스 나왔네, 반갑네, 하실텐데, 나오자마자 그가 기침을 합니다. 바다에 떠있는 배에 타고 있는데 어쩐지 아파보여요. 게다가 옆에 있는 다른 남자는 울고 있습니다. 왜 저래? 하는데 이런, 그가 바다로 뛰어듭니다. 죽었어요. 뒤따라 스크린에 뜨는 제목. ‘웨일폴 Whalefall’.
다음 장면. 한 청년이 차 안에서 눈을 뜹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죽은 남자의 아들 제이(오스틴 에이브람스)입니다. 남자가 죽은 지 1년 후 시점이고요. 남자는 말기암에 걸려 있었고, 예정된 죽음 앞에서 바다로 돌아가길 선택했습니다. 외아들 제이에게 유서 같은 편지를 남겼는데, 아직도 읽질 않았어요. 집을 떠나 타지에서 대학을 다니던 제이는 가족들 몰래 아버지가 뛰어든 바다로 들어갈 계획을 세웁니다. 시신의 일부라도 찾겠다면서요. 아버지와 아들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바다를 가르쳐주려 했고, 아들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모든 게 싫다며 거부하거나 저항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했고, 자신을 증명하려 애썼죠.
갑자기 떠나버린 아버지의 시신 일부라도 찾아내려 ‘입수 금지 구역’으로 들어가는 아들. 마침 어제는 고래가 목격돼 해안경비대까지 나섰는데도, 그는 결연합니다. 그 후는 짐작하신대로. 바다에 들어갔다가 고래에 먹히는거죠. 해골인가 싶어서 뭔가를 주웠다가 실망해서 던졌는데 하필 그게 저 아래로 떨어져서 대왕오징어를 맞혔습니다. 아뿔싸, 도망가는데, 맙소사, 그 대왕오징어를 잡아먹겠다고 거대한 고래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도망가던 아들은 오징어 다리에 온몸이 감겨서 발버둥치다가 오징어와 함께 고래 뱃속으로.

이후는 문자 그대로 서바이벌 스릴러입니다. 아무리해도 방법이 없어보이는 상황이죠. 어떻게 고래 밖으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초인적일 거 같은데, 여기서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엄격하고 때론 가차없었던 아버지, 벗어나고만 싶었던 그 아버지에게서 배웠던 모든 생존 스킬이 순간순간 떠오른 거죠. 아버지에게 스쳐가듯 들었던 말, 그때는 지긋지긋했던 질책, 모든 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구원이 됩니다. “바다가 네 집이야. 같이 살고 같이 죽어야지.” 채찍 같았던 조언이 등대가 됩니다.
고래 뱃속에 들어간 직후에는 아직 오징어도 같이 살아있어서 큰 고비를 맞기도 해요. 오징어가 소화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니까 같이 휘말려서요. 이런 부분은 직접 보셔야 합니다. 장관,이라고 하면 조금 미안하지만, 이 영화만 보여드릴 수 있는 장면이니까요. 고래 뱃속은 360도 회전하는 세트를 만들고 66만리터 물을 담을 수 있는 수중 탱크를 설치해서 촬영했다고 합니다. 와, 저걸 어떻게 찍었지 싶은 순간이 연속으로 이어집니다. 아들 역의 배우 오스틴 에이브람스도 꽤나 고생했을 거 같고요.
맥가이버가 떠오르는 순간도 이어지는데, 고래가 삼킨 각종 물건들, 철수세미며 비닐봉지며 양말 등등이 아버지의 조언과 더불어 위기를 헤쳐가는데 요긴하게 쓰입니다. 중간에 생고생도 물론 많이 합니다. 갈비뼈도 부러지고 발목도 부러지고 뭐, 성한 곳이 없죠. 그런데도 생존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버티던 아들, 고래 뱃속에 같이 삼켜진 해파리를 손전등 삼아 식도를 거꾸로 타고 올라가는데 거의 성공합니다. 거의.
“이런, 여기가 어디야. 그래, 가보자. 미치겠네. 기가 막히네. 벌려! 벌리라고! 좀!!” 이런 대사가 이어지는데 ‘고래 식도 타고 거꾸로 올라가기 액션’은 이 영화에서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쉽게 짐작이 안 되는 스릴, 확실합니다. 고래가 나를 어떻게 하면 토하게 만들수 있을까를 누가 연구나 해봤을까요.

해파리를 손전등처럼 썼다고 말씀드렸는데, 아들이 해파리하고 대화를(정확하게는 혼자서 말을 거는)하는데, “안녕, 반가워, 같이 탈출하자, 길 좀 밝혀줘” 하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됩니다. 길을 밝혀준 것은 아버지였다는 것을. 불현듯 떠오른 조언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들도, 관객도 느끼게 됩니다. 이 고래가 아버지구나. 자신의 삶을 질식시키는 것 같아서 도망치고만 싶었던 아버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미워만 할 수도 없었던 아버지. 저는 이 지점에서 ‘웨일폴’이 기존 서바이벌 액션 스릴러와 확연하게 다른 길로 들어선 게 아닐까 합니다.
이후의 후반부는 직접 꼭 보셨으면 해요. 고래, 아니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야 아들은 자신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기꺼이, 자신이 죽어서, 죽음으로 해서, 아들에게 새 삶을 주려 합니다. 아들이 다시 태어나는 후반부 장면이 있는데, 은유가 아니라 직유로 묘사한다고만 말씀드릴게요. “아빠, 왜 저를 낳으셨어요?” “전부 알려주고 싶었다.” “소용없었네요.” “있었지.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부자 사이에서만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과 생명력을 이보다 더 진하고 분명하게 보여줄수가. 서바이벌 서스펜스 액션 호러 스릴러인척 하면서.
아버지 역의 조쉬 브롤린은 박수쳐주지 않을 수 없는 캐스팅입니다. 회상에서 주로 등장하다보니 목소리가 중요한데, 강직하면서 어딘지 쓸쓸한 음성이 깊이를 줍니다. 조쉬 브롤린의 얼굴로 시작했던 영화는 정확한 데칼코마니 장면으로 끝나는데요, 보시면 충분히 만족감하실 클로즈업입니다.
포털에 노출된 ‘웨일폴’ 내용에 상어처럼 묘사된 고래 이빨, 재난 서바이벌 액션만 강조한 포스팅이 난무해서, 다른 면도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려다보니 말이 길어졌어요. 다른 영화에 없는 고래 뱃속 탈출 스릴러도 물론 있지만, 끝을 알 수 없는 바다만큼 깊고 진한 부성애도 품고 있는 영화라는 점,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며, 그럼, 다음 레터에서 뵐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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