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탄 36세 맞벌이, 연봉 2억·순자산 7억"…'다음은?' 물었더니

안재광/임다연 2026. 10. 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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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서울 반포동 래미안 트리니원. 단지 곳곳에서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강력한 비교 사회'인 한국에서 내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남들이 사는, 선망하는 아파트라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다.

커뮤니티에 나이와 연봉, 자산을 올리고 '다음 테크'를 물으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경로를 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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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4만달러 시대 품격을 묻다
(4) 구심력 사회에서 원심력 사회로
비교 공화국, 남의 길 좇다 나를 지웠다
밀려나면 끝이란 공포…획일화된 목표 지향
아파트·대학·직장 '1등 정답'만 보고 달려가
지난 12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 트리니원 단지 앞을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올 8월 입주를 시작한 이 아파트는 반포동의 새로운 ‘대장 아파트’ 후보로 꼽힌다. /김범준 기자


지난 12일 서울 반포동 래미안 트리니원. 단지 곳곳에서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주민이 아니라 새 아파트를 답사하러 온 사람들이다. 서울 동작구 주민 김모씨(55)는 “살 수 있는 집은 아니지만 1등 아파트를 보고 싶어 둘러보고 있다”고 했다. 이 단지 전용면적 84㎡ 호가는 60억원 안팎이다. 

올 8월 입주를 시작한 트리니원은 내년 입주하는 디에이치 반포124와 차세대 대장 아파트를 겨루는 단지다. 부자 동네는 어느 나라에나 있다. 한국이 다른 점은 모두가 한곳을 쳐다본다는 것이다. ‘강력한 비교 사회’인 한국에서 내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남들이 사는, 선망하는 아파트라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다.

획일적 비교 사회의 또 다른 지표는 대학 진학률이다. 지난해 한국 청년(25~34세)의 대학 졸업률은 71.1%. 18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남들 다 가는 대학에 가지 못하면 패배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높은 대학 진학률로 나타났다. 여기에 직장을 더해 한국인 삶의 기준은 ‘부동산’ ‘학벌’ ‘직장’이라는 세 가지 상징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역으로는 서울이다.

한국이 강력한 비교 사회가 된 것은 단일한 민족이 좁은 지역에 몰려 사는 밀집성에서 기인했다는 게 사회학자들의 평가다. 주변이 모두 비교 대상이라는 얘기다. 여기에 압축 성장이라는 요인까지 더해졌다. 동질적인 사회 구조에서 단일한 성공 기준을 갖게 된 배경이다.

비교와 경쟁은 경제성장기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앞서가려는 욕구는 개인뿐 아니라 기업, 국가 발전의 동력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사다리에 오를 수는 없다. 한강변 아파트는 한정돼 있고, 좋은 직장은 늘어나지 않고, 경쟁에서 탈락해 체념하는 청년은 늘고 있다.

사다리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의 박탈감은 남이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는지 따지는 ‘검증’으로 이어진다. 검증에서 문제가 생기면 비난이 집중된다. 비교가 ‘저격’의 재료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오이시 시게히로 미국 시카고대 심리학과 석좌교수는 “지나친 비교 없이도 성장을 추구할 수 있다”며 “그러려면 개인은 남이 아닌 자기만의 기준을 갖고, 사회는 성공에 이르는 여러 갈래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의 품격을 갖추려면 단일한 목표를 추구하는 구심력 사회에서저마다의 길을 인정하는 원심력 사회로의 전환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설명이다.

그래픽=전희성 기자

"남들 가는 길 가야 실패 안하죠"…인생 정답표에 갇힌 한국인들
하나의 성공기준, 과거엔 성장 동력…궤도 이탈 '낙오'로 볼 때 부작용 커져

“36세, 맞벌이 연봉 합산 2억원, 순자산 7억원. 경기 동탄에 사는데 다음 테크 뭐 타야 하나요?”

지난 2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하루도 안 돼 댓글 50여 개가 달렸다. “분당 구축으로 한 번 점프한 뒤 서울 마용성(마포·용산·성동구)이 정석” “애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학군지로 가야 한다”는 답글이 이어졌다.

 “남들 어디 가나 먼저 물어”

‘테크트리’는 원래 전략 게임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어떤 건물을 먼저 짓고 어떤 기술을 다음에 익혀야 이기는지를 순서대로 정리한 일종의 공략표다. 이 말이 요즘 한국에선 인생 전체에 쓰인다. 학교와 학과, 직장, 사는 동네는 물론 취미까지 ‘다음 단계’가 정해져 있다는 생각에서다. 테크트리는 남과의 비교에서 나온다. 남들이 어디까지 갔는지를 보고 내 다음 단계를 정하고, 단계마다 매겨진 서열로 내가 남보다 앞섰는지 뒤처졌는지 판단한다.

부동산 테크트리가 대표적이다. 경기 외곽지역에서 시작해 분당이나 광교로, 다시 마용성을 거쳐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로 옮겨 가는 경로가 일종의 정답처럼 통한다. 각 단계는 ‘급지’라는 말로 서열이 매겨진다. 서울 25개 자치구를 1급지부터 7급지까지 나눈 ‘급지표’가 상식처럼 통한다.

교육에도 테크트리가 있다. 영어유치원과 초등 수학 선행으로 시작해 서울 대치동 학원가를 거쳐 과학고나 자율형사립고, 다시 상위권 대학 인기 학과로 이어지는 길이다. 몇 년 전까지는 의대 진학이 압도적이었고, 한때는 배터리 학과도 인기가 있었다. 지금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계약학과가 급부상했다. 대치동의 한 입시학원 임원은 “학부모들은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보다 이 점수로 남들은 어디 가는지를 먼저 묻는다”고 했다.

 취미생활도 끊임없이 비교

사회에 나온 뒤에도 테크트리는 이어진다. 첫 직장은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들어간 뒤 3~5년 차에 연봉을 올려 이직하고 다시 성과급을 많이 주는 회사로 옮기는 식이다. 올해 반도체 호황으로 성과급이 크게 오르자 직장인 커뮤니티에는 ‘삼전닉스(삼성전자·SK하이닉스) 이직 테크’를 묻는 글이 쏟아졌다. 경기도의 한 중견기업에 다니는 윤모씨(39)는 “입사 7년 차인데 동기 모임에 나가면 지금 회사에 남아 있는 내가 실패한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취미 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달리기를 시작하면 입문용 러닝화에서 카본 러닝화로, 다시 고가 운동용 시계와 해외 마라톤 투어로 단계가 이어진다. 염모씨(48)는 “운동하려고 러닝크루 활동을 시작했는데 어느새 장비, 기록 같은 것을 통해 서로의 급을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기 인생의 다음 단계를 남에게 묻는 일도 흔해졌다. 커뮤니티에 나이와 연봉, 자산을 올리고 ‘다음 테크’를 물으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경로를 짜준다. 돈을 내고 물어보는 사람도 많다. 재능거래 플랫폼 크몽에서는 아파트 구매 상담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스스로 해야 할 고민을 남에게 맡기는 이른바 ‘고민의 외주화’다.

 “집단주의는 과거 성장 동력”

한국에서 테크트리가 유독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유로 좁은 땅에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성공의 기준이 하나로 모였다는 점이 꼽힌다. 테크트리를 따르는 것은 개인에게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남들이 검증한 길이어서 실패할 위험이 작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두가 같은 선택을 할 때 생긴다. 좋은 자리는 한정돼 있는데 수많은 사람이 같은 곳으로 몰리면서 경쟁은 치열해진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하는 사람도 줄어든다. 테크트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낙오’로 여겨진다. 청년들이 일하고 싶어 하는 곳도 몇 군데에 몰려 있다. 국가데이터처의 지난해 사회조사에서 13~34세 청년이 가장 일하고 싶어 하는 직장은 대기업(28.7%), 공기업(18.6%), 국가기관(15.8%) 순이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표준화된 삶의 방식은 과거 생존과 성장의 동력이었다”며 “이제는 남과 비교하고 완벽함을 추구하는 삶에서 조금씩 벗어날 여유가 생긴 만큼 다양한 삶을 포용하며 그동안의 성공이 낳은 문제를 직면하고 극복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안재광/임다연 기자 ahn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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