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 신부 김대건의 비밀 바닷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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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최북단 백령도에는 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 성 김대건(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마지막 숨결이 닿아 있다.
김대건 신부가 개척한 바닷길로 프랑스 성직자 17명이 조선에 입국해 천주교는 조용히 들불처럼 번질 수 있었다.
청년 사제의 결기는 이 외딴 섬에 지워지지 않는 신앙의 유산으로 각인되었고, 천주교인천교구와 인천관광공사 섬해양관광팀은 백령도의 성당 한 곳과 10곳의 공소를 둘러보는 순례길을 만들었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는 백령도 유일의 성당이며, 섬 내에서 유일하게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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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최북단 백령도에는 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 성 김대건(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마지막 숨결이 닿아 있다. 1845년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했던 스물다섯의 청년 김대건은 이듬해인 1846년 5월, 한양 마포나루에서 돛을 올렸다. 쇄국의 서슬 퍼런 감시망을 뚫고 천주교 사제들이 들어올 새로운 바닷길을 열기 위해서였다.
목적지는 백령도였다. 그는 백령도에서 외국 어선과 접촉해 선교사들이 국내에 들어올 수 있는 바닷길을 열었다. 김대건 신부가 전한 편지와 지도는 중국을 거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에 안전하게 전달되었다. 이후 한양으로 돌아가던 중 황해도 순위도에서 붙잡혀 3개월 후 형장의 이슬로 숨을 거두었다.
김대건 신부가 개척한 바닷길로 프랑스 성직자 17명이 조선에 입국해 천주교는 조용히 들불처럼 번질 수 있었다. 그러나 17명 중 9명이 병인박해로 순교했고, 3명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했으나 나머지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사후 6명의 주교와 신부가 성인으로 이름 올렸다.
당시 조선은 교황청과 프랑스에서도 악명 높은 선교지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3명의 주교와 신부가 참수형을 당했기에, 조선에 파견되는 것은 사형 선고와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파리외방전교회 방식 자체가 '지원제'이고, 이들은 "가장 위험하고 버림받은 선교지로 보내 달라"고 청원했다고 한다. 때문에 파리 본부에서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떠나는 날 열리는 파견 미사는 장례식과 같았다고 한다. 이들은 "살아서 다시 만날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라며 생전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고 배에 올랐다.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는 말만 하면 살려주겠다는데, 뜻을 꺾지 않아 죽은 조선인 신자가 조선 후기를 통틀어 1만여 명에 이른다고 하니 놀랍다. 김대건 신부와 파리외방전교회의 행적 또한 특정 종교를 넘어 생애를 온전히 던진 숭고함에 숙연해진다.
백령도는 17명의 성직자들을 불러들이는 결정적인 첫 발이었다. 청년 사제의 결기는 이 외딴 섬에 지워지지 않는 신앙의 유산으로 각인되었고, 천주교인천교구와 인천관광공사 섬해양관광팀은 백령도의 성당 한 곳과 10곳의 공소를 둘러보는 순례길을 만들었다. 다만 최전방 군사지역이라 공소를 연결하는 산길을 이을 수 없어, 찻길을 이었다. 백령도는 국내에서 8번째로 큰 섬이고 해안선 길이만 52km에 달해 아스팔트 길을 걸어서 순례하기는 쉽지 않아, 현지 여행사 버스를 타고 둘러보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성당 하나에 10개의 공소公所가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은 전국에서도 유례가 없다. 공소는 사제가 상주하지 못하는 섬과 산골의 신자들이 스스로 모여 기도를 올리고 신앙을 지켜온 가장 기초적인 믿음의 보금자리다.
거대하고 화려한 성당의 위용 대신, 백령도의 공소들은 거센 해풍을 견디기 위해 민가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낮고 다정하게 엎드려 있다. 소박한 가정집 형태의 건물 지붕에 얹힌 작은 십자가와 성모상, 정갈하게 닦인 마루는 섬사람들의 삶을 보듬어온 사랑방이자 거친 파도를 건너온 신앙 공동체의 온기다.
인천관광공사 섬해양관광팀은 김태후 팀장의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인천관광공사 윤재구 차장과 천주교 신자들은 3년 동안 공소 구석구석의 묵은 먼지를 쓸고 닦으며 '백령도 공소 순례길'을 다듬었다. 지난 9월 7일 첫 결실이 있었다. 백령도 전문 까나리여행사와 인천관광공사·천주교인천교구가 함께 띄운 1박2일 첫 공식 순례 여행에 인천의 천주교 신자 30명이 첫발을 내디뎠다. 3년의 준비 기간 끝에 돛을 올린 첫 여행에 동행했다. 비포장 흙길과 마을 고샅길을 따라 11곳의 쉼표를 하나씩 마주하는 여정, 바람의 섬 백령도가 건네는 가장 낮고 따뜻한 위로가 그곳에 있었다.
1. 백령성당
1959년 공소에서 성당으로 승격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는 백령도 유일의 성당이며, 섬 내에서 유일하게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있다. 넓은 잔디밭과 그곳에서 보이는 북한 땅이 인상적이다.


2. 관창동공소
1959년 모페트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관창동은 조선시대 군수물자 창고가 있던 유서 깊은 마을이며, 과거 공소에서 세례식이 열릴 정도로 활발히 운영되었다. 지워지다시피 한 '평화' 글귀와 무성히 자란 잡초가 마음의 평화를 주는 조용한 곳이다.


3. 신화동공소
1958년 윤을수 신부와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민가에서 미사와 교리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공소 건물이 세워져 신화동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4. 가을공소
1958년 윤을수 신부와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1961년 주민들이 직접 공소 건물을 지었으며, 군종교구 장병들의 미사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과거, 가장 활발히 운영되었던 공소다.


5. 소가을공소
소가을리 공소는 1959년 모페트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가건물을 공소로 사용하다가 1961년 지금의 건물을 지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지금은 연 1~2회 미사가 봉헌된다.


6. 연화리공소
1958년 윤을수 신부와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들이 세웠다. 연화리는 큰 포구가 있어 어선들이 모이는 마을이라 신도가 많았다. 지금은 바다와 어우러진 조용한 묵상 장소로 순례자와 주민을 맞는다.


7. 두무진공소
1962년 모페트 신부가 세웠다. 백령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선으로 꼽히는 '두무진'에 있으며 인간 골목에 있어 소박한 가정집 분위기다. 미사가 끊어졌다가 2011년 해군 장병들의 노력으로 보수 후 재개되었다.


8. 장촌공소
1961년 모페트 신부가 지었다. 임시 건물을 사용하다가 1970년 지금의 건물을 세웠다. 오랜 시간 장촌리 신앙의 중심이었으나 지금은 조용한 기도 공간으로 남아 있다.


9. 화동공소
1961년 모페트 신부가 세웠다. 과거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들이 상주하며 선교와 교리 교육을 하여, 한때 150여 명의 신자가 모일 만큼 활발했던 공소다. 매주 주일미사가 열렸던 적도 있으나 지금은 조용히 순례자와 주민을 기다리는 공간이 되었다.


10. 사곶공소
1961년 모페트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1965년 지금의 건물이 세워졌으며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까지 유지되어 있다. 백령도에서 가장 넓은 모래해변이자 관광 명소인 사곶해변과 인접해 있다.


11. 용기포공소
1961년 모페트 신부가 세웠다. 주민이 제공한 땅에 공소 건물을 지었으며, 백령성당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어 방문객이 드물어 연간 1~2회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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