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도 불켜진 TSMC 가보니..밤낮없이 연구 매진 [기술, 다시 공장(19)]
총성 없는 반도체 전쟁...주 52시간' 발목 잡힌 한국 R&D

'똑같은 반도체 특수를 맞고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만5000달러를 넘겨 한국을 2년 연속 추월한 나라, 그 일등공신인 세계 1위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 TSMC를 국가를 지키는 '호국신산'으로 칭하고 전폭 지원하는 나라.'
중국의 추격 위협에 직면한 한국 메모리와 달리 단일 파운드리 기업 한 곳이 전 세계 점유율 72.5%를 잠식하며 먼 발치서 독주 중인 대만의 경쟁력을 보여주는 단면들이다.
지난 9월 27일 저녁 8시. 이날은 한국 추석 연휴와 겹쳐 대만도 중추절 휴일이었다. 그럼에도 신주과학단지 내 TSMC 공장은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수도 타이베이역에서 신주역까지 HSR(고속열차)를 타고 35분, 택시로 10여분을 이동하는 동안 칠흙같이 어두운 공장 분위기를 예상했지만 현실은 딴판이었다. TSMC 본사 '모리스 창 빌딩' 주변으로 직원들을 태운 대형 셔틀버스가 여러 대 오가고, 퇴근 후 저녁식사를 배달하는 오토바이 차량들이 지나갔다.
그 중 TSMC F12 단지는 꼭대기 층까지 사무실에 불이 켜져 건물 전체가 환했다. 이곳은 12인치 웨이퍼 생산을 주력으로 하면서 공정 기술 연구개발을 함께 수행하는 복합 단지로 TSMC 주요 경영진이 의사결정을 하는 본사 건물과 연결된 핵심 거점 역할을 한다. 평일과 휴일, 24시간 밤낮 구분없이 연구에 매진하는 집중과 몰입이 세계 1위 저력의 근간일 거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작년 말부터 최첨단 2nm 공정을 가동 중인 F20를 포함해 적막이 흐르는 단지는 한 곳도 없었다.

동시에 한국을 떠올렸다. K-반도체의 엔진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연구동은 마음 편히 불 켜두고 연구개발에 몰입할 환경이 되지 못한다.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규제에 가로 막혀있기 때문이다. 2018년 도입된 주 52시간제가 일률 적용되면서 반도체 R&D도 발목이 잡힌 상황이다. 그 사이 삼성 파운드리는 글로벌 점유율이 5.9%까지 하락해 TSMC를 최대 경쟁사로 명하기도 머쓱해졌고, 메모리 분야에선 어느새 점유율 10%까지 치고 올라온 중국 CXMT의 추격에 쫓기는 실정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연구직까지 근무시간 족쇄를 채운 것을 두고, R&D 현실을 모르는 탁상행정이라고 한숨을 내쉰다.
김용석 가천대 반도체학과 교수는 "연구개발 특성상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연속성이 중요한데, 근로시간 규제가 기술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년간 반도체 설계 직군에 종사했던 A씨는 R&D 개발은 애초 목표 달성량이 정해진 생산직군과 근무 환경이 확연히 다르다고 강조한다. A씨는 "설계 후 제조라인을 거쳐 시제품 칩이 나오면 끊임없는 테스트를 반복해야 한다"며 "곧 오류가 잡힐 거 같은데 불끄고 퇴근하라고 등떠미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개발 열정이 남다른 직원들은 추가 수당을 포기한 채 편법을 쓰기도 한다. 한 업계 관계자 B씨는 "삼성과 하이닉스에서는 퇴근 카드를 찍은 뒤 야근하는 동료가 출입할 때 몰래 같이 들어가는 연구직들도 있다"고 귀띔했다.
근무 유연성이 보장되는 해외에선 몰입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대만은 주 40시간제가 있지만 노사 합의에 의해 하루 12시간까지 늘릴 수 있다. TSMC 연구동이 휴일 저녁에도 환히 불켜져 있던 배경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996 근무제(오전 9시~오후 9시, 주 6일)는 사실상 불법이지만 정부가 독려 차원에서 일일이 대응하지 않아 관행처럼 자리잡았다. 불야성 근무 환경은 거센 추격의 밑거름이다. 최근 중국 D램 제조사인 CXMT가 전 세계 시장점유율 10%로 두 자릿수를 넘기고, 한국 메모리가 주도하는 HBM과 LPDDR6 등 신기술에서도 격차를 빠르게 좁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전 산업의 고소득·연구개발직 초과근무 허용을 주장하고 나선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는 "앞으로 성장은 화이트칼라의 혁신과 창의성에 달렸다"고 했다. 근로시간 규제개혁 없인 나라 발전도 없다고 작정하듯 쓴소리를 뱉었다. 정치권에서도 호남권 메가특구법 제정과 맞물려 반도체 R&D 인력의 초과근무 허용 논의가 급물살을 타는 중이다. 노동계에선 반도체만 예외일 수 없다고 손사레를 치지만, 국경 밖은 차세대 기술 개발과 양산을 놓고 촌각을 다투는 전쟁터다. 유회준 카이스트 AI반도체대학원장은 "중국 추격을 생각하면 주 52시간은커녕 365일, 24시간 일을 해도 초격차를 유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신주(대만)=김이슬 머니투데이방송 MTN 기자